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누가복음묵상

누가복음 4장 1-13절

기독항해자 2015. 4. 30. 17:42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군을 보이며

6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10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수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누가는 말합니다.

성령 충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성경은 누가가 기록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만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누가복음 1:41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누가복음 1: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사도행전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도행전 4: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사도행전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사도행전 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사도행전 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행전 7: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사도행전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사도행전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사도행전 13: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사도행전 13: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누가가 기록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줄여서 누가행전이라고 불릅니다.

원래는 한 권이었는데 편의상 둘로 나눈 것입니다.

누가행전 밖에서는 유일하게 에베소서에만 성령충만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충만하다는 뜻은 가득 찬 상태를 말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게 됩니다.

거꾸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경건한 생활을 위해서 성령으로 충만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도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람에 대한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1:3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성막 건축의 책임자였던 브살렐이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브살렐은 원래 건축가였을 것입니다.

브살렐은 건축일을 더 잘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공생애의 삶을 사시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지셔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을 위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믿음으로 성령 충만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 같이 성령 충만도 믿음으로 받습니다.

성령 충만은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예수님께서 더 간절히 원하시는 명령입니다.

첫째, 성령 충만 받기를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둘째, 여러분의 죄를 남김없이 고백하십시오.

셋째, 성령 충만을 믿음으로 간구하십시오.

넷째, 간구했으면 믿음으로 성령 충만함을 받아들이고 성령 충만을 기대하십시오.

 

성령충만하게 되면 기쁨과 믿음이 충만하게 됩니다.

그리고 전도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 생기게 됩니다.

이게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해야만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이제 생각해보려는 시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우리는 이 구절에서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중요한 특징을 보게 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성령에게 이끌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끌리다란 말은 끈으로 매여 있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의 끈에 매여 성령이 이끄시는 데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광야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나라는 광야라고 할 만한 곳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광야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광야에 대한 특성을 여러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광야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26절 말씀입니다.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음침한 땅, 사람이 다니지 아니하고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

 

첫째, 광야는 사막과 구덩이의 땅입니다.

사막을 걸어갈 때는 보통 평지를 걷기보다 힘들고 더 많은 체력을 소모하게 됩니다.

모래 사막과 같은 인생의 광야를 지나갈 때면 산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힘들게 느껴지게 됩니다.

또한 사막에는 많은 구덩이들이 있습니다.

인생의 광야를 지날 때면 헤어 나오기 힘든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하기도 합니다.

광야에는 많은 구덩이와 같은 문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둘째, 광야는 건조한 땅입니다.

광야를 지날 때에는 목마름을 경험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 목마름이 하나님을 찾게 되는 발판이 된다고 말합니다.

 

시편 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셋째, 광야는 사망의 음침한 땅입니다.

인생의 광야를 지날 때면 가끔 영혼의 밤을 지나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분명히 보이지 않고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방향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 속에서 출구를 찾기 위해 더듬어야 합니다.

어떤 위험 속으로 받을 내딛게 될지 두렵기도 합니다.

영혼의 밤을 지날 때는 성령께서 더 이상 빛을 비추시지도, 인도하지도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어두움 속에서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지만 주님으로부터 아무 지시도 받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이 광야의 생활이 정말 힘든 점은 왜 이런 곳을 지나야 하는지 그 까닭을 알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런 일들을 허락하시는지 알기만 한다면 견디어 내기가 훨씬 쉬우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시편기자는 우리가 이 사망의 음침한 땅을 지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시편23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넷째, 광야는 사람이 다니지 않는 외로운 곳입니다.

광야에는 사람들이 포장해 놓은 도로나 길의 방향을 알려 주는 표지판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광야의 가시와 돌밭 길을 걸을 때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잘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곳에 발을 내딛는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광야는 다른 사람이 함께 동행 해 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다섯째, 광야는 우리를 낮추시는 곳(8:3)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낮아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의 삶 가운데서 종종 우리를 낮추시는 작업을 하십니다.

