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사무엘상

2장 2절

기독항해자 2017. 1. 26. 11:37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한나의 신앙고백입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위대한 신앙고백이 있습니다.신앙고백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나의 인식을 말합니다.내가 알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이것이 신앙고백입니다.다른 사람의 신앙 고백이 아닌 나의 신앙고백이 중요합니다.이런 신앙 고백은 학습을 통해서 배운 지식이 아니라 배운 지식을 경험함으로써 가질 수가 있습니다.한나는 지금까지 신앙의 가정에서 자라서 신앙의 유산을 배워 왔습니다.그리고 이제는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험하였습니다.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은 내가 연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우리를 만나 주셔야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 주시기 위해서 데려가시는 장소가 있습니다.
호세아 2장 14, 15절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 주시기 위해서 데려가시는 장소는 바로 거친 들입니다.이곳을 광야라고 부릅니다.하나님이 우리를 데려가시는 곳은 광야입니다.그를 타일러 데려가신다고 합니다.구슬러서, 꼬드겨서 데려가시는 것입니다.광야는 쉬운 곳이 아닙니다.광야는 어려운 곳입니다.이 광야를 학교라고 부릅니다.광야 학교!이 광야 학교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배우게 됩니다.학습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우게 됩니다.
도널드 맥컬로우라고 하는 사람이 쓴 광야를 지나는 법이란 책 10장에 고통이 만들어내는 주제가 나옵니다.이 10장을 도널드는 조지 맥도널드의 말을 인용하면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맛보았다. 인간이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과 같아지게 하기 위해서였다.” 

도널드의 말을 따라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냉혹한 현실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왕관으로 곧장 넘어가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토요일이라는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 하루 동안 온갖 문제와 역경을 만나다보면 과연 내일의 해가 뜰지 암담하기만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토요일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고통을 대신 지고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고통은 어제와 다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그분의 고통과 같게 만들었습니다. 

즉 무의마한 고통이 아니라 의미와 목적이 있는 고통으로, 

유해한 고통이 아니라 구원을 이루는 고통으로, 

죽음을 부르는 고통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고통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의 고통을 피해야 할 재앙으로 보지 않고 상급을 받을 기회라고 이야기합니다(약1:2-4).

 

1. 석탄이 다이아몬드가 되려면

경험을 통해 볼 때, 고통은 확실히 인격을 연단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연은 바람을 타고 더 높이 올라갑니다. 

인간도 삶의 광풍이 휘몰아칠 때 더 높은 곳으로 비상합니다.

위대한 업적은 주로 그런 힘겨운 분투에서 탄생합니다.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문제가 있는 중에 위대한 업적을 이루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플라톤은 곱사등이였습니다. 

그리스의 유명한 웅변가 데모스테네스는 말더듬이였습니다. 

그의 첫 공식연설을 들었던 사람들은 그를 비웃으며 야유했습니다. 

호머는 장님이었고 베토벤은 귀머거리가 되었을 때 불후의 명작을 작곡했습니다.

 

2. 고통을 통한 치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이 기독교 신앙의 기반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성금요일에서 부활절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우리를 옮겨주었습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현실적 고통을 부인하거나 고통에서 즉각적인 해방을 약속하는 무조건적인 승리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의 한가운데서 구원을 약속하고 비극이 승리로 끝날 것을 보장합니다.

고통이 성숙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분명 좋은 소식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하나님은 최소한 세 가지 목적을 위해 고통을 사용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필요한 분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둘째는 하나님이 우리의 공허한 삶에 들어오시기 위해서이고, 

마지막 세 번째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3. 고통의 효과

하나님은 어려움과 고통으로 우리의 주의를 먼저 끌고 우리를 잠잠케 하신 뒤, 우리를 고쳐주십니다. 

만일 열심히 노력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어떤 장애물도 넘을 수 있고 이 세상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면, 그래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 없습니다. 

언제나 자기중심적이 되어서 자기 능력만 의지할 것이고 하나님은 주변적 존재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심각한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에게 강하게 저항하는 바보가 될 것입니다.

