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사도는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간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저 안식에 들어갑니다.
핵심은 믿음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인식을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에 대해서 이해하는 두 가지의 철학이 있습니다.
하나는 히브리적 세계관이고 다른 하나는 헬라적 세계관입니다.
히브리적 세계관은 믿음과 행동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믿음과 행동은 하나입니다.
헬라적 세계관은 믿음을 인식의 문제로 바꾸었습니다.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정의할 때 동의, 신뢰, 확신으로 봅니다.
헬라적 세계관은 믿음을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기독교는 믿음을 히브리적 세계관이 아닌 헬라적 세계관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기독교의 신학이라고 하는 데, 헬라의 철학을 빌려서 복음을 설명한 것 아닙니까?
믿음은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게 히브리인들의 믿음입니다.
유대인들의 믿음은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헬라적인 믿음은 복음에 대해서 동의하고 신뢰하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제자 훈련도 들어가보면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지식이 쌓여 갑니다.
그러면 믿음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과는 관계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했습니까?
바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 아닙니까?
사도 바울이 말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되새깁니다.
입으로 시인하는 게 전부일 때가 있습니다.
부인하지 않습니다.
입으로 시인하는 게 신앙의 전부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특수한 상황 아래에서인 경우입니다.
평상시에는 신앙은 행동입니다.
행동이 그 사람의 신앙의 전부입니다.
누구에게 노하셨습니까?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 노하셨습니다.
말씀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