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성경사전

노아의 방주

기독항해자 2017. 11. 8. 13:31
대홍수를 대비하여 하느님이 노아에게 만들도록 지시한 배.

궤 또는 떠 있는 배의 뜻을 지닌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면서 마음에 근심하고 나의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버리겠다고 성서에 나타나 있다(창세기 6:5~7). 

그리고 노아에게 이르기를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300규빗, 광이 50규빗, 고가 30 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1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중하 삼층으로 할지니라”(창세기 6:14~16)고 기록되어 있다. 1규빗은 46~56cm이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동물을 둘씩 방주에 태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노아와 그 가족과 여러 종류의 동물이 방주에 의해 구원되었다. 

방주는 통상적으로 말하는 배는 아니었다. 그저 물 위에 뜰 수 있는 상자나 궤를 말한다. 방주는 40일간의 대홍수 기간에 물 위에 떠 있다가 아라라트산()에 머물게 되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뒤 방주가 어떻게 되었는지 확실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방주에 대한 탐사가 계속되고 있다.

대홍수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 전개될 불심판의 모형과 그림자였고(누가복음 17:24~30), 방주는 불심판에서 구원받을 유일한 영적 구조선인 불가시적 교회의 모형과 예표였다. 따라서 방주는 교회의 진정한 모습을 지상적 모형으로 보여주던 그림자였던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 후 환난은 시작되었고, 모두 멸망되었다. 하느님은 성도를 환난날에 보호할 것을 보여주고 있다(요한계시록 7:3). 세상의 끝에 있어서도 노아의 된 것과 같이 예수는 경계하였다(누가복음 17:26~27)

[네이버 지식백과] 노아방주 [Ark of Noah, ─方舟] (두산백과)


아라랏산에서 ‘노아의 방주’를 보다

터키 정부, 1987년 6월 공식 인정

글 | 권석하 IM컨설팅 대표

인터넷에 떠도는 노아의 방주에 관한 자료들은 정말 ‘믿거나 말거나’ 하는 수준부터 발굴조사에 의한 제대로 된 자료들까지 다양하다. 믿기로 작정을 하면 정말 이 노아의 방주가 진짜일 거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설득력이 있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1978년에 지진이 발생하면서 약 10m 길이의 유적 벽 표피가 떨어져 나가 유적의 내부가 드러났었다. 드러난 부분은, 일정하게 들어가고 나오고 하여 흡사 부식된 목선의 선측 늑골(decaying rib timber)과 같았다. 이런 모양은 거의 ‘이물에서 고물까지(from stem to stern)’가 가로로 된 갑판을 지지하는 목재 형상이어서 배 구조물이라고 미국인 마취 전문간호사이자 탐험가인 론 와이어트가 조사 보고서에 썼다. 추후 조사에서 지표 밑 노아의 방주 주위를 레이더로 스캔한 결과 배 모양의 형태가 나타났다. 스캔 결과를 보고 스캔 장비 제조사인 GSSI 조 로제타 부사장은 ‘이것은 절대 자연물일 수가 없다. 형상이 자연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일정하다. 이런 것은 자연물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형상이다. 이것이 무엇이 되었건 인공구조물이지 자연물은 아니다’라고 단정지었다. 와이어트는 아그리 지역장관 세브케트 에킨시를 만나서 그동안의 조사서를 제출했고 1986년 12월 터키 내무부, 외무부, 국립대학 아타투르크대학교는 공동으로 이 유적이 노아의 방주라고 공식적으로 인정을 했다. 그리고는 1987년 6월 노아의 방주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저명인사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터키 정부 이름으로 정식으로 노아의 방주 명명식이 있었다. AP통신은 이미 1986년 12월 터키 정부의 이 공식 결정을 보도한 바 있다.

노아의 방주에 관한 24개의 질문과 답 (FAQ)
고재형 외

1. 노아 방주

Q1. 노아 방주가 실제로 존재하였음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노아의 방주가 실제로 존재하여 수많은 동물들을 홍수로부터 구해 냈는지 여부는 매우 중요하다. 먼저 성경 창세기에 무려 6, 7, 8, 9장에 걸쳐 기록된 노아의 홍수사건과 방주로 동물들을 구해낸 사건이 한낮 설화나 후세의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라면,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지니지 못한다. 노아의 홍수와 방주사건은 성경 도처에서 인용되고 있고, 마지막 때에 예수님 재림시의 심판과 구원을 상징하는 사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비판할 때 노아의 홍수와 방주사건을 제일 먼저 들고 나와 비판해 왔으며, 무신론자, 이성주의자, 인본주의자, 과학주의자, 진화론자들이 성경을 비지성적이며, 비과학적인 책으로 폄하할 때 가장 먼저 인용하였던 부분이 이 노아의 홍수와 방주사건이었다. 노아의 홍수와 방주사건을 믿는 신앙인들은 과학적 지식이 없는 무식한 종교적 열심가들로 취급하게 되었고, 수많은 신앙인들이 이 사건에서부터 성경에 대한 권위와 믿음을 잃어버리고, 의심의 싹이 자라기 시작하여 마침내 성경을 발췌하기 시작하고, 비유의 말씀으로만 해석하기 시작하다가 마침내 신앙을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이다.(1)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최근 지질학의 발달로 지층과 지형의 모습들이 자세히 조사되면서, 지구는 과거에 대홍수와 같은 엄청난 격변을 겪었던 흔적들이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전지구 대부분에 수백 m에서 수 km 깊이로 쌓여 있는 퇴적지층들, 수조개의 화석으로 멸종되어 있는 생물들, 세계 도처에서 강같이 흘렀던 용암들, 구부러지고 휘어져 있는 산들, 바다 속에 깊게 패어진 해저캐년들, 지구를 휘감고 있는 해저산맥들, 엄청난 넓이로 평행하게 쌓여져 있는 지층들, 히말라야나 알프스 산꼭대기에서 발견되는 바다생물의 화석들, 극지방에서 발견되는 두터운 석탄층들, 온대지역의 풀을 먹다 얼어죽은 시베리아 매머드들, 지층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사람의 유물들, 오늘날의 모습과 똑 같은 채로 발견되는 고생대, 중생대의 화석들...등등. 그러므로 최근 지구의 지층과 지형은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동일과정설과 같이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노아의 홍수와 같은 대격변에 의해 단기간에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고 다시 부활하게 된 것이다.(2, 3, 4)

 그러면 이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전지구적 재난 속에서 오늘날의 수많은 동식물들은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 지구를 덮은 대홍수 속에서도 오늘날의 수많은 동식물들이 살아 남을 수 있다는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면, 대격변설은 결국 지역적 홍수설, 지역적 격변설로 그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아의 방주는 노아의 홍수와 같은 전 지구적 대격변설을 확실하게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며, 대격변설이 입증된다면 진화론적 동일과정설을 폐기될 것이며, 동일과정설이 폐기된다면, 수십억 년의 지구연대도 폐기될 것이고, 진화할 시간이 없는 진화론도 당연히 폐기될 것이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위를 되찾고,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음이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Q2. 노아 방주의 성경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7장 24-30절에는 예수님의 마지막 심판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노아의 대홍수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 전개될 마지막 심판의 모형과 그림자였다. 그리고 노아의 방주는 이 마지막 심판에서 구원받을 유일한 영적 구조선인 보이지 않는 교회의 모형과 예표였다. 따라서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가 몸되신 교회의 진정한 모습을 지상적 모형으로 보여주던 그림자였고, 방주 내의 동물 사육은 교회의 본질 곧 교회내 성도 양육의 모형이었던 것이다. 노아는 '그 집을 구원'(히11:7)하기 위하여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케(창 7:3)하기 위하여 모든 종류의 동물을 둘 씩 방주에 태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순종하여 생명들을 구원하였다. 우리들도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까지 세상의 많은 영혼들을 오늘날의 방주인 예수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여야할 것이다.  

 

Q3. 노아 방주는 보통의 배와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노아 방주와 같은 의미로 방주는 아기 모세가 나일강에서 탔던 바구니를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 방주는 내부에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노나 키가 없다. 단지 뜨기만 하고 조정이 불가능하여 물결이 흘러가는 대로 움직인다. 단지 뜨기만 하고 나의 삶을 내가 조정하지 않고 성령님께 맡기는 신앙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Q4. 노아 방주의 크기는 얼마입니까? 

창세기 6장 14~16절에 나와있는 치수대로의  방주 크기는 길이가 삼백규빗(135m), 폭이 오십규빗(22.5m), 높이가 삼십규빗(13.5m)으로, 43,200 m3 정도의 부피를 가지는데, 이는 한 량에 240마리의 양을 실을 수 있는 화차 522 량에 해당하는 용량과 같다. 방주는 농구코트 20개를 10개씩 2열로 배열한 넓이로서, 현재 축구장보다 길이는 더 길고 폭은 약간 좁은 넓이의 상, 중, 하 삼층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방주는 통상적인 배가 아니라 바지선 형태의 거대한 선박이었다.

 

Q5. 성경에 기록된 방주의 크기는 과연 배의 역할을 잘 할 수 있는 크기입니까? 

길이와 폭의 비율 6 : 1은 매우 뛰어난 선박 안정성을 보이는 비율임이 선박공학자들에 의해서 밝혀졌는데, 노아의 방주는 홍수기간 동안의 폭풍과 파도속에서도 충분히 견디어 냈을 것이다. 노아의 방주의 안정성에 대해서는 Q9 노아의 방주는 정말 대홍수를 견딜 만큼 견고합니까?를 참고할 것.

 

Q6. 방주는 땅에 호흡하는 모든 동물 한 쌍씩을 실을 수 있을 정도로 컸습니까?  

노아 방주의 배수량은 약 20,000톤, 용적은 14,000톤이며, 방주내의 사용 가능한 총면적은 100,000 평방피트 이상이고, 총부피는 43,200 m3 정도이다. 이제 노아의 방주 내로 들어와야 하는 땅에서 호흡하는 동물들은 모두 몇 마리나 되는지를 알아보자.

미국의 유명한 분류학자인 Ernest Mayr에 의하면 세계에는 백만종(species) 이상의 동물(animals)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중 대부분은 물에서 사는 동물이라 방주에 탈 필요가 없다. 21,000 종의 물고기(fish), 1,700 종의 피낭동물(tunicates), 600 종의 불가사리와 같은 극피동물(echinoderms), 107,000 종의 홍합이나 굴과 같은 연체동물(mollusks), 10,000 종의 말미잘과 같은 강장동물(coelenterates), 5,000 종의 해면동물(sponges), 30,000 종의 원생동물(protozoans)과 단세포생물 등이 이들이다. 또한 포유동물중 고래나 바다표범과 같은 일부 동물들은 물에서 사는 동물이다. 양서류도 모두 다 방주에 올라탈 필요가 없으며, 악어와 바다거북같은 파충류도 그러하다. 또한 838,000 종의 절지동물(arthropods)중 바다가재, 새우, 게 등과 같은 대부분의 동물들이 바다에서 사는 동물이다. 그리고 곤충(insect)들은 매우 크기가 작아 방주에 탓다 하더라도 적은 공간을 차지했을 것이고, 35,000 종의 벌레(worms)들과 같이 방주 밖에서도 살아 남을 수 있다. 사실 곤충과 벌레들은 홍수시 떠다니는 거대한 나무 매트(floating log mats)들에 붙어서, 또는 알이나 유충상태로 충분히 생존할 수 있다 (대홍수 Q5 참조).