찰스 커밍스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고통이 우리의 영성에 미치는 즉각적인 효과는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힘없고 보잘것 없는 존재인지를 제대로 일깨워준다는 점이다. 나는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만약 내게 어려움과 고통의 순간이 없었다면 노련하게 일처리하고 남보다 더 열심히 준비해서 내가 최고라는 자기만족의 착각 속에 살았을 것이다. 인간의 착각을 깨뜨리는 그러한 고통이야말로 참으로 유용하다. 그러한 고통이 있기에 내 자존심이 피땀 흘려 세우고 조심스레 유지하고 있는 ‘자아’의 모래성이 와르르 무너진다. 고통의 정도가 심각할수록 모래성은 완전히 무너져 내려 나를 태양과 비와 바람에 노출시킨다.”

고통은 우리에게 뭔가 잘못되었다고 알리는 신호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신호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정신을 차리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즐거움은 양심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속삭임이고 고통은 하나님의 외침이다. 고통은 귀머거리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확성기인 셈이다.”

혼자 힘으로는 영혼의 깊은 갈망을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마침내 깨달았을 때 진정한 치유가 시작됩니다. 

그때에야 자기중심적 꿈나라를 떠나서 집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4. 연약함 속의 능력

죽어버린 꿈과 고통의 상황이 우리의 꽉 쥔 주먹을 펴줄 것입니다. 

자기만족의 허상에 빠지게 만드는 온갖 잡동사니를 쥐고 있던 손을 펴서 하나님의 임재라는 선물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에 거하시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금요일의 십자가와 부활주일의 최종 성취 사이의 험난한 길을 우리가 제대로 걸어갈 수 있도록 성령은 도우십니다. 

고통과 허무함은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영역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믿음으로 살고 성령의 충만을 받아도 무력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약한 존재라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주십니다.

 

5.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충분하다.

고통을 받는 중에, 아니 어쩌면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발견할 수 있었던 그 한 자기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요청한 그대로 허락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응답받는 기도의 대부분은 바울의 말처럼 충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의 신학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십자가만큼 연약함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곳이 없고 십자가만큼 패배가 명백한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연약함 속에 계셨고 이 세상을 위한 구원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6. 걸작으로 빚다.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이용해서 선한 결과를 맺게 할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를 정신 차리게 하시고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 그분의 능력이 나타나는 기회로 이용하십니다. 

토요일의 고통스런 나날에도, 아니 오히려 그 고통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대한 조각가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다윗 상마저 울고 갈 정도로 하나님은 우리를 언젠가 대단한 걸작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할 일이 산더미입니다.

역사적으로 조각가들은 두 가지 기술을 기본적으로 사용해왔습니다. 

재료를 붙여나가는 소조기법과 재료를 깎고 다듬는 조각 기법입니다. 

조각 기법에서는 조각가가 나무나 돌덩이를 놓고 머릿속에 완성된 모습을 그려가며 깎고 다듬어서 자신이 원하는 형태를 만들어나갑니다.

반면에서 소조 기법은 조각가가 진흙이나 밀랍이나 그 밖의 재료를 갖고 조금씩 붙여가면서 자신이 원하는 형태를 만들어 갑니다. 

하나님은 그 두 가지 기법을 모두 사용하셔서 죄를 깎아버리고 진흙을 덧붙이며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조각 기법은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조각칼의 날카로운 칼끝이 우리의 잘못된 욕망과 완고한 고집을 사정없이 깎아버립니다. 

우리 삶에서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이기심 때문에 조각가 하나님이 이기심을 깎기 위해 사용하시는 연장이 좌절입니다. 

그리스도를 닮도록 만들기 위해 우리 뜻대로 되지 않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망치가 우리의 존재 깊숙한 곳에 절망이라는 쐐기를 박아버리면 자기중심적 이기심이 부러지면서 우리는 좀 더 걸작에 가까워집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은 빈틈을 메우시고 거친 면을 부드럽게 하시고 부러진 조각들을 이어서 그리스도를 닮은 새로운 형상으로 만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어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키십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광야라고 하는 고난의 학교에 입학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이라고 하는 고통을 이곳에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고통뿐만아니라 고통 너머에 있는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한나가 경험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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