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오늘은 이 본문을 비틀어서 보겠습니다.
안식은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안식은 일하는 사람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일하는 사람으로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때의 노동은 먹고살기 위한 노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는 노동입니다.
창세기 2장 5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자, 사람 앞에 수식하는 어구가 나옵니다.
땅을 갈이란 수식어가 사람 앞에 있습니다.
이게 사람의 존재 목적입니다.
사람은 노동하는 사람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사람은 일을 함으로 활력을 얻습니다.
사람은 일을 함으로 자기가 살아 있음을 그리고 의미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물론 여기서 일은 먹고 살기 위한 일이 아닙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에게 일은 먹고 살기 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에덴 동산에서 추방된 후에 일은 먹고 살기 위한 일이 되었습니다.
일의 성격이 바뀐 것입니다.
그렇지만 일이 사람의 자아를 실현하는 수단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에덴 동산의 일은 정원사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인류 최초의 직업은 정원사입니다.
그런데 사회가 발전하면서 일하는 사람과 일하지 않는 사람으로 분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육체 노동을 천시하게 됩니다.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을 천시하고 그것을 노예들이 하게 하였습니다.
힘이 있는 사람은 노동을 하지 않았고 그것을 노예들이 하게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노동을 정신적인 노동과 육체적인 노동으로 나누고 정신적인 노동을 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육체적인 노동을 천시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사회고 육체적인 노동을 하지 않고 정신적인 노동을 하는 사람을 선호하였습니다.
정신적인 노동을 하는 사람을 인류 시민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성경이 쓰일 당시에 로마 제국은 바로 그런 사회였습니다.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이 사회에 적용하면 로마 시민으로 자처하던 사람들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로마의 시민들은 노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놀고 먹었습니다.
노동은 그들이 전쟁을 통해 정복한 사람들이 하였습니다.
노동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등시민으로 노동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노동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안식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은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행동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야고보서 2장 14~26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1세기 기독교인들이 마주하고 있던 세상은 헬라(그리스) 철학이 지배하던 세상이었습니다.
당시 지중해 연안을 정복한 사람들은 로마인들었지만 정신 세계를 지배한 사람들은 그리스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의 세계관은 이원론 세계관입니다.
보이는 것은 나쁘고 악하고, 보이지 않는 게 선하고 좋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세계관의 영향으로 육체 노동을 천시한 것입니다.
소위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을 천시한 것입니다.
일등 시민은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노예들이나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스 철학이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행동을 천한 것으로 보게 하였습니다.
행동은 노예들이나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정신적으로 바꾼 것입니다.
믿음을 지적으로 동의하고, 신뢰하고 확신하는 문제로 바꾼 것입니다.
동의하고 신뢰하고 확신하는 것은 정신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추상적인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더 이상 믿음은 순종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거기다가 개혁교회는 구원을 얻기 위해 고행을 강조한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을 뽑아내기 위해서 공로신학을 정죄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믿음은 더 추상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전복한 것이 청교도 정신입니다.
청교도 정신이 무엇입니까?
노동을 신성시한 것입니다.
근면, 검소, 절약이 청교도 정신의 3대 철학입니다.
이 세 가지가 사람을 부유하게 만듭니다.
어느 사회고 근면, 검소, 절약을 삶의 철학으로 삼고 살아가면 그 사회는 부유한 사회가 됩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말할 때 그리스어의 단어를 사용해서 사랑을 구분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구분이 없습니다.
히브리적 사고 방식에는 이원론이란 게 없습니다.
그런데 헬라적 사고 방식은 모든 것을 이원론으로 설명합니다.
사랑은 내가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게 유대적인 세계관입니다.
그런데 헬라적 세계관은 이 사랑을 명사로 바꿉니다.
결국 믿음은 실천의 문제입니다.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가짜란 뜻입니다.
무실역행, 도산 안창호 선생이 강조한 말입니다.
공리공론을 배척하고 참되고 성실하도록 힘써 행할 것을 강조하는 사상을 말합니다.
무실이란 실을 힘쓰자는 뜻이고, 실은 진실, 성실, 거짓 없는 것을 말합니다.
역행을 행을 힘쓰자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기독교 정신입니다.
이게 바로 청교도 정신입니다.
선데이 크리스천들은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에브리데이 크리스천들이 진짜 크리스천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