그리고 성경도 곤충과 벌레는 방주에 타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성경 창7:22)에 나오는 '코로(through nostrils)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에 곤충은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곤충은 코로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외부 골격에 있는 작은 관(tubes)으로 숨을 쉬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 창6:19, 7:8~23, 8:17)에 나오는 '땅에 기는' 것들로 번역된 'creeping thing (remes)'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사용된 예를 살펴볼 때 벌레보다는 파충류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또 하나 창세기에서 말하는 종류(kinds)의 개념이 오늘날의 종(species)의 개념과는 다를 수 있다. 많은 연구자들은 이 kinds는 오늘날의 분류학상의 과(family) 또는 아과(subfamily)에 해당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후대에 수많은 속(genera)과 종(species)들을 만들어 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즉, 모든 종(species)의 개들을 실은 것이 아니라 대표로 개의 한 종류(kind)만 태웠다는 것이다. 이 경우라면 매우 적은 수의 동물들이 방주에 승선하였을 수도 있다. Don Batten 은  이미 존재했던 유전정보의 분류(sorting)와 소실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종들이 분화될 수 있다고 하였다.(5) 그는 분명히 다른 종과 속의 생물들이 교배되어 후손을 낳을 수 있는 잡종들이 만들어지는 예들을 제시하였는데, 말, 얼룩말, 당나귀는 아마도 말 종류(equine kind)에서, 개, 늑대, 코요테, 재칼은 개 종류(canine kind)에서 갈라졌을 수 있으며, 북극곰(polar bear)은 원래의 곰 종류(bear kind)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진화가 아니다. 왜냐하면 북극곰은 새로운 유전적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북극곰은 위장을 위하여 색을 띄는 유전인자를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다윈의 핀치새에 대한 연구는 450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다양한 핀치새들이 분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96년에 열린 분화(speciation)에 관한 주요 회의는 무심결에 진화가 아닌 홍수 후 빠른 분화에 관한 창조과학자들의 주장을 지지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종류(kinds)는 과(family) 이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노아는 육상척추동물의 매우 소수만 태웠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이 경우 2000마리 정도의 적은 동물들이 방주 내로 들어갔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최대로 오늘날 살고 있는 포유류 3,500종, 조류 8,600종, 파충류와 양서류 5,500종이 모두 승선하였다고 하여도 총 동물의 수는 17,600 마리로 각 쌍으로 계산할 경우 35,200마리의 동물을 실어야 한다. 이 동물들의 크기는 다양함으로 평균 크기를 양(羊)만하다고 가정하였을 때, 방주는 125,280 마리의 양들을 수용할 수 있는 용량이므로, 방주는 실제 승선했던 동물보다 3배 이상의 동물들을 태울 수 있는 크기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양의 크기는 동물들을 크기 순으로 나열한다면 11% 정도에 위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양이 평균적 크기가 되기에는 너무 크고, 승선시킨 동물들 중에서 덩치가 큰 동물들의 경우 새끼나 어린 동물들을 태웠을 것이 예상되기 때문에 방주에 승선한 동물들의 용량은 더욱 줄어들 수 있다. 여분의 장소에는 멸종된 동물들, 식량, 물, 노아의 가족, 방주에서 태어난 새끼들을 위해 사용되었을 것이다.

우드모라페(Woodmorappe) 박사는 그의 책 '노아의 방주 : 그 가능성 연구(Noah,s Ark : A Feasibility Study)'에서 구체적으로 방주에 들어간 동물들의 종류와 마리 수를 포유류 7,428 마리, 조류 4,602 마리, 파충류 3,724 마리의 총 15,754 마리로 약  16,000여 마리의 동물들이 방주 내로 들어간 것으로 추정하였다(6). 이에 대해 Don Batten은 방주에 탄 동물의 수를 16,000마리로 추정한 것은 진화론자들에게 너무도 관대한 수치라고 하였다.

만약 동물이 평균 50×50×30 cm의 케이지에 들어간다면 부피는 한 동물당 75,000 cm3 으로 16,000 마리이면 단지 1,200 m3에 해당한다. 만약 곤충 100만 종이 방주 내에 있다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로, 세로, 높이 10cm의 공간에 곤충이 한 종씩 있을 경우 1,000m3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곤충은 방주에 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여하간 이들의 부피는 방주 용량 43,200m3에 비하면 매우 적은 부피이다. 방주는 이들 동물들을 충분히 실을 수 있는 크기인 것이다.    

 

Q7. 노아의 방주에는 수많은 크고 작은 동물들이 탔을 텐데, 배설물을 수거하고 음식물을 먹이는 일을 방주 안의 8 명의 사람이 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들은 노아의 방주 안에서 수많은 크고 작은 동물들의 배설물을 수거하고 음식물을 먹이는 일은 8명의 사람이 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이다 라고 주장하며 노아의 방주를  부인하려 한다.

창세기 8장 1절에는 하나님이 노아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권념하사' 라는 말은 '기억하다, 간섭하다' 라는 히브리말 '자칼'을 번역한 것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동물들에게 주신 놀라운 능력중의 하나는 공기가 탁하거나 기온이 떨어지고 빛이 줄면 이에 적응하기 위해 동물들이 동면이나 하면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예를 들면 다람쥐는 동면에 들어가면 체온이 1~2℃로 떨어지며 심장박동이 350번 정도에서 2~4번 정도로 떨어져 평상시의 2% 정도의 에너지를 소비하며 긴 겨울을 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체온이 15~20℃만 되어도 모든 기능이 정지되어 버리는 사람과 비교하여 볼 때, 이런 낮은 온도에서도 모든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이유는 풀리지 않는 비밀이다. 또한 새들은 동면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푸우월 같은 새는 동면하는 것으로 알려져 새들도 동면의 잠재적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하겠다. 이와 같이 동물들이 동면하는 능력들이 비정상적으로 강해져 대부분의 동물들이 동면을 하였다고 하면 홍수 기간 중 8명의 노아 식구들이 동물들을 돌보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동면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면 정말 노아의 8식구가 동물들을 돌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인가. 우드모라페는 16,000 마리의 동물들이 방주에 승선한 경우를 가정하여 가능성이 충분함을 제시하였다.(7) 먼저 생각하여야할 것은 방주내의 동물들은 동물원과 같이 넓은 장소에서 관리되는 것이 아니라, 잘 계획된 실내공간에서 실험동물이 지내는 것과 같은 상황으로 관리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적인 시설의 실험동물 사육장에서는 한 사람이 5,900 마리의 랫드, 마우스, 토끼를 사육하며, 양돈장에서는 3,840 마리의 돼지를, 양계장에서는 30,000 마리의 닭을 사육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물론 오늘날의 최신식 설비 하에서의 통계이지만 노아의 방주도 많은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면 노아의 식구 한 사람당 2,000 마리의 동물사육은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노아의 방주는 120 년의 설계와 제작을 거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창6:3). 실제로 노아의 방주는 수많은 동물들을 관리하기 위한 여러 구조나 장치들을 장착했음이 틀림없다. 예를 들면 자동먹이공급 장치, 자동음수 공급장치, 빗물을 받아 공급하는 장치, 경사진 배설물 처리구, 복도에 운반용 수레장치 등등을 설치했을 가능성이 높다. 어떤 이들은 흔들리는 배에서 동물들에게 물을 주는 것도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도 주장하나, 고대 로마인들은 머리만 들어가도록 구멍이 난 뚜껑이 있는 통에 물을 담아서 많은 새들에게 자동으로 충분히 물을 공급했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에 노아가 그런 생각을 충분히 하였을 것이다.     

또한 노아가 동물들을 방주에 태우기 전 격리장소에서 동물들의 특성을 잘 파악하여 동면을 하는 그룹, 물을 많이 먹는 그룹, 건초를 좋아하는 그룹, 특별한 먹이를 줘야하는 그룹, 배설물을 많이 만드는 그룹, 어두운 곳을 좋아하는 그룹... 등으로 큰 부류로 나누어 승선시켰다면 이들을 돌보는데 훨씬 일이 줄어들 수 있다. 분명히 노아도 이러한 문제를 두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을 것이고, 이에 대한 철저한 준비를 하였을 것이다. 8 식구가 동물들을 돌보는 것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닌 것이다.     

 

Q8. 노아는 어떻게 오늘날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육상동물들을 방주에 모을 수 있었습니까?

노아는 어떻게 호주에서 캥거루 한 쌍을 데려 올 수 있었을까? 지구 반대 지점에 사는 동물이나, 섬에서 사는 동물들은 어떻게 데려왔을까? 펭귄이나 나무늘보 같이 육지를 이동하기 어려운 동물들을 어떻게 데려 왔을까? 또한 노아가 살던 지역의 기후와 다른 한랭지역 동물들, 열대동물들은 극심한 기후 차를 견디면서 어떻게 생존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생각은 과거의 기후환경도 오늘날과 같이 지역에 따라 극심한 온도차를 보이며, 동물들도 오늘날과 같이 바다로 가로막힌 지역에서 서식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가 생각하여야할 것은 노아가 살던 시기의 기후환경과 대륙분포가 오늘날과 같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많은 동식물의 화석들이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대홍수 전에 지구 전체는 따뜻한 아열대 기후였으며, 지역에 따른 극심한 온도차도 없었다. 북반구나 남반구에서 발견되는 동식물의 화석과 동일한 화석들이 남극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도 초기 지구는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실 정도로 (창 2:6) 온화한 기후였으나, 홍수 후에 추위와 더위가 생겨났다고 (창 8:22)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모든 동물들은 섞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살던 지역과 방주가 있던 지역과의 기후 차를 극복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또한 대륙도 하나로 붙어 있었고, 대륙사이의 바다나 높은 산맥들은 홍수 후에 생성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바다나 높은 산맥들은 동식물들을 데려오는데 장벽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 창세기 1:9~10절에도 천하의 물은 한 곳에 모여 있었기 때문에 땅도 이어져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대륙이 과거에 하나로 붙어 있었다는 것은 여러 증거가 있는데, 먼저 남, 북아메리카의 동부해안과 아프리카, 유럽의 서부해안의 해안선이 조각 맞추기처럼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프리카 남부와 마다가스카르섬 및 남아메리카의 브라질에서 아르헨티나에는 빙하의 흔적들과 빙하가 운반해온 티라이트라는 암석과 소철 무리인 Glossopteris 등의 식물이 같이 분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다이아몬드가 많이 생산되는데 남아메리카의 남단 지역도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다는 것이다. 지질학에서도 지구의 육지가 한때는 초대륙으로 한 덩어리였다는 판게아 이론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1910년대 독일의 베게너는 이것을 근거로 대륙이동설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홍수 후 엄청난 대륙들의 이동이 시작되었고, 융기와 침강을 동반한 엄청난 지질학적 격변들이 일어났고, 산맥과 해구들이 생겨났으며, 해수면의 변동이 일어났고, 궁창 위의 물층의 붕괴로 지역에 따른 극심한 온도차가 발생되었으며, 다른 대륙이나 섬으로 격리된 동물들은 서로 다른 열악한 환경 속에서 오랜 기간 적응하여 오늘날의 한대지역 동물, 열대지역 동물, 건조지역의 동물들이 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8)

다음으로 노아의 8 식구는 그 많은 동물들을 어떻게 다 포획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도 조금만 깊게 생각하여보면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동물을 데려오는 사람들이 8 명보다 많을 가능성이 높다. 창세기에 기록된 사람들은 대부분이 족장들이다. 노아도 족장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거대한 방주도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일사불란하게 지었을 가능성이 있고, 수많은 동물들도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데려올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족장이 아니더라도 거대한 방주를 지을 만큼 재력이 있었다면 동물들을 사거나 인부들을 동원하여 모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노아는 방주근처에 거대한 동물원이나 동물 격리장소를 만들어 방주에 태우기 전까지 상당기간을 계류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곳에서 지켜보면서 가장 튼튼한 동물들로 선별하여 한 쌍씩 태웠을 것이다. 또한 노아는 홍수기간동안 동물들이 먹을 모든 식물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창6:21) 식물들을 저축하면서 각 동물들의 식습성과 소비량까지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고대 중국의 황제 Chi Hang-ti 는 거대한 동물원과 3,000 종의 식물들을 수집한 식물원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로 많은 동물들을 방주로 불러 모으셨다는 것이다. 창세기 6:20, 7:9, 7:15 절에는 동물들이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노아가 잡으러 쫒아 다닌 것이 아니라 동물들이 노아에게 나아왔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여러 군데에서 하나님이 동물들을 마음대로 움직이셨음이 기록되어 있다. 애굽의 재앙을 가져온 개구리와 파리(출 8장), 메뚜기(출10장), 발람의 나귀(민 22:28), 요나를 삼킨 큰 물고기(욘1:17), 다니엘을 해치지 못하게 입이 봉해진 사자(단 6:22), 엘리야에게 떡과 고기를 가져다주는 까마귀(왕상 17:6)...등등. 이 경우라면 노아의 일은 매우 줄어들 수 있고 모든 동물을 방주에 태우는 일은 더욱 쉬어졌을 것이다.(9)

        

Q9. 노아의 방주는 정말 대홍수를 견딜 만큼 견고합니까? 

