일상/일상시

외가

기독항해자 2021. 4. 24. 10:44

예전에는 외가댁을 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자가용으로 30분이면 갈 수 있지만

예전에는 2시간 내지 3시간이나 걸리는 길이었다

 

외가댁을 가려면 예산까지 버스를 타고

예산 터미널에서 대흥, 광시행으로 갈아 탔다

예산 터미널이 지금 있는 자리가 아니라

예산 읍내에 있었다

 

버스는 오가 응봉을 거쳐 대흥에 도착한다

응봉까지는 포장 도로였지만 응봉을 지나면

그때부터 비포장 도로가 시작된다

 

대흥은 예산의 읍지였다

대흥에는 임존성이 있다

흑지상지가 백제부흥운동을 일으켰던 곳이다

임존성 전설도 임존성에는 있다

 

지금은 관아도 볼 수도 있고, 

의좋은 형제 공원도 있다

예전에 외가댁에 자주 갔지만

관아를 본 적이 없다

외가댁에서 놀러가서 시간을 보내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대흥에는 향교도 있다

대흥에는 예산에는 없는 것들이 참 많다

외가댁 앞에는 너른 호수가 보인다

나는 외할머니가 그 너른 호수를 보면서

종종 한 숨을 쉬는 것을 보았다

그곳에는 비록 생전에 뵙는지 기억이 잘 안나지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한숨이 있다

그곳에 문전옥답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흥에 그 너른 호수가 생긴 것은

일제강점기 때부터다

완공은 1964년도에 군사정부에 의해 이루어졌다

일제는 조선농지개발사업의 하나로 착공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대흥이 예전의 흑지상지가

부흥 운동을 일으켰던 곳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잘 알고 있던 두려움이 일제에게는 있었을 것이다

 

예전에 그곳에는 5일장이 섰다

중학교, 고등학교도 있다

지금도 중학교, 고등학교는 그 이름을 이어오고 있다

 

나는 수몰민들의 비애를 모른다

그들의 생업터를 생긴 빼앗긴 사람들의 아픔을 잘 모른다

수몰민들은 몇 푼 안 되는 보상금을 받고 떠났을 것이다

외가댁은 그 동은 적산가옥과 다락논을 샀다

다락논은 문전옥답과 비교할 수가 없다

외할머니는 너른 호수와 다락논을 볼 때마다 한 숨이 나오셨을 것이다

 

나는 적산가옥이 북동향이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나는 20대 이후로는 거의 외가댁을 가 본 적이 없다

외가댁은 차에서 내려서도 한 참 걸어올라가야만 갈 수가 있다

외가댁에는 밤나무가 8그루나 되었다

외할머니는 밤을 그렇게 아끼셨다

가을이 되면 밤이 떨어진다

나무가 높아서 밤을 털 수가 없었다

아침마다 떨어진 밤을 골라서 부엌 토광에 간직했다

 

외가댁에서 나는 밤을 먹어본 적이 없다

지금 생각하면 그 밤은 할머니의 요긴한 쌈짓돈이었을 것이다

외할머니는 그 밤을 잘 모아 놓았다가 예산장으로

역전장으로 설 때마다 돈과 맞바꾸었다

외할머니는 그 돈으로 설과 정월대보름을 준비했을 것이다

 

농부들이 그때도 과수나무를 심었다

과일나무를 심은 이유는 추석과 설 명절 때문이다

추석과 명절 때가 되면 시장이 활력을 얻는다

사람들은 사과와 배를 가지고 와 돈과 바꾸었다

그 돈으로 명절을 준비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돈을 산다고 말한다

 

지금은 다 흘러간 추억이고 아련한 기억이다

사람들의 기호가 바뀔 때마다 과수원들의 과수들도 바뀌었다

생산자 중심에서 소비자 중심으로 바뀐 것이다

 

나는 외가댁을 떠올릴 때마다 외할머니의 한숨 소리를 듣는다

너른 호수가 펼쳐진 예당지가 떠오른다

나는 생각해보면 외가댁이 좋았다

물론 나보다 더 좋아하는 남동생이 있다

남동생은 외가댁 식구들과 사이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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