종종 광야를 광야학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광야 학교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낮추시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만했던 요셉을 노예와 죄수의 길을 걸어가게 하심으로 철저하게 낮추셨고, 자기의 힘을 의지했던 모세를 살인자가 되어 도피의 생활을 하게 하심으로써 완전히 낮추셨습니다.

왕이 된 후 스스로 높아졌던 다윗은 살인과 간음자가 되어서 만인 앞에서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념과 의기에 등등하던 바울도 하나님의 철저히 다루심을 통하여 지난 날 배웠던 모든 지식이 배설물처럼 느껴지기까지 낮아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여섯째, 광야는 우리를 주리게 하는 곳입니다.

광야를 지나갈 때에는 깊은 영적 배고픔을 겪게 됩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굶주림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하늘의 만나도 경험하게 하십니다.

광야의 학교를 통하여 하나님은 위로부터 내려지는 양식이 아니면 아무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배고픔을 알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만나를 경험하였습니다.

이렇게 광야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일곱째, 광야는 크고 광대한 곳입니다(8:15).

광야는 광대합니다.

광야는 가도가도 길이 보이지 않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

앞을 봐도 막막한 사막이며 뒤를 봐도 막막한 돌짝밭입니다.

옆을 봐도 끝없는 가시밭과 자갈밭밖에 없습니다.

눈이 닿는 곳까지 쳐다봐도 어디서 이 광야가 끝나는지 아무런 희망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인생의 광야를 걸어갈 때는 마치 이러한 삶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어질 것처럼 우리를 압도해 옵니다.

막막한 광야 한가운데서는 체력의 한계에 쉽게 다다릅니다.

광야는 우리를 지치고 곤비케 하고 낙담케 하는 곳입니다.

여덟째, 광야는 불뱀과 전갈이 있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이 지나갔던 광야는 불뱀과 전갈이 있는 위험한 곳입니다.

광야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이 불뱀과 전갈이 있는 광야를 우리는 어떻게 건너게 될까요?

 

신명기 1: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우리를 안아서 건너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삶은 크리스천의 삶의 모범이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광야를 지나가게 될 것입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다 광야를 지나게 됩니다.

이 광야를 광야학교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광야를 학교라고 부르는 이유는 여기서 우리가 배울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광야는 일시적이라고 뜻이기도 합니다.

광야는 우리에게 유익을 줍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이끄십니다.

광야에서 우리는 어떤 유익을 누리게 될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에 열거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광야로 보내시는 목적이 아닙니다.

이 광야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특별한 배움의 장소입니다.

그래서 광야학교라고 부릅니다.

광야에서 우리의 성품이 준비되어 가게 됩니다.

주님의 성품과 같은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다다를 자, 약속의 땅을 취하여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자로 자라납니다.

광야에서 우리는 옛 삶의 습관들을 버리는 훈련을 통과하게 됩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광야의 상황을 넘어서서 모든 상황을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새로운 삶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광야를 통해서 우리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인생을 깨닫게 됩니다.

 

첫째, 광야는 신령한 음식을 내리시는 곳(8:3)입니다.

광야는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지해 왔던 보이는 양식을 끊어서 주리게 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대신 그들이나 믿음의 선조들조차도 알지 못했던 신령한 만나를 날마다 하늘로서 내려 주셔서 먹게 하셨습니다.

광야는 먹을 것을 찾을 수도, 쌓아 놓을 수도 없는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나는 안식일이 아니면 하루 이상 둘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만나를 먹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광야는 신령한 만나를 통하여 이 세상의 삶의 방식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새 삶의 방식으로 바뀌도록 인도하시는 곳입니다.

오늘은 만나를 먹었는데 만일 내일 만나가 내리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양식이 떨어져 가고 내일 먹을 곳이 없는 상황에서도 그날그날 채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는 곳이 광야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믿음을 가르쳐 주시기 원하십니다.

염려의 문제를 이제는 나의 손에서 하나님의 손으로 옮겨 놓은 법을 가르치기 원하십니다.