국민일보 1993년 2월 17일자

현대조선공학으로 제작된 그 어느 선박보다도 뛰어난 안정성을 갖고 있다.  

- 해사기술연 홍석원 박사팀 -

국가공인기관인 해사기술연구소에 의해  수행된 노아 방주 실험은 다음과 같다.

해사기술연구소가 1992년 6월부터 한국창조과학회의 요청으로 노아의 방주를 조선공학적 입장으로 접근, 이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하여 주목을 받고 있다.(10) 이 연구소는 선박의 선형시험 및 관련성능 평가업무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기관으로서 선박수출 2위국인 우리나라 수출선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성능평가를 받고 있고, 그 결과는 외국의 선주들에게도 그대로 인정되고 있으며, 지금까지 480여 척의 선박의 성능을 평가했다고 알려져 있다. 해사기술연구소는 본 학회의 의뢰를 받아 선박의 안정성 연구분야에서 국내 최고 권위자인 홍석원 박사를 팀장으로 한 9명의 전문연구팀에게 맡겨 선박의 안전성능을 실험하게 되었다. 연구에 앞서 우선적으로 해결할 문제가 있었는데, 기초자료의 부족이 그것이었다. 특히 방주의 외부모습, 방주의 내부구조에 대한 자료 등이 턱없이 부족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주자료의 제약성에도 불구하고 성경 창세기에 나와있는 노아 방주의 규격(길이 135m, 너비 22.5m, 높이 13.5m)과 아라랏 산에서 목격된 방주의 형상을 토대로 제작한 노아 방주 복원도를 바탕으로 하여 실험용 방주를 건조할 수 있었다.

 그림 2-5 1993년 2월 17일자 국민일보에 난 노아 방주 실험결과 기사. 노아 방주는 매우 안전한 선박 이라는 기사가 인상적.

1950년대 미국에서도 일찍이 방주에 대한 실험이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선박공학의 수준이나 기타 제반 여건들은 90년대인 지금과 비교할 때 모든 면에 있어서 뒤쳐져 있었다. 그래서 50년대 미국에 있었던 방주 실험은 아주 기초적인 선박의 복원안정성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따라서 이때부터 40여 년이 경과한 시점에서 현대적 수준에 걸맞는 실험을 하고자 앞서 미국에서 있었던 복원안정성 뿐만 아니라 방주의 종합적인 안정성 평가에 주안점을 두었다. 특히 두드러진 점은 방주자체의 모형 실험에 큰 의의를 두었고 다른 형상을 갖는 배와의 상대평가도 수행하여 이 배의 진면목을 알아보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홍박사 팀은 테스트에 쓰일 실험용 방주를 길이를 50분의 1로 축소(길이 2.7m) 제작하였고, 해사기술연구소의 대형수조(길이 200m, 폭 16m, 수심 7m)에서 인공적으로 다양한 높이, 강도, 속도의 조류, 파도, 풍랑, 바람을 만들고 역시 축소된 내부 선체, 선원을 실은 상태, 내부 화물을 적재한 상태 등 다각적으로 실험을 수행하였다. 그 결과 노아의 방주가 현대의 최첨단 조선공학적 기법으로 제작된 그 어느 선박보다 뛰어난 안정성을 갖고 있는 배였다는 것이 실증되었다. 또 우수성을 알아보기 위해 노아 방주와 동일한 부피를 가지면서 길이, 폭, 높이의 비율이 각기 다른 현대 조선공학적 기법으로 제작한 12척의 다른 모형선박을 만들어 선박의 안정성(파랑안정성,  구조안정성, 복원안정성)에 대해 수 차례의 비교 수치해석과정을 거쳤다. 조선공학적인 관점에서 변환 가능한 12척의 모형 배들과의 비교 수치해석결과, 선형의 높이가 같은 경우에는 노아 방주가 가장 최적인 복원안정성【그림2-6 참조】을 주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림 2-6 방주의 복원 안정성 (31o 기울어져 있는 경우) 방주의 치수대로라면 방주는 거의 전복될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90o 이하의 임의의 각으로 기울어져 있을 때 방주의 무게중심 G에 대해서 전복되려는 힘의 반대 방향으로 복원 부력이 작용하게 되어, 결국 원래 상태로 재빨리 되돌아 올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1 cu = 45 cm)

 

Q10. 목재로 된 거대한 방주가 1년여의 거친 항해를 견디어낼 수 있었습니까? 

노아의 방주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노아의 방주는 목재로 만들어졌고 강철로프도 없어 파도치는 바다에서 거대한 몸체는 부서졌으며,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썩고, 바다벌레들에 의해 구멍이 나며, 물이 계속 새어 들어오기 때문에 홍수기간동안 노아의 식구들은 물을 퍼내기에도 바빴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말 노아의 방주는 항해하기에 부적합했는가?

이것은 고대인들의 건축기술과 선박건조기술을 터무니없이 낮게 평가하기 때문에 생겨난 오해이다.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고대문명들의 유적과 건축물들은 매우 놀랄만한 수준인 것이다. 수학, 물리학, 천문학, 수리학, 건축학 등은 오늘날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인 것이다. 노아 이전시기에 벌써 금속을 가공해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설계해 만들 정도로 고도로 기술이 발달되어 있었음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창4:22). 노아의 방주는 무지한 고대인이 만든 임시적인 피난용 뗏목이 아닌 것이다. 노아는 무려 120 여년에 걸쳐서 치밀하게 설계하고 제작하여 방주를 만들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창6:3). 그리고 이 치밀한 설계와 제작을 여러 사람이 도왔을지 모른다.

노아의 나이 600 세에 홍수가 났고(창7:11), 노아의 아들들은 노아가 500 세 된 후에 태어났으므로(창5:32), 방주의 준비를 시작한 480 세 경에는 아들들도 없었다. 노아의 아버지 라멕은 노아를 낳은 m후 595년을 살았음으로(창5:30) 홍수가 나기 5년 전 즉 노아가 방주제작을 시작한지 115 년째에 죽었다. 또한 아담의 나이 687 세 경에 태어난 노아의 할아버지 므두셀라는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등 그의 선조들과 동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직접 대면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다. 그는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시고 늘 동행하던 에녹의 아들로서 손자인 노아의 신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되는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 중 가장 오래 살았던 인물로서 969 세로 죽었는데, 그 해는 공교롭게도 그의 이름이 말하는 것과 같이(므두 = death, 셀라 = to bring) 죽음을 가져오는 홍수가 나던 해였던 것이다 (187세 라멕 낳음 + 라멕은 182세 노아 낳음 + 노아 600세에 홍수 = 969년). 므두셀라와 라멕은 그들의 말년에 노아가 120 여년에 걸쳐 방주를 준비하는 전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을 지도 모르며, 많은 기술적 자문과 재정적인 후원을 하였을 지도 모른다. 135m의 거대한 목조선이 파도 속에서 견디기 위하여, 수많은 동물들을 싣고 홍수기간 동안 방주에서 노아의 식구들이 살아가기 위하여, 엄청난 홍수로부터 동물들을 살려내어 번성시키기 위하여, 그때까지의 모든 기술과 지식이 총동원되었을 것이며, 이 일을 위해 노아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치밀하고 철저하게 준비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방주가 오늘날의 배와 다른 것은 무거운 엔진이 없으며,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물에 뜨기 위한 것이므로 장사방형의 평평한 바닥구조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간이 침하되는 현상(sagging)을 매우 완화시켰을 것이다. 네덜란드의 선박기술자인 Werff는 배의 휘어지는 현상은 아래쪽에 보강용 갑판의 설치로 극복될 수 있다고 하였다. 실제 고대 그리스의 Syracusia (또는 Alexandris)라는 이름의 선박은 4,000톤의 화물을 운반했으며, 15세기 중국의 바다화물선이 Cheng-Ho 호는 노아의 방주와 비슷한 크기였으며, 8세기의 선박은 비록 호수에서 사용되었지만 노아방주보다 큰 배가 있었음이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목재가 긴 항해에 부적합했다면 과거에 목재로 만든 수많은 범선들은 어떻게 항해를 하였는가. 이들이 항해할 때 새어 들어오는 물을 퍼내는 일에 대부분의 인력을 동원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19세기에 목재로 만들어진 범선들은 1년 이상 항해에도 큰 수리를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티크 목재로 만들어진 몇몇 선박들은 중대한 수리 없이도 35년간을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노아 방주의 목재로 사용되어진 잣나무는 매우 견고하고 단단한 나무로 1년여의 항해를 충분히 잘 견뎠을 것이다. 바다벌레(shipworm) 문제도 그렇다. 바다벌레는 선박의 나무를 갉아내고 굴을 파고 사는 생물이다(대표적으로 Teredo). 그러나 이들은 주로 해안가에서 사는데 지역에 따라서는 서식하지 않는 곳도 많으며, 더욱이 대양에서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한 대부분의 바다벌레들은 1.3 cm 이상으로 깊게 굴을 파지 않음이 보고되고 있다.(11)

   

 Q11. 방주 내로 그 많은 동물들을 7 일만에 다 태울 수 있습니까? 

노아의 방주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모든 동물을 노아의 방주에 태우는데 걸리는 시간으로 7일은 불가능하며 극히 비현실적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노아가 동물을 실을 수 있는 기간이 7일(10,080분) 밖에 없었다면, 35,200 마리의 동물들은 밤낮을 쉬지 않고 17초마다 들어가야 한다. 정말 그런가?

이들은 창7:4절에 지금부터 칠일이면 내가 사십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라는 구절만을 근거하여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구절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 후 하신 말씀임을 알 수 있다. 분명히 창7:9~10절에는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 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니 칠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라고 되어있다. 분명히 방주에 들어간 후 칠일 후에 홍수가 났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창6:13~21절에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고 혈육 있는 생물을 암수 한 쌍씩 태워 생명을 보존케 하며 식물을 저축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창6:22절에서 노아가 그와 같이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라고 되어 있고 그 이후에 7장 4절의 말씀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노아에게 동물을 태우는 시간이 실제로 7일만 주어졌다 하더라도 방주에 최대 35,200마리의 동물들을 싣는 것이 불가능한 일인가? 상황은 조금 틀리지만 1시간에 1,000마리의 돼지를 한 라인에서 도축할 수 있는 도축장도 가동되고 있다. 이 경우와 같은 속도라면 이틀이면 동물들을 방주에 다 태울 수 있다. 또한 앞에서의 계산들은 방주 내로 동물들을 태우는 문이 하나일 때만을 가정한 것이다. 그러나 창6:16)절에도 문은 옆으로 내라는 말씀만 기록되어 있지 문의 폭이나 개수는 알 수 없다. 거대한 방주 내부는 상, 중, 하 삼층으로 되어있고, 동물들의 대분류에 따른 큰 구획들로 나누어져 있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문도 이들 동물들이 구분되어 들어갈 수 있도록 여러 개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며, 방주 내부 시설물의 설치 및 운반, 사료나 물의 운반 및 저장, 폐기물 처리 등을 위해서도 문이 여러 개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실제로 여러 문으로 동시에 동물들이 들어갔다면 7일만에 방주에 동물들을 태우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닌 것이다. 또한 동물들의 대부분이 초식을 하였다면 서로를 공격하는 일이 거의 없어 동물들을 태우는데 훨씬 수월하였을 것이고, 방주에 탄 동물들은 35,200마리 보다 훨씬 적을 수 있으며, 노아의 식구 8명 외에 방주에는 타지 않았지만 동물을 태우는데 동원된 사람들이 있었다면 7일이라는 시간은 충분할 수도 있는 것이다.(12)      

 

 Q12. 방주 내로 태워지는 각 동물의 숫자는 암수 일곱씩입니까, 둘씩입니까? 

