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셋 사람이 여호와께 속건제물로 드린 금 독종은 이러하니 아스돗을 위하여 하나요 가사를 위하여 하나요 아스글론을 위하여 하나요 가드를 위하여 하나요 에그론을 위하여 하나이며
드린 바 금 쥐들은 견고한 성읍에서부터 시골의 마을에까지 그리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큰 돌에 이르기까지 다섯 방백들에게 속한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성읍들의 수대로였더라 그 돌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의 밭에 오늘까지 있더라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전령들을 기얏여아림 주민에게 보내어 이르되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궤가 기럇여아림이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암소가 끄는 수레에 여호와의 궤를 올려놓고 수레의 뒤를 따랐습니다.
우리의 삶은 여호와의 궤를 앞세우고 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의 크리스천의 삶의 문제는 여호와의 궤를 앞세우고 사는 삶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유주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 대로 사는 것은 법 안의 자유만을 말하는 제한적인 자유입니다.
사람들은 그 선을 넘고 싶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선을 벗어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성경은 무제한적인 자유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두 가지 길이 그 앞에 있습니다.
법궤의 인도를 받고 가느냐 아니면 내가 법궤를 끌고 가느냐.
법궤의 인도를 받고 가는 삶은 생명나무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법궤를 끌고 가는 삶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길입니다.
생명나무의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길은 내가 옳은 대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죽 법궤를 인도를 받아 살았으면 좋았을텐데 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벧세메스까지 따라 왔습니다.
그리고 돌아갔습니다.
과거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일으키신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믿던 다곤, 아스다롯, 바알세붑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했는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어리석습니다.
대통령 선거를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게 중에는 대통령이 그들의 문제를 다 해결해줄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이 지지하는 사람이 반신처럼 보이는 것 같습니다.
하긴 우리는 사람들에게 느님이라는 호칭을 부르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느님이 무엇입니까?
신이란 뜻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우상이라고 부릅니다.
똑같은 사람인데 느님이라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이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수레가 벧세사람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이르렀습니다.
여호수아는 예수와 같은 이름입니다.
그 뜻은 구원자입니다.
이 밭에는 큰 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반석이십니다.
여호수아의 밭에 있는 큰 돌은 우리의 반석이신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 성전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 지성소입니다.
하나님의 궤가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법궤가 있고 큰 돌이 있습니다.
거기가 성전입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그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는 복종의 표시였습니다.
내 마음대로 살지 않고 당신의 뜻대로 살겠다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예배한다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는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살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벧세메스 사람들에게 슬픈 일이 일어났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들여다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 위에는 시은좌가 있습니다.
시은좌는 시은소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곳입니다.
지성소에는 일년에 한 번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이 지성소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생명의 상징인 피가 필요했습니다.
거룩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대속의 피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래서 칠십 명이 죽었습니다.
앞에 오만이 나옵니다.
오만 칠십 명은 아니겠죠.
고대 사회에 인구는 그렇게 많지가 않았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보내기로 결정을 합니다.
사람들은 기럇여아림으로 보내기로 결정을 합니다.
기럇여아림은 벧세메스에서 약 14Km, 예루살렘에서도 그정도 떨어진 유다 지파의 한 성읍입니다.
성경에는 동일한 장소를 두 가지 이상의 지명으로 부르는 예가 더러 있습니다.
예를 들면 루스라는 광야는 야곱이 그곳에서 하나님을 꿈에서 뵌 후에 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사건과 상황에 따라 그곳 지명을 달리 부르기도 합니다.
유다 지파의 성읍은 기럇여아림도 성경에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 곳입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바알라(수 15:9~10 대상 13:6), 기럇바알(수 15:60, 18:14), 바알레 유다(삼하 6:2), 기랴다림(스 2:25)이 있습니다.
기럇여아림는 키르야트 예아림이라고 합니다.
키르야트는 도시를 나타냅니다.
야아르는 '산림'을 뜻하는 히브리어입니다. 이 둘의 합성어가 기럇여아림입니다.
기럇여아림의 초기 이름은 기럇바알이었습니다.
이것은 유다의 북쪽 경계의 바알라(수15:9)로 등장합니다.