성경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방주에 태워진 동물의 숫자가 창6:20), 창7:9), 창7:14,15)에는 둘이고, 창7:2,3)는 일곱이기 때문에 성경의 오류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읽어보면 정결한 동물들은 암 수 일곱씩, 부정한 동물들은 암 수 둘씩 방주에 탔음을 알 수 있다. 창7:3)절의 공중의 새는 2절의 정결한 짐승 중에 포함되어 계속되는 문장인 것이다. 즉 공중의 새 중 정결한 새는 암 수 일곱씩 태워졌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홍수기간 동안 방주 내에서 정결한 짐승들을 잡아 노아가 제사를 드리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창8:20)절에는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를 드리는 장면이 나온다. 만약 모든 동물이 한 쌍씩만 들어갔더라면 그 동물은 노아의 번제와 동시에 멸종해버렸을 것이다.

그러면 정결한 동물은 얼마나 될까? 반추동물들은 모두 일곱 쌍씩 들어갔는가? 유대학자들은 정결한 동물을 단지 굽이 갈라진 모든 반추동물들이 아니라, 큰 포유동물 중 단지 소수만이 해당된다고 말하고 있다. 신명기 14장에는 정결한 동물들이 나와있는데, 이들은 매우 소수인 것이다.       

 

Q13. 공룡도 방주에 실었습니까? 실었다면 그 큰 공룡을 어떻게 방주에 실을 수 있었습니까? 

오늘날 생존하는 동물뿐만 아니라 멸종하여 볼 수 없는 동물들까지 한 쌍씩 방주에 실었을 때에도 방주 전체공간의 1/3 공간에 해당될 뿐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멸종비율을 그대로 홍수이후 기간에 적용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 동식물의 멸종은 산업혁명이후 환경오염의 심화로 가속화되었음으로 오늘날의 멸종비율을 일률적으로 수천년 전까지 일정하게 적용하는 것은 무리이다. 진화론에서는 6천5백만년 전에 공룡이 멸종하였고 인류는 400만년 전에 출현하였다고 하지만, 인류와 공룡이 동시대에 같이 살았었다는 많은 기록과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일부 공룡들도 노아의 방주에 탔었음이 틀림없다. 물론 방주에 타지 못한 많은 공룡들은 노아의 홍수기간에 죽어갔을 것이다. 공룡은 668 종의 속(genera)이 있다고 하며, 10톤 이상의 공룡만 106종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공룡 속의 숫자는 다소 과장된 것으로 생각된다. 일례로 브라키오사우르스, 아파토사우르스, 디플로도커스 등과 같이 매우 큰 공룡중의 하나인 사우로포드(sauropods)는 87종의 속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12속만 확실히 확립되었고, 또 다른 12속만이 비교적 확립된 정도인 것이다. 그러나 우드모라페는 관대하게 이들 공룡을 모두 계산에 포함시켰다. 공룡은 덩치도 크고 대식가이며, 배설물 또한 엄청난 양이기 때문에 방주에는 아마도 공룡의 새끼들을(또는 알) 태웠을 것으로 추정된다.【그림2-3,4,7 참조】또한 대부분의 파충류들이 날씨가 추워지면 동면하는 것처럼 그 당시 방주의 어두컴컴하고 탁한 공기 때문에 공룡도 마찬가지로 동면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공룡을 방주에 태우거나 사육하는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성경 창7:2)절에 암수의 표현이 the male and his mate로 되어 있어 어린 동물이 어떻게 짝이 있는가, 그러므로 동물들이 성적으로 성숙했음을 암시한다고 말하면서 어린 동물들을 태웠음을 부정하나, 창6:19), 창7:3), 창7:9), 창7:16)절에는 암수의 표현이 'male and female'로 되어 있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Q14. 노아는 암 수가 같은 모양의 동물들은 어떻게 구별하였습니까? 

많은 동물들은 외부적으로 암 수의 구별이 쉽지 않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관찰한다면 암 수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구별해 낼 수 있다. 실례로 과학적으로 교육을 받지 않은 중국의 사냥꾼도 팬더곰의 암 수를 생김새와 행동의 약간의 차이로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조류의 경우도 깃털의 미묘한 차이나 번식기의 행동으로 암 수를 구별할 수 있으며, 쌍을 이룬 것은 같이 생활을 할 때가 많다. 노아가 동물격리장소를 만들어 동물을 모으고 있었다면 그곳에서 충분히 관찰할 수 있었을 것이고, 쌍을 이루어 후손을 낳을 수 있는지 확인한 후 방주에 태웠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또한 암수의 구별이 어렵고 무성생식을 하기도 하는 곤충들과 벌레들은 방주에 타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의 암수를 어떻게 구별하였겠는가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Q15. 방주 내에서 수많은 동물들이 1년여 동안 먹을 먹이와 물은 엄청난 양일텐데 그 양은 도대체 어느 정도이며, 어떻게 저장할 수 있었습니까? 

노아의 방주에 들어간 16000 마리의 동물들이 홍수기간인 371일 동안 먹을 물과 먹이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양이며 그것을 노아가 과연 준비할 수 있었을까? 먹이들은 1년이 넘는 기간동안 냉장고도 없이 어떻게 부패되지 않고 보관될 수 있었을까?     

(Q7) 에서도 논의했지만 동물들이 동면에 들어간다면 이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한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만나(출16:14~36), 사르밧 과부에게 주신 가루와 기름(왕상17:14~16)처럼 하나님의 특별하신 돌보심이 있어 기적적으로 먹이들이 공급되어진다면 더욱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아니라면 그것은 도저히 준비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인가?          

우드모라페는 동물들의 실제 소비하는 먹이량과 음수량 등을 동물원에서의 자문과 방대한 자료와 문헌 등을 통해 자세히 조사한 후 저장해야할 먹이와 물의 양, 그리고 부피를 계산하였다.(13) 먼저 먹이는 부패를 막기 위해 건조상태에서 저장되었을 것임으로 건조중량으로 총 1990 톤으로 추정하였다. 건조 시 수분함량이 10~20 %는 남아 있을 것으로 보아 실제 방주에 저장한 먹이의 무게는 2200 ~2500 톤으로 추정하였고, 이때의 부피는 3~6000 m3으로 이것은 방주부피에 6~12 %를 차지하는 용량임을 보고하였다. 저장한 먹이는 주로 밀, 보리, 콩, 귀리 등의 곡류, 건초, 각종 식용씨앗, 압축한 건초펠렛, 말린 고기, 말려서 압축한 고기나 분쇄한 가루, 말린 과일, 말린 생선, 말린 벌레, 시럽, 설탕, 소금...등이었을 것이다.

또한 방주 내에서 마실 물의 량은 4.07 ML(million liters)로 계산하였다. 이는 4,070m3의 용량으로 방주용량의 단지 9.4 %에 해당하는 부피이다. 그러나 노아가 방주 지붕에 빗물을 받아 음수로 사용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었다면 이 양은 대폭적으로 감소될 수 있다. 사실 노아의 방주는 다른 배와 특이하게 지붕이 있는 배임으로, 빗물의 고임에 의한 하중을 견디기 위해서라도 지붕을 경사지게 만들었을 것이고 이 경우라면 홈을 만들어 흘러내린 빗물을 필요에 따라 방주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은 매우 간단하였을 것이다. 또한 홍수초기 40 일 동안 주야로 집중적인 강우가 있은 후, 홍수 나머지 기간에도 간간이 비가 왔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화산 등의 폭발로 바다의 온도가 따뜻하여 증발량이 매우 많았을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여하간 이러한 가능성까지도 배제하고 홍수 처음부터 끝까지 방주 내에 물을 싣고 사용하였다고 가정하고 먹이와 물, 그리고 동물들이 차지하는 부피를 계산하면 다음과 같다. 동물의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음으로 최대 35,200 마리의 동물이 탓을 경우 이들이 차지하는 부피는 방주용량의 28%이고, 16,000마리의 동물이 탔다면 용량은 13 % 임으로 (Q5 참조), 먹이 6~12 %, 물 9.4 %와 함께 이것들이 차지하는 방주내 공간은 28.4~49.4 % 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방주는 동물들과 함께 먹이와 물을 충분히 실을 수 있는 공간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방주의 크기는 실을 화물의 중량과 부피에 따른 선박의 안전성, 효율성 등을 따져볼 때 더 커서도 안되고, 더 작아도 안 되는 매우 적절한 크기로서 방주가 한낱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존재했던 배였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Q16. 육식동물들은 방주 내에서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고 살았습니까? 

다른 동물을 잡아먹고 사는 육식동물들은 방주 내에서 무엇을 먹고살았을까?  한 쌍의 동물들만 들어갔는데 육식동물이 잡아먹고 나면 그 종은 멸종되는 것인가? 먹이 피라미드 아래에 있는 동물들은 잡혀 먹히기 위해서 방주에 승선했는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동물들의 육식이 홍수 후에 시작되었다고 본다면 이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한 동물들의 육식이 홍수 전에도 있었다고 하더라도 방주에 탄 동물들의 상당수가 동면에 들어가 있었을 경우에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가 아니더라도 그들을 위한 먹이의 준비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드모라페는 오늘날의 육식성 동물들을 모두 조사하여 방주에 탄 육식동물의 수를 7 목(order)의 약 2,000 마리 정도로 추산하였는데, 이들 육식동물이 홍수기간동안 필요한 먹이를 332 톤으로 계산하였다(전체 사료의 1/6 정도).(14) 물론 육식동물들이 방주에 탄 동물들을 잡아먹게 하는 일은 절대로 없었을 것이고, 냉장고도 없는 상태에서 몇 일 후면 썩어버릴 고기를 아무런 가공처리 없이 준비하였을 리도 없다. 노아가 이런 준비도 없이 방주에 동물들을 태울 정도로 바보가 아닌 것이다. 사실 이러한 부분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고의적이고 악의적으로 성경을 비판하는 자들이다. 고기들은 철저히 말려져서 건조된 상태에서 준비되었을 것이고, 고기, 내장, 피, 밀기울, 곡식가루 등으로 케이크를 만들어 말려진 후 비스켓처럼 제공되었을 것이다. 실제 이러한 먹이는 많은 사냥꾼들이나 동물원에서도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방법인 것이다. 또한 많은 물고기나 해산물들이 소금에 절여지거나, 말려져서 준비되었을 것이고, 어쩌면 일부 공간에서 개구리나 달팽이 같은 것들이 먹이용으로 사육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설치류와 같이 임신기간이 짧아 방주 내에서 태어난 많은 동물의 새끼들 중 일부는 먹이로 제공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Q17. 뱀, 팬더, 코알라, 세발가락 나무늘보, 벌레를 먹는 동물, 과일을 먹는 동물 등과 같이 특수한 먹이만을 먹는 동물들은 어떻게 먹이를 조달할 수 있었습니까? 

특별한 먹이를 먹는 동물들은 어떻게 방주 안에서 먹이를 구했을까? 뱀들은 오직 살아 있는 것만 먹는다고 하는데 어떻게 먹이를 구했을까? 물고기를 먹는 동물, 과즙이나 과일을 먹는 동물, 벌레를 먹는 동물들은 어떻게 살아갔을까? 팬더곰이나 코알라처럼 한가지 나뭇잎만 먹는 동물들은 어떻게 방주 내에서 살았을까? 팬더(panda)곰은 대나무의 새로 난 순(bamboo shoot)을 먹으며, 코알라(koala)는 eucalyptus의 잎을 먹고, 세발가락 나무늘보(three-toed sloth, Bradypus)는 cecropia 잎을 먹기 때문에 이들의 먹이 공급은 불가능한가? 정말 그런가? 이러한 의구심들에 대해 생각하여 보자.

 사실 이러한 특별한 먹이만을 먹는 현상들은 홍수 후에 생긴 식습관일 가능성이 크다. 지역과 기후변화에 따라 자기가 살던 지역의 풍부한 동식물을 주식으로 하다가 굳어진 식습관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실제로 영장류인 Hapalemur는 매우 심하게 대나무 중심의 식생활을 하는 반면 유사한 다른 종들은 거의 대나무를 먹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을 배제하고 이들이 홍수 전에도 오늘날과 똑같은 식습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먹을 수 있는 먹이가 없어서 방주 내에서 굶어 죽어야만 하는가?

뱀은 정말 살아있는 동물만은 먹는가? 뱀은 20세기초까지의 문헌에는 죽은 동물을 먹을 수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뱀이 살아 있거나 식지 않은 먹이만을 먹는다는 것은 오해인 것이다. 뱀은 쉽게 죽은 동물을 먹을 수 있도록 훈련될 수 있으며, 야생의 뱀도 배가 고플 경우에는 죽은 동물을 먹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또한 뱀은 껍질이나 썩은 고기도 먹을 수 있으며, 이스라엘 살모사(Pseudocerastes)는 썩은 고기를 더 좋아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뱀은 쉽게 건조된 펠렛(pellets) 사료에도 적응되는데, 베트남 땅군들에게 잡힌 코브라들은 건조된 펠렛사료로 잘 사육되고 있는 것이다. 팬더곰은 대나무순을 좋아하지만 포획 후에 쉽게 여러 먹이를 먹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으며, 특히 쌀로 만든 오트밀죽을 잘 먹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또한 붉은 팬더는 대나무순의 공급 없이도 포획 후 상당기간을 지냈으며 아예 안 먹고도 살 수 있었음이 보고되고 있다. 팬더곰이 대나무순을 좋아함으로 이것이 없으면 죽는다는 생각은 과장된 생각인 것이다.

코알라는 비교적 먹이를 eucalyptus의 잎(= blue gum leaves)에 의존하고 있다. 그렇다고 다른 식물을 먹지 않는 것은 아니다. 코알라는 주로 eucalyptus를 먹지만 monterey pine도 잘 먹으며, 20여종의 gum leaves들을 먹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나무는 호주가 원산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하간 신선한 eucalyptus의 잎이 없다면 코알라의 먹이공급은 불가능한가? 먼저 홍수 전에도 코알라가 eucalyptus의 잎만을 먹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대체식물이 있었을지도 모르며, 홍수 후에 생겨난 식습관일지도 모른다. 실제 과거에는 코알라가 eucalyptus의 잎 이외의 식물들도 먹었다는 기록들도 있고, 포획된 코알라는 사료로된 비스켓을 상당량을 먹는다는 기록도 있다. 코알라도 유아기 10개월 정도는 우유에 의지하며, 우유와 곡식가루, 우유와 빵을 혼합한 먹이로 상당기간 키웠으며, 이렇게 자라난 어린 코알라는 매우 다양한 음식을 먹는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노아의 방주 내에 eucalyptus의 잎이 건초로 저장되었을 수도 있으며, 코알라가 건초로 eucalyptus의 잎을 먹고도 살 수 있다는 것은 코알라가 유럽 최초로 1880년 호주로부터 영국 동물원으로 수개월에 걸쳐 배로 수송되었을 때 확인되었다. 노아가 동물격리장소에서 관찰도중 코알라의 식습관이 생명에 지장이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면 이에 대한 준비를 하였을 것이다.         

세발가락 나무늘보는 우리에 갇혀 사는 생활을 잘 견디지 못하는 동물중 하나이다. 그래서 이 동물은 포획 후 상당기간을 동물이 살던 장소에서 다루어야 한다. 이것이 몇몇 사람들에게 세발가락 나무늘보는 cecropia 잎에 식사를 의존하기 때문에 우리에 가두어 키우는 것이 어렵다고 잘못 전해지게 되었고, 이것이 다시 노아의 방주를 비판하는 재료로 사용되게 되었다. 실제 세발가락 나무늘보는 다양한 식물들을 먹으며, 어떤 종들은 오히려 cecropia 나무근처에는 가지 않음이 보고되고 있다.

벌레를 먹는 동물들을 위한 준비도 하였을 것이다. 많은 벌레들과 곤충들이 말려져서 보관되었을 것이다. 미국 인디안들은 잘 말려진 메뚜기와 열매, 견과류, 씨앗 등을 섞어 케이크로 만들어 오랜 기간 식량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노아도 수 톤의 말려진 벌레들을 준비했을 것이다. 또한 과일이나 과즙을 먹는 새나 동물들을 위하여 충분한 량의 과일이나 과즙이 건조되어 시럽이나 젤리, 설탕 등으로 보관되었을 것이고, 이들은 물에 불리거나 타서 제공되었을 것이다(15).  

  

Q18. 모든 동물이 창조시에 초식을 하였다면 육식에 필요한 송곳니는 왜 만들어졌습니까? 

성경에 의하면 모든 동물은 식물을 먹도록 창조되었고, 죽음과 죄는 아담이 범죄하기 전까지는 없었으며, 모든 것들은 보시기에 좋았다고 기록되어 있다(창1:31). 그러나 많은 동물들은 육식을 위한 여러 신체적 특징을 갖고 있으며,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기도 하며, 고안된 방어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이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 성경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상세히 말해주고 있지는 않지만, 여러 상황들을 종합하여 합리적인 추론을 하여볼 수는 있다.      

첫째,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이미 아시고 동물을 창조하실 때 육식에 필요한 기능들을 미리 만들어 놓으셨을 수 있다. 둘째, 육식에 필요한 기관들은 원래에는 다른 어떠한 양성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 날카로운 송곳니는 단단한 열매를 자르거나 껍질을 벗기는데도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셋째, 아담의 범죄 이후 유전적 변화가 일어나 만들어졌을 수 있다. 최초의 동물들은 초식동물로 만들어졌으나, 땅이 저주를 받아 거친 환경 속에서 변화와 적응이 일어나 육식동물로 변화되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넷째, 천사장 이었던 루시퍼가 타락하여 쫒겨난 후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물들을 파괴하기 시작하면서 변화되었을 수 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범죄케한 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모습이 바꿔지고, 하나님의 창조능력을 흉내낸 사탄에 의해서 사람과 동물과 식물에 유전적 변형이 일어나고 서로 물어뜯고 죽이는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을 가능성이다. 

창세기 3장에는 사람과 동식물이 저주를 받아 강력한 유전적 변형이 일어났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들이 저주를 받고(14절), 뱀은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게 되고(14절), 식물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고(18절), 하와의 신체도 변화되어 잉태하는 고통이 따르게 되고(16절), 땅도 소산이 줄어드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은 이제 죽음과 고통의 모습으로 바뀌었고, 아담은 자기의 잘못으로 저주받은 세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던 일을 뼈저리게 후회하였을 것이다.    

 

Q19. 방주 내에 동물들의 배설물은 어떻게 처리되었습니까?  

매일 동물들은 엄청난 양의 배설물들을 생산할텐데 이들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냄새, 가스, 해충들을 어떻게 관리했을까? 이것들을 8명이 처리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앞에서도 논의했지만 동물의 많은 수가 동면에 들어간다면 배설물의 양도 적을 것이기 때문에 이것도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동면하지 않았어도 8명으로도 배설물의 처리는 가능할 수 있다.   

우드모라페는 많은 자료들을 참고하여 16,000 마리의 동물들이 매일 배설하는 분변의 양을 하루 12톤으로 계산하였다. 동물의 분변은 평균 87 %가 물이기 때문에 건조물로서는 1.57 톤의 양이다. 이 양은 하루 5.32 톤(371 일 동안 1990 톤의 건조식량)으로 제공된 건조 식량의 70.5 %를 소화하고 나머지를 배설한 수치로, 농축사료로 제공되었을때 대부분의 동물들이 보이는 소화율과 일치한다. 노아의 방주에는 이러한 배설물을 처리할 수 있는 구조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케이지 바닥에 경사판을 설치하여 큰 통으로 모은 후 관을 통해 방주 밖으로 처리하는 방법, 장기간 동안 교체하지 않는 두꺼운 깔짚을 깔아주는 방법, 두껍게 흙을 깔아주는 방법, 물은 걸러서 흘려버리고 고형분은 퇴비를 만드는 방법 ...등이다. 이러한 일들을 더욱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맨 아래층에는 동면을 하거나 배설물을 적게 생산하는 그룹으로, 맨 윗층은 배설물의 양이 많은 그룹으로 나누어 승선시켰을 가능성이 크다.(16)

  

Q20. 방주 내에서 배설물로 인한 냄새와 악취, 유독한 가스 등에 대한 환기는 적절했습니까? 

방주내의 동물들은 배설물들로부터 발생된 메탄, 이산화탄소, 암모니아 등의 가스 때문에 고통을 받았는가? 이러한 생각은 방주에 가로 세로 한 규빗(45cm) 정도의 작은 창이 하나만 있었다고 오해함으로 생긴 생각이다. 그러나 이것은 방주의 크기를 생각해 볼 때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창6:16)에는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라고 되어 있는데 창문의 개수는 알 수가 없다. 성경학자인 Ben-Uri는 방주의 창은 처마밑으로 길게 연속적으로 나있는 구조일 것이라고 하였다. 이 구조는 실제 많은 동물들을 사육하는 농장에서 사용하는 창의 형태이다. 높이 13.5m의 공간에 위로부터 45cm의 크기로 연속적으로 나있는 창은 양돈장, 양 우리 등의 창 크기와 비교하거나, 바다에서의 비교적 빠른 바람, 온도유지, 방주 내 동물수 등을 고려하여 볼 때 매우 적합한 크기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또한 외부의 신선한 공기의 유입을 위해서 방주의 중간 중간에는 천장으로부터 연결되어진 공기유입관들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창과 공기유입관들은 필요에 따라 개폐나 크기가 조절될 수 있는 구조였을 것이다. 방주 내가 동물들의 배설물의 냄새로 고통을 받으며, 산소부족으로 숨쉬기도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노아의 방주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과장으로 인한 오해인 것이다.(17)    

         

Q21. 방주 내 동물들은 너무 밀집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까? 

방주 내에 16,000 마리의 동물은 너무 과도하게 밀집되어 있어 방주 내는 동물들이 발생하는 체온으로 찜통이었을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먼저 동물들의 생체량을 파악하여야 한다. 우드모라페는 16,000 마리의 동물들이 내는 열발생 생체량(biomass)은 241톤으로 계산하였는데, 방주 용적은 43,200 m3 임으로, 방주내 열생산 생체량은 5.58 kg/m3으로 계산된다. 이 수치는 밀집되지 않은 가금우리의 2.75 kg/m3 에 비해서는 2배 정도의 수치이나, 말들이 있는 마구간의 16.2 kg/m3에 비해서는 1/3 수준이며, 소들이 있는 외양간의 1/2~1/5 정도 수준이다. 오늘날 현대식 시설을 갖춘 양계장의 경우는 16 kg/m3 이며, 양돈장의 경우는 37 kg/m3 정도로 보고되고 있다. 그러므로 방주 내 동물들은 매우 적절한 공간에서 생활한 것으로 생각되며, 너무 밀집되어서 동물들의 체온으로 찜통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막연한 추측이요 오해인 것이다.(18)      

         

 Q22. 굴을 필요로 하는 동물, 발굽이 자라는 동물, 뿔이 있는 동물들은 어떻게 지냈으며, 방주 내 동물들은 운동 없이도 1년여의 기간을 지낼 수 있었습니까? 

굴속에서 사는 동물들은 흙을 담아줘야만 하는가? 굴속에서 사는 동물의 대부분은 굴이 없어도 적어도 일년동안은 생명에는 전혀 지장 없이 살 수 있다. 오늘날의 몇몇 동물원에서 이들 동물들은 콘크리트 바닥에서 키우고 있는데, 이들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우리 일부를 캄캄하게 만들어 빛을 차단시켜 주면 전혀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굴속에서 사는 동물들은 포획하여 동물원에서 사육 시 곧 그 습성이 바뀌는 것이 확인됐는데, 설치류인 마못류(pacas)와 게르빌루스쥐는 굴속에서 사는 습성을 곧 잃어버렸으며, 남미의 야행성 포유동물인 아르마딜로는 짝짓기 시에만 어두운 장소를 필요로 했고, 호주산 유대동물인 웜뱃은 포획 후 굴이 없이도 온도만 올라가지 않으면 잘 적응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그러므로 방주에 거추장스럽게 따로 굴을 파줄 필요는 없었을 것이고, 방주 깊숙한 곳에서, 필요에 따라 빛이 차단되는 상자 속에서 이들 동물들은 잘 견디었을 것이다.