베냐민의 경계에 대한 설명에서는 기럇바알(수15:60)로 등장합니다.
그후에는 바알레 유다(삼상5:1-7:2)로 언급됩니다.
기럇여아림은 숲 때문에 이름이 붙여진 곳입니다.
광야가 많은 이스라엘 땅에서 푸르름이 있다는 것은 생명의 약동을 드러내는 흔적이며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신이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따라서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면 신이 그 제사를 받을 만큼 좋을 것 같은 그런 곳입니다.
숲이 있으니 짐승들이 있고 사람들이 살기에 좋은 곳이 되었습니다.
동물 학자의 말에 따르면 동물이 많이 산다는 사실은 동물들이 생활하기에 편한 자연 조건을 그대로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도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럇여아림은 푸르름으로 인해서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그들이 섬기던 신은 바알라였습니다.
바알라는 '아내' 혹은 '숙녀'로서 이방 비옥의 여신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들어오기 전에는 그곳이 바알을 섬기던 우상의 자리였습니다.
경치가 좋고 물이 맑고 산이 깊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블레셋 족속의 성읍이었으며 우상 바알을 섬겼던 성읍이기에 '바알의 성'이라는 의미로 기럇바알이라고 한 것입니다.
거룩한 법궤는 이 기럇여아림에 이십 년 간 안치됩니다.
그리고 다윗이 정권을 잡고 블레셋의 세력을 잠재운 후에야 예루살렘으로 옮겼습니다.
법궤가 있는 동안 기럇여아림은 블레셋의 권세에서 자유할 수 있었습니다.
법궤를 두려워하는 블레셋이 그 성읍을 공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부터 기럇바알 성읍이 기럇여아림, 즉 '수풀의 성읍'으로 불린 것입니다.
수풀은 성경에서 풍요로운 생명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맞이한 후부터 기럇여아림은 평화와 생명이 넘치는 곳이 되었습니다.
법궤가 떠난 후에 이곳이 바알레 유다로 불립니다.
그 뜻은 '유다의 바알'이라는 의미입니다.
유다 족속이 거하고, 하나님의 법궤까지 보관했던 수풀의 성읍이 유다의 바알 성읍으로 불리웠다는 것은 그 20년 동안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 대신 바알 우상을 더 열심히 섬겼다는 증거가 됩니다.
20년 동안 자기들 성읍에 들어온 법궤를 열심히 섬겼다면 '기럇여호와', 즉 '여호와의 성읍'으로 불리웠을 것입니다.
이처럼 기럇여아림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축복의 기회도 외면하고 수치스러운 지명으로 성경에 기록되는 어리석은 삶을 보낸 것입니다.
기럇여아림이 여호와의 궤를 맞이하고도 바알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할 정도이니 이스라엘의 타락상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유다의 바알'로 불린 기럇여아림 성읍처럼 '교회의 바알 우상'은 없는지 반성해 봐야 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큰 건물, 돈 많고 권세 있는 성도, 교인의 양적 숫자 등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더 알고, 그분을 더 닮고, 그분의 진리를 더 사모하는 일보다 교회 외적인 것에 더 눈을 돌리고 있지 않은지요?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을 성경은 '성도', 즉 '거룩한 백성'으로 부릅니다.
기럇여아림 성읍 사람들처럼 아름다운 이름을 상실하지 않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궤가 기럇여아림이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궤가 기럇여아림에 20년 동안 있었습니다.
제가 서울에서 부목사로 섬기던 교회는 장로교회 중에 두번째로 설립된 교회입니다.
1893년 사무엘 무어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승동교회입니다.
이 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기면서 귀가 딱지 생기도록 들은 게 교회의 역사입니다.
그냥 오래된 교회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자신들이 그 당시에 세운 것도 아닌데!
중요한 것은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궤가 20년 있으면 무엇입니까?
삶이 변해야 하지요.
궤가 단 삼개월만 머문 집이 성경에 나옵니다.
그런데 그 집이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됩니다.
바로 오벧에돔의 집입니다.
사람들은 정말 의미 없는 것에 목숨겁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삶이 변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