또한 코뿔소와 같이 뿔이 있어 위험한 동물들은 동물격리장소에서 미리 잘라주어 수송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였을 것이고, 발굽이 있는 동물들은 바닥이 너무 딱딱하거나 부드러울 때 발굽에 손상을 입는데, 노아도 고대 로마인들이 했던 것처럼 마루바닥에 흙을 깔아주는 등 적절한 표면처리를 하여 발굽손상을 예방하였을 것이며, 설령 준비를 못했다 하더라도 발굽의 자람은 그리 치명적인 손상이 되지 않는다. 또한 동물의 운동문제인데 방주 내 작은 동물들은 갇혀 있는 장소에서 충분히 운동할 수 있었을 것이며, 문제는 큰 동물들인데 소형 동물원이나, 실험동물 사육실, 서커스 동물우리 등에서 지내는 큰 동물들은 오랜 기간 운동 없이도 우리안에서 잘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노아방주 안에 이들 동물들을 위한 운동공간이나 트랙이 존재하여서 정기적으로 운동이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19)

            

Q23. 노아는 역청(pitch)을 어디서 구했습니까? 

성경을 비판하는 자들은 역청은 석유나 석탄으로부터 만들어지는데, 노아의 시대에는 석유나 석탄이 발견되지 않았을 것임으로, 노아는 역청을 구하지 못했을 것이고, 노아의 방주는 방수가 안되어 물이 새어 들어왔을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노아는 역청을 어디서 구했을까?

역청은 코올타르를 가열 증류할 때 남겨지는 검은색의 아교와 같은 끈적끈적한 물질로서 아스팔트와 유사한 물질이다. 오늘날 역청은 일반적으로 석탄을 가열할 때 만들어진다. 사람들은 석유나 석탄 외에 역청의 다른 출처를 대부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역청은 나무(wood)를 가열하거나 증류할 때도 만들어지는 것이다. 석유와 석탄산업이 발달하기 전에 이미 역청을 만드는 방법이 존재했던 것이다. 적어도 천년 동안은 유럽에서 역청을 만드는 산업이 발달해 있었다. 거대한 목조 선박들을 만드는데 역청제조는 반드시 필요했고, 유럽 역사 도처에 기록되고 있다. 역청제조는 어느 정도 기술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많은 유럽사람들의 성씨에도 그 흔적들이 남아 있다. 폴란드에서 역청이나 타르를 의미하는 'smola'는 'Smola, Smolander, Smolen, Smolenski, Smolarz' 등으로, 독일에서 역청을 의미하는 'teer'는 'Teer, Teerman' 등으로, 영국에서는 'Pitcher, Tarrier, Tarmen' 등으로 성씨에 남아 있는데, 이들은 역청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역청은 울창한 숲에서 나무의 송진(resin)을 채취하면서 시작된다. 비스듬히 홈을 파 송진이 흘러내리게 한 후 나무밑에 용기를 두어 채취한다. 송진채취는 지금도 폴란드, 우크라이나, 러시아, 핀란드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송진채취가 끝난 후 나무를 잘게 잘라 흙으로 덮은 후 천천히 태워 숯(charcoal)을 만든다. 역청을 만드는 마지막 단계는 송진을 끓이면서 숯가루를 배합하는 것이다. 숯가루의 배합율에 따라 다른 성질을 가지는 역청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역청은 대양을 항해하는 목조선박의 방수를 위해 칠해졌던 것이다.

노아가 이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역청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석유와 석탄이 없어도 역청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노아 이전에 벌써 역청을 만드는 방법이 개발되어 전해 내려왔을  가능성이 크고, 방법이 없었다 하더라도 노아는 방주를 만들면서 많은 나무들을 벌목하고 다듬었을 것이고, 그 과정 중에 송진도 발견하였을 것이고, 송진을 다루다가 역청을 만드는 방법을 습득하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Q24.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산에 도착하였다면 실제로 목격한 사람들이 있습니까?  

노아의 방주를 발견했다는 기록은 고대와 중세의 많은 문헌에 나타나 있다.(20) 먼저 BC 275년경 베로수스는 바빌로니아라는 역사책에서 아르메니아에 있는 고르디엔 산맥에는 아직까지 배의 일부분이 남아 있어서 어떤 사람들은 역청의 조각들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부적으로 사용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배의 일부분은 아르메니아에 아직 남아있으며... 사람들은 역청을 가져다가 부적으로 사용한다.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이 장소를 방주가 보존된 하강한 곳으로 부르며, 오늘날까지 그 곳의 거주민들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4세기경 살라미스의 주교 에피파네스는 노아의 방주의 잔해가 쿠르드의 나라에서 지금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산기슭에서 노아가 방주를 떠날 때, 주 하나님께 정결하고 살찐 짐승을 희생 제물로 제사를 지낸 제단의 잔해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초대교회 교부였던 요한 크리소스톰은 노아의 방주가 있는 아르메니아의 산이 그것의 증거가 되지 않는가? 그리고 또한 노아의 방주 잔해가 요즘까지 우리에게 경고로서 거기에 남아 있지 않는가? 라고 하였다.

15세기말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 폴로는 아라랏산 근처를 통과하면서 아르메니아 중앙에 아주 크고 높은 산이 있는데, 그 위에는 노아의 방주가 남아 있다고 하며 그래서 이 산은 방주의 산이라고 불리고 있다 라고 기록하였으며, 1647년 아라랏산 근처에 살았던 아담 올리어리우스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방주 잔해들은 단단하게 되어 그들은 완전히 석화된 것처럼 보인다. 우리들은 메디아 페르시아에 있는 샤마키에서 검고 단단한 나무 십자가를 보았는데, 그 곳 주민들은 그것이 방주의 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확신하였다고 하였다.

아마도 방주를  가장 많이 목격한 사람은  프랑스 보르도의 사업가, 페르난도 나바라 이다. 그의 첫 탐험은 1952년 8월로서, 세상에 방주가 존재하고 있다고 증거하는데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빙하의 얼음 덩어리 밑에 있는 배 모양의 거대한 검은 물체는 방주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되었다. 1953년 7월에 터키 사진사, 알래딘 세커를 동반하고 두 번째 탐험을 하였다. 그러나 악천후로 인해 방주의 파편을 가져오거나 사진을 찍는데 실패했다. 1955년 6월에 세 번째의 탐험이 이루어졌다. 1955년에 나 바라는 그의 아내와 세 아들과 함께 터키에 돌아왔다. 여행의 목적은 오직 아라랏 산에 올라 방주를 보았거나 만져보았다는 결정적인 증거들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마침 1955년은 수십 년만에 빙하가 가장 많이 녹는 해로 탐험하기에는 적당하였다. 아내와 두 아들을 뒤에 두고, 이제 11살인 그의 막내아들 라파엘과 함께 나바라는 아라랏 산에 등정하였다. 마침내 이 부자는 방주 사진을 찍었던 곳에 이르렀다. 나바라 혼자서 로프 사닥다리를 타고 빙하의 갈라진 틈으로 내려가서 흙 속에 묻혀있는 방주를 찾아냈다. 거기에는 잘 잘려지고 손으로 다듬어진 나무 버팀목들이 있었다. 상당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5피트의 나무 조각을 잘라내어 들어 올렸다. 이 파편이 실제 방주의 것인지는 파편의 연대에 달려있다. 나바라는 몇몇 관계 당국에 나무 파편들을 보냈다. 이집트의 농무성은 이 시커먼 나무 파편의 연대를 약 BC 5,000년이라고 추정하였으며, 재질은 참나무라고 발표했다. 또한 나바라는 카이로 박물관의 고고학부서에도 이 나무 파편을 보냈다. 카이로 박물관에서는 약 5,000년에서 6,000년 되었다고 발표했으며, 이들은 방사성 연대측정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방주를 탐사하는 데에는 아직도 상당한 어려움이 따르고 있었다. 정부의 통제, 신체적인 어려움, 악천후의 날씨, 각종 동물들의 공격, 빙하 등이 산 정상에 오르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하였다.

유대-로마 역사가인 조세푸스(Josephus)나 칼디안 역사가인 베로수스(Berosus)와 같은 고대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저서에서 노아의 방주가 실존한다고 언급하였고, 마르코 폴로도 아르메니아의 산악지역에 노아의 방주가 있음이 보고되었다고 쓰고 있다. 서기 200 ~1700년대에 살았던 기타 십여 명의 기독교인 그리고 유대교 지도자들도 노아의 방주가 자신들이 살던 그 시대까지도 실제로 보존되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856년경 노아의 방주를 믿지 않는 세 명의 영국과학자들과 두 명의 아르메니아 안내자들이 방주가 존재하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아라랏 산에 올랐다. 방주는 아마도 발견되었던 것 같은데, 영국과학자들이 현지 안내자들에게 사실을 그대로 보고하면 죽이겠다는 협박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몇 년이 지난 후 당시 미국으로 이주하여 살고있던 등반안내원인 아르메니아인중 한사람과 등반에 참가했던 영국인 과학자중 한 사람이 따로 따로 자기들이 등반당시 노아의 방주를 찾았었다고 보고했다.

19세기의 유명한 영국의 학자이며 여행가인 제임스 브라이스 경은 방주에 관한 대규모의 자료수집과 연구를 수행했다. 이 연구 후 그는 방주가 아라랏산 어딘가에 보존되어 있다고 확신케 되었다. 결국 1876년 그는 아라랏 산 정상까지 올랐고, 해발 13,000 피트 (timber line에서는 2,000 피트)에서 4 피트나 되는 손으로 만든 나무도구 조각을 발견했는데, 그는 이를 방주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했다.

1883년 일련의 신문기사들은 일단의 터키 위원회 회원들이 이상기후로 유난히 더웠던 그 해 늦여름에 아라랏산의 산사태 상황을 조사하던 중 얼음 덩어리 밖으로 삐쭉 튀어나온 방주를 발견케 되었다고 보도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직접 방주의 잔해 안으로 들어가 조사했었다고 주장했다.

유별나게 무더웠었던 1902년 여름, 조지 하고피안이라는 한 아르메니안 소년과 그의 삼촌이 아라랏 산을 등반했는데 앞서 보도되었던 얼음 덩어리 밖으로 튀어 나와있던 방주의 잔해를 찾았다. 그 소년은 방주 위로 올라갔었으며, 그것을 자세히 조사해보았다. 1904년에 이 소년은 그 방주를 다시 한번 방문했다. 1972년 그가 죽기 직전, 그의 증언이 자세히 녹음되었다. 이 녹음 테이프는 음성분석시험을 통과했는데, 이는 그의 증언이 상당히 신뢰할 만함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1차 세계대전 중 아라랏산 상공을 비행했던 한 러시아 조종사는 자신이 방주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발견소식은 러시아황제에까지 보고되어, 그 장소로 대규모의 조사단이 파견되었었다. 군인들은 그 배를 발견하여 조사까지 했으나, 그 결과가 황제에게 보도되기 전에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다. 그들의 보고서는 분실되었고 그 조사대의 군인들도 흩어졌다. 그들 중 몇 명은 미국에 정착케 되었는데, 그들의 얘기를 들은 많은 그들의 친척들과 친구들이 이러한 사실을 확인했다.

1916년 다섯 명의 터키 군인들이 아라랏 산을 가로지르는 중에 방주를 보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30일이 지나서, 자신들이 한 미국 탐험대를 그곳으로 안내할 때가 되어서야 이 얘기를 밝혔다. 그 탐험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으며, 그들의 활약상은 그들이 죽은 후까지도 추적되지 않았다.

1943년 7월, 미 육군 중사인 에드 데이비스는 이란에 근무하고 있었다. 거기서 그는 루드족 친구를 사귀게 되었는데, 그에게서 노아의 방주가 지척에서 볼 수 있을 정도로 아라랏산에 보존되어 있다고 이야기를 들었다. 데이비스가 이 방주에 대해 물어보았을 때 저들은 그를 먼저 자신들의 마을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 그는 방주의 몇 가지 잔해들을 보았다고 주장했는데, 이 잔해들은 마른 콩, 양 지팡이, 기름 램프, 그릇 종류, 아직도 꿀을 담고있는 항아리였다. 이 모슬렘 족들은 이 방주를 외부사람들로부터 보호해야함을 자신들의 종교적 의무로 생각했었고, 필요하면 죽이기까지도 불사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저들과 예외적으로 친했었던 관계로 데이비스는 살아 나올 수 있었다. 그 부족의 지도자였던 아바스-아바스(Abas-Abas)와 데이비스의 친구였던 그의 아들은 제 삼일째에 아라랏산의 북동쪽을 등반했다. 급하고 미끄러운 바위와 설상가상으로 내린 비로 인해 그들은 방주에 0.5 마일 이내로 접근할 수 없었다. 안개와 구름이 걷히자 그들의 좌우로 약 0.5 마일 가량씩 떨어져있는 두 개의 방주의 부서진 잔해를 볼 수 있었다. 나무기둥들, 갑판, 그리고 방들을 볼 수 있었다. 아바스-아바스는 데이비스에게 방주에 대해 상세하게 말했다. 사용된 나무는 아주 단단한 나무이며, 방주 건조에 못 대신 나무못이 사용되었고, 대형 옆문은 헛간의 바깥문같이 배의 밑 부분에서부터 위로 열리게 되어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사용하는 지역은 최상갑판의 중앙에 48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85년에서 1986년까지 데이비스는 약 80여 명의 방주 연구가들과 7가지의 광범위한 면담식 질문회의를 성공적으로 통과했으며, 1989년 거짓말탐지기의 시험을 통과했다.

석유탐사 지질학자인 조지 그리인은 1953년에 헬리콥터에서 방주의 사진을 몇 장 찍어왔고, 방주의 그림을 몇 장 그려왔다. 미국으로 귀환하는 여행 중에 그리인은 자신의 사진과 그림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육상탐험을 위한 후원금을 모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다 그는 남아메리카를 여행 중에 죽었다. 비록 그의 사진과 그림들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30명 이상의 사람들이 산 절벽의 한 모퉁이에 위치한 녹고있는 얼음덩이로부터 돌출되어 나와있는 방주를 분명히 보여주는 사진들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그레고르 슈빙햄머는 1950년 말에 터키의 아다나에 위치했던 428 전략비행연대에 속해 있을 당시 F-100 비행기로 비행중 방주를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슈빙햄머는 그 방주가 마치 아라랏산의 높은 곳에 위치한 작은 골짜기에 누워있는 거대한 상자처럼 보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아라랏산 탐험자인 윌리암 크로스와  산 위 매우 깊은 협곡에 보이는 거대한 기차화물칸이나 또는 직사각형 배처럼 생긴 방주를 목격한 조종사인 공군 대위 그레고르 슈빙햄머 사이에 우연치고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다름아니라 크로스가 방주의 목격자 하고피안 아래에서 아라랏산을 탐험했던 엘프레드 리가 그린 방주 전경 스케치를 담고 있는 노아 방주 탐험이란 제목의 소책자를 슈빙햄머에게 보냈을 때에 일어난 것이다. 전에 한 번도 방주의 사진을 보지 못했던 슈빙햄머가 그가 보았던 방주를 그려달라고 그의 친한 사람중 한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부탁했다. 산 정상의 눈 속에 묻혀있는 방주와 비행기에서 보면 아주 작아 보이지만 배의 상판을 따라 있는 창문만 빼놓고, 보통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직사각형 배 모양을 하고 있는 방주의 두개의 모양은 똑같았다. 그러나 두 개의 그림사이에 일어났던 우연의 일치는 방주가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자료로서가 아니라, 단지 같은 물체를 보고 그렸다는 증거일 뿐이다.  

(한국창조과학회) 


노아의 방주 그 과학성을 밝힌다
김희택, 박진호

 

문: 노아의 방주는 과연 우수한 선박이었는가? 

답: 세계 조선공학사(造船工學史)상 뿐만 아니라, 세계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배를 손꼽는다면 뭐니뭐니해도 노아의 방주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노아의 방주야말로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의 제 2기원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유명한 배는 오늘의 미국이 있게 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산타마리아호 인데, 콜럼부스가 이 배를 타고 대서양을 향해하여, 결국 신대륙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스페인 마드리드에는 산타마리아호를 전시한 박물관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배에 대한 저술이나 연구가 활발한데 비해, 노아의 방주는 가장 기념비적인 선박이지만, 노아의 방주에 대해선 알려진 게 무척이나 미약한 실정이다. 이에 우리나라에서 행해진 연구성과를 중심으로 면밀히 살펴보기로 한다. 

 

방주에 대한 역사적 고찰 

방주에 대한 고대의 기록으로는 비록 성서상의 방주와는 동떨어진 치수지만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설형문자 점토판이 있다. 이 점토판에는 길이, 너비, 높이가 다 같이 140규빗(80m)으로 6층의 방주가, 그 위에 돛대가 있었고, 조타수(操舵手)도 있다고 쓰여져 있다. 이러한 방주의 조타수에 대해서는 성서에 일체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단지 물위에 그냥 띄워두기 위한 개념으로 만들어낸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사각형의 배가 존재했을 것으로는 믿을 수 없다. 이에 비해 성경의 기록은 단순하지만 월등한 것이다. 방주는 격심한 풍랑을 견디기 위해 그 형태와 규격이 완벽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방주의 형태에 대해 개략적으로 묘사해 본다면 방주는 밑바닥이 평평했고, 파도를 헤치고 속력을 낼 수 있도록 뱃머리가 날렵한 선박의 형태와는 달리, 적재용량을 최대한으로 하기 위한 거대한 장방형(長方形)의 평저선(平底船)으로서, 엄청난 홍수를 견디며 물위에 안정되게 떠 있을 수 있는 구조물이라고 여겨진다.

과거 노아의 방주보다 규모는 작으나 모양을 그대로 본뜬 방주를 네덜란드나 덴마크에서 여러 척 만들었는데, 속력을 위주로 하지 않고 적재량이 우선되는 선박으로서 뛰어난 성능이 발휘됨이 미국이나 우리나라의 실험이 있기 전에 이미 입증되었다. 예를 들어 다른 선박보다도 적재량이 1/3이나 더 많은데도 불구하고, 화물을 처리하는데 소요된 인력은 동일한 규모의 다른 선박과도 같았다.

게다가 물위에 축소된 모형방주를 띄워놓고, 6개월 동안 물을 점진적으로 증가시켰다가, 다음 6개월 동안 점차적으로 물을 감소시키고 모형방주를 물이 비교적 적은 내륙으로 이동시켜 본 결과, 그러한 구조물이 성서에 나타나는 환경의 변화를 견딜 수 있음이 증명되기도 하였다.

한편, 그리스의 역사가 베로수스(Berosus)는 방주의 길이가 5스타디온(1,000m), 너비 2스타디온(400m)이라고 했다. 또 오리게네스(Origenes)라는 학자는 방주의 치수가 길이 40km 너비 1.2km라는 과장된 수치를 내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창세기의 저자가 사실에 근거를 두지 않았더라면, 점토판의 기록이나 그리스 역사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길이 135m, 너비 22.5m, 높이 13.5m라는 합리적이고 현실성 있는 치수를 내놓기란 전혀 불가능했을 것이다. 

 

창세기의 노아 방주를 현대과학으로 

그렇다면 창세기에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는 구체적으로 과연 어느 정도의 과학적 설계에 의해 건조되었을까? 창세기가 쓰여진 이래 수천년 동안 사실이면서도 면밀한 고증과 소위 '과학적 증거'가 뒷받침되어 있지 않아 일반인들은 물론 성서를 믿는 기독교인들까지도 상징적인 교훈이나 문학적인 우화로 치부되어진 노아의 방주를 현대 선박공학적인 측면에서 조사해 본 결과, 매우 견고하고 안전한 선박이었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방주가 매우 현실성이 있는 배였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국가공인기관에 의한 노아 방주 실험 

국가출연기관인 해사기술연구소(海事技術硏究所, 舊선박연구소)가 작년 6월부터 본 학회의 요청으로 노아의 방주를 조선공학적 입장으로 접근, 이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하여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연구소는 선박의 선형시험 및 관련성능 평가업무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기관으로서 세계 조선 2위국인 우리나라 수출선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성능평가를 받고 있고, 그 결과는 외국의 선주(船主)들에게도 그대로 인정되고 있으며, 지금까지 480여 척의 선박을 성능 평가했다고 알려져 있다.

해사기술연구소는 본 학회의 의뢰를 받아 선박의 안정성 연구분야에서 국내 최고 권위자인 홍석원 박사를 팀장으로한 9명의 전문연구팀에게 맡겨 선박의 안전성능을 실험하게 되었다.

연구에 앞서 우선적으로 해결할 문제가 있었는데, 기초자료의 부족이 그것이었다. 특히 방주의 외부모습, 방주의 내부 구조에 대한 자료 등이 턱없이 부족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주자료의 제약성에도 불구하고 성경 창세기에 나와있는 노아 방주의 규격(길이135m, 너비 22.5m, 높이 13.5m)과 아라랏산에서 목격된 방주의 형상을 토대로 제작한 노아 방주 복원도를 바탕으로 하여 실험용 방주를 건조할 수 있었다. 

 

현대의 최첨단 선박보다 우수 

1950년대 미국에서도 일찍이 방주에 대한 실험이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선박공학의 수준이나 기타 제반 여건들은 90년대인 지금과 비교할 때 모든 면에 있어서 뒤쳐져 있었다. 그래서 50년대 미국에 있었던 방주실험은 아주 기초적인 선박의 복원안정성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따라서 이때부터 40여년이 경과한 지금 현대적 수준에 걸맞은 실험을 하고자, 앞서 미국에서 있었던 복원안정성 뿐만 아니라 방주의 종합적인 안정성평가에 주안점을 두었다. 특히 두드러진 점은 방주자체의 모형실험에 큰 의의를 두었고, 다른 형상을 갖는 배와의 상대평가도 수행하여 이 배의 진면목을 알아보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홍박사 팀은 테스트에 쓰인 실험용 방주로 길이를 50분의 1로 축소(길이 2.7m) 제작하였고, 해사기술연구소의 대형수조(길이 200m, 폭16m, 수심 7m)에서 인공적으로 다양한 높이, 강도, 속도의 조류, 파도, 풍랑, 바람을 만들고 역시 축소된 내부 선체, 선원을 실은 상태, 내부 화물을 적재한 상태 등 다각적으로 실험을 수행했다. 그 결과 노아의 방주가 현대의 최첨단 조선공학적 기법으로 제작된 그 어느 선박보다 뛰어난 안정성을 갖고 있는 배였다는 것이 실증되었다. 또 상대평가에 의한 우수성을 알아보기 위해 노아 방주와 동일한 부피를 가지면서 길이, 폭, 높이의 비율이 각기 다른 현대 조선공학적 기법으로 제작한 12척의 다른 모형선박을 만들어 선박의 안정성(파랑안전성, ·구조안전성, 복원안전성)에 대해 수 차례의 비교 수치해석과정을 거쳤다. 조선공학적인 관점에서 변환 가능한 12척의 모형 배들과의 비교 수치해석결과, 선형(船形)의 높이가 같은 경우에는 노아 방주가 가장 최적인 복원안정성을 주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에 대해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장창두 교수는 아직 방주구조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 결과가 없는 상태에서, 이 정도수준의 연구성과는 과거 외국의 실험보다 더 한층 앞선 것이라고 언급했다. 

 

방주학의 태동 

방주의 안정성 실험은 방주연구에 있어서 지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로선 방주의 종합적인 연구가 불충분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방주내부구조에 대해선 아직 밝혀내지도 못한 실정이다. 따라서 창조과학에 대한 깊이 있고 전반적인 연구 못지 않게 방주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리라 본다.

어차피 창조과학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피조세계의 오묘한 이치를 밝혀나가는 학문이라고 한다면, 그 한 분야인 방주학(方舟學: Arkology)도 창조과학의 중요한 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큰 범주로써 창조과학이 하나님의 지으신 피조세계들을 밝히는 여러 가지 과학적인 행위들의 과정이라고 한다면, 또 하나의 작은 범주로써 방주학은 노아의 방주 그 자체의 종합적인 연구뿐만 아니라, 방주로 인한 노아의 홍수 전, 후의 제반적 환경까지도 포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그래서 방주학을 접근할 때, 홍수를 지사학적 측면에서 과학적으로 다룰 지질학자, 지리학자, 그리고 홍수이전의 문명과 생활사를 연구하는 고고학자, 인류학자, 홍수이전(以前)과 이후(以後)를 구분 짓게 한 분기점인 노아의 방주, 그 자체를 현대의 선박공학적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는 조선공학자, 해양학자, 홍수이전 주민 수를 가늠하는 인구학자, 통계학자, 방주 건조에 쓰였던 여러 가지 구조의 재질(才質)을 알아낼 수 있을 재료공학자, 임학자, 화공학자, 홍수이전에 통용되었던 최초의 언어를 연구하는 언어학자, 기호학자, 홍수로 인한 지구의 기온하강이나 천체의 변화를 연구하는 기후학자, 천문학자, 방주에 승선했던 생물과 홍수전후의 생물들의 사이를 연구하는 동물학자, 식물학자, 방주의 원형(原形)을 컴퓨터그래픽(Computer Graphics)에 의해 재현시킬 수 있는 그래픽디자이너 등 실로 다양한 관련분야의 전공이 필요하다 아니 할 수 없다. 

이렇게 다양한 전공분야의 연관성 때문에, 전 이화여대 교수였던 민희식 교수는 방주연구를 위해 각계 각층의 전공분야를 가진 학자들이 모여서 심포지엄을 해야 할 정도라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방주학의 연구에 있어선 어느 특정한 한 분야의 전공으로만 파헤쳐 지기보다는, 총체적(holistic)이고, 다양한 측면에서의 종합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여기에 방주의 영적 의미를 제시할 수 있는 신학(神學)까지도 포함될 수 있겠다.

아무튼 창조과학의 대부분의 분야가 그러하듯이, 아직 방주학은 미개척 학문분야로 남아있다. 조금이라도 자기가 하는 전공과 관련되어 질 수 있고, 방주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이 분야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성과가 진척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한국창조과학회)

 

노아와 홍수의 유명한 이야기는 창세기 6~8장에 나온다. 인간이 심하게 타락하자 신은 인간 전부를 파멸시키고 새로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세기 6:8). 그 이유는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이다. 노아는 500살의 늙은 나이에 셈, 함, 야벳의 세 아들을 두었다.

신은 노아에게 노아와 그의 아들들, 며느리들이 세상의 모든 동물들의 암수 한 쌍씩과 함께 탈 수 있는 커다란 방주를 만들라고 명했다. 신은 방주의 정확한 크기를 말해주고, 노아가 모든 동물들을 방주에 넣자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그 뒤 비가 40일 동안이나 밤낮으로 내려 인류 전체가 물에 빠져 죽었다. (방주는 배가 아니었으므로 노 같은 항해 장치가 없었다. 마치 거대한 생명보호소 같았고, 어디에 상륙할지는 신의 뜻에 달려 있었다.)

물은 150일 동안이나 빠지지 않았다. 방주는 이내 아라랏 산에 이르렀다. 부근에 마른 땅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노아는 비둘기 한 마리를 보냈으나 비둘기는 뭍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왔다. 한 주일 뒤 노아가 다시 비둘기를 보내자 이번에는 올리브 가지를 부리에 물고 돌아왔다. 물이 빠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이후 올리브 가지를 문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 되었다.

가족과 동물들이 방주에서 무사히 살아남은 뒤 노아는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신은 이제 다시 세상을 홍수로 파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은 성서에서 최초로 제단과 제물이 언급된 경우다.) 그 약속의 증거는 무지개였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창세기 9:13).

신은 노아의 세 아들에게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했는데, 현명한 충고였다. 세상에 남은 유일한 사람들이었으니까. 창세기 10장에는 노아의 세 아들을 이은 후손들의 명단이 나온다. 개략적으로 말해 함은 현대 아프리카인의 조상이고, 야벳은 유럽인의 조상, 셈은 중동인의 조상이다. 유대인을 비롯한 중동의 여러 종족들이 스스로 '셈족'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셈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인류학자들은 히브리인, 가나안인, 아시리아인, 바빌로니아인, 아랍인 등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는 고대 민족들의 집단을 '셈족'이라고 부른다.

신의 명령을 받아 주위의 조롱을 무릅쓰고서 방주를 만든 노아는 용감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런 미덕을 가졌음에도 창세기는 좋지 않은 이야기를 전한다. 문제는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은 것이다(그는 포도 재배 기술을 발명했다고 한다). 그는 포도주에 취해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다. 그것을 재미있게 여긴 함이 다른 두 형제에게 말했다.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이 함보다 더 컸던 셈과 야벳은 뒷걸음질로 노아의 장막에 들어가 아버지의 벗은 몸을 쳐다보지 않고 옷으로 덮어주었다. 아버지에게 불경스러웠던 함의 자손은 노아의 저주를 받았다(창세기 9:26).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 저주 때문에 (함의 자손인) 아프리카인들이 오랫동안 노예 상태로 있었다고 말한다.

노아의 이야기에서 흔히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그가 500살 되었을 때 신이 그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명했고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600살 때 방주가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노아는 950살에 죽었는데, 이것은 969살까지 산 그의 할아버지 므두셀라에 근접하는 기록이다. 만약 창세기의 연대 기록이 옳다면, 므두셀라는 늙어 죽은 게 아니라 홍수 때문에 죽은 게 된다.

노아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다. 홍수의 전설은 전 세계에 여러 가지 변형이 있지만, 창세기의 이야기는 독특하다. 신은 특정한 이유에서(인간의 타락) 홍수를 내렸고, 노아는 특정한 이유에서(선한 사람) 살아남았다. 방주는 악이 파멸했을 때 선한 사람들이 살아남는 것을 말해주는 상징이 되었다. 초기 그리스도교도들에게 방주는 천국의 희망을 상징했다. '방주'라는 말은 파멸로부터 벗어난 장소를 뜻하게 되었다. 나치의 손아귀에서 유대인을 구하는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토머스 케닐리(Thomas Keneally)의 『쉰들러의 방주 Schindler's Ark』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노아는 '제2의 아담'이었다. 그는 인류의 새로운 아버지였다. 다행히 그는 최초의 인간 아담보다 더 선량하고 순종적인 사람이었다. 신약성서에 노아는 신앙심이 깊은 인물로 몇 차례 언급된다. 에스겔 14:14는 노아를 다니엘, 욥과 더불어 세 명의 선한 사람으로 꼽는다. 예수는 신도들에게 노아의 시대에 홍수가 그랬던 것처럼 심판의 날도 예기치 않게 다가올 것이라고 말했다(마태복음 24:36~39).

하지만 코란에서는 노아의 아내인 와일라가 사람들에게 남편이 미쳤다고 말하고 다닌다. 무슬림 전설에서 노아가 방주에서 날려 보낸 비둘기는 천국에 사는 열 가지 동물 중 하나다. 알코올 중독에서 생기는 해악을 우려한 일부 유대인들은 노아가 포도주를 빚은 일을 사탄의 탓으로 돌렸다. 전설에 따르면 사탄은 양, 사자, 원숭이, 돼지의 피로 포도나무에 거름을 주었다고 한다. 그 네 동물은 각기 의미가 있다. 포도주를 마시면 사람은 유순해졌다가(양), 사나워졌다가(사자), 어리석어졌다가(원숭이), 결국에는 진흙탕에서 뒹굴게 된다(돼지).

노아와 방주는 미술에서 자주 다루는 주제다. 화가들은 동물들이 줄을 지어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즐겨 그렸다.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은 덜 유쾌한 주제도 여러 차례 그림으로 묘사되었다. 선한 사람도 때로는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있다는 경고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유명한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에는 두 가지 상황의 노아가 다 나온다. 술에 취한 장면에서는 세 아들도 벌거벗은 모습이다. 술에 취한 노아를 묘사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아마 조반니 벨리니가 1515년경에 그린 「술 취한 노아」일 것이다. 이 그림에서 노아는 장막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정신을 잃고 땅바닥에 누워 있다. 세 아들이 옷으로 그의 몸을 덮는데, 하나는 호기심 어린 표정이고, 또 하나는 킬킬 웃고, 나머지 한 아들은 공손하게 시선을 돌린 자세다.

노아의 이야기는 무대에도 올랐다. 저명한 극작가 클리퍼드 오데츠(Clifford Odets)는 그 이야기를 『꽃이 핀 복숭아나무 The Flowering Peach』라는 작품으로 극화했다. 이 희곡을 각색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투 바이 투」는 코미디언인 대니 케이가 주연을 맡았고 리처드 로저스가 음악을 담당했다. ('투 바이 투'란 물론 방주에 탄 암수 한 쌍의 동물들을 가리킨다.) 중세에 노아는 추리극의 인기 있는 주제였다. 노아를 다룬 연극에서 그의 아내는 흔히 홍수의 예언을 미친 소리라고 여기는 잔소리가 심한 여자로 묘사된다. 노아는 영웅이라기보다 어릿광대 같은 모습이며, 술병을 든 공처가 남편으로 등장한다. 구약성서의 이야기들을 흑인 노예의 말투로 각색한 미국 남부 작가 로아크 브래드퍼드(Roark Bradford)의 『아담 노인과 그의 자손들 Ol' Man Adam an' His Chillun』에서도 노아는 중요한 인물로 나온다.

영화 제작자들도 그 흥미로운 이야기를 놓칠 리 없다. 초기 대작은 1929년에 개봉된 「노아의 방주」였다. 1936년 영화 「푸른 초원」은 배우들이 모두 흑인으로 캐스팅되었고, 에디 앤더슨이 주연을 맡아 선량하면서도 코믹한 노아를 연기했다. 노아 이야기는 1966년 영화 「천지창조」에서도 핵심이었는데, 여기서 노아의 역할은 영화의 감독인 존 휴스턴이 맡았다(그는 또 신의 목소리와 해설자의 역할도 담당했다). 질이 좀 떨어지는 1999년 TV 영화 「노아의 방주」는 창세기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황당무계하게도 해적을 끌어들였다. 프랑스 작곡가 카미유 생상은 노아의 이야기로 「대홍수」라는 오페라를 만들었다.

노아의 이야기는 성서의 내용 중 가장 세속화된 부분일 것이다. 이야기 자체는 신이 인간의 죄에 대해 (거의 모든 사람들을 휩쓸어버릴 만큼) 얼마나 완강한 태도를 취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상당히 종교적이다. 일반 대중이 이해하기 쉽도록 그 이야기는 인간이 야생동물들을 방주 안에 집어넣고 긴 폭풍을 견디는 내용, 바꿔 말하면 떠다니는 동물원 같은 형태로 바뀌었다. (그러니 애완동물 용품 체인점의 명칭이 노아의 방주인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노아의 방주를 다룬 아동 도서는 무수히 많지만, 방주에 탄 동물을 그린 미술 작품들이 그렇듯이 대부분 그 이야기의 종교적 메시지를 놓치고 있다. 창세기에는 방주가 상륙한 곳이 아라랏 산이라고 되어 있으므로 사람들은 오랫동안 방주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아라랏이라는 이름의 산은 터키와 이란의 경계에 있는데, 아직도 두 나라 정부는 고고학자들의 탐사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창세기에는 많은 산들이 나오기 때문에 오늘날 아라랏이라는 산이 바로 방주가 상륙한 곳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아 [Noah] (『바이블 키워드』, 2007. 12. 24., 도서출판 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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