살아계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주 불안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제 광야에 있더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하나님이 직접 공급해 주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이 얼마나 실제적으로 역사하시는지 체험케 하시는 학교입니다.

광야의 학교를 올바로 거친 사람은 아브라함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분처럼 신뢰하게 됩니다.

 

둘째, 광야는 반석에서 물을 내신 곳(8:15)입니다.

광야는 목이 마르고 건조한 곳이었지만, 주님이 반석에서 물을 내신 곳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만족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갈하게 하실 때, 또 한편으로 그분은 우리의 영혼을 만족케 할 생명수를 준비하고 계시는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들에게 참된 만족을 주었던 반석이 항상 그들을 따르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 반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1-4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우리를 이렇게 물이 없는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는 영원하고 신령한 생명의 물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4:13, 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셋째, 광야는 불과 구름기둥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곳입니다.

광야에서는 길이 없습니다.

길이 없으므로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과 구름기둥으로 날마다 인도하셔서 더 확실한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어두워서 볼 수 없고, 길과 표지판도 없으며, 사람이 다니지 아니한 곳이기에, 광야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만 의뢰할 수 있는 배움의 터전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막막한 광야 가운데서 구름이 일어나면 그들도 일어나서 떠났습니다.

불기둥이 좌로 가면 좌로 행하고, 머물러 서면 진행을 멈추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시는가를 배웠습니다.

우리도 인생의 광야 한가운데 있을 때에 주님이 동으로 가면 동으로 가고, 주님이 서쪽으로 가시면 서쪽으로 따라가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배워야 합니다.

여기가 아빠와 엄마의 광야입니다.

광야에서는 우리가 가진 능력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넷째, 광야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 주시는 곳(32:10)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채고 보복을 피해 도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광야의 한가운데서 하나님은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무서운 시련과 환란을 만났던 욥도 또한 그 속에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42:5).

모세는 광야 생활을 하는 중에 불붙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광야는 이들을 만나셨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시기 위하여 예비하신 곳입니다.

우리는 광야 가운데 처해 있을 때 주님을 찾게 됩니다.

철저히 낮아져서 전심으로 그의 이름을 부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뼈아프고 가장 외롭고 낮아진 곳에 처해 있을 때 찾아오십니다.

 

다섯째, 광야는 우리를 지키시며 호위하시는 곳(32:10)입니다.

광야의 구덩이와 가장 깊은 사망의 골짜기에서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안위하심을 경험합니다.

시편 기자는 깊은 웅덩이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신뢰하고 감사하는 찬양을 드렸습니다.

 

시편 40:1-3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을 신뢰하기를 원하십니다.

 

여섯째, 광야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행한 가장 귀중한 일은 시내산 아래에서 하나님의 지시대로 그들과 함께 하실 성막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성막과 그 가운데 있는 성소와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교제하신다는 것의 상징입니다.

 

일곱째, 광야는 말씀을 우리 삶에 새겨 주신 곳입니다.

광야는 말씀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성막의 가장 중심이 되는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돌 판에 새겨 주신 하나님의 법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이 지워지지 않도록 돌 판에 새기셔서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영원한 언약의 표징을 삼으셨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광야 학교를 통과할 때도 말씀을 새기십니다.

새 이스라엘로 인치신 우리에게는 돌판이 아니라 바로 마음판에 새기시므로 영원한 새언약을 세우십니다(31:33).

하나님은 광야의 체험을 통해 말씀을 우리 삶에 새기십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될 때, 광야는 더 이상 힘든 곳이 아니라 영원한 축복의 장소로 변화됩니다.

 

여덟째, 광야는 사랑을 가르쳐 주는 곳입니다.

광야는 힘들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서로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광야에서는 모두가 다 어려운 상황에 있기 때문에 서로 짐을 지는 법을 배울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광야를 지날 때는 누구나 다 어려움을 겪게 되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광야의 학교를 올바로 거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법을 배웁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붙드심이 없다면 우리 모두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인 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연약함을 붙들어 주며, 실수를 용납할 줄 알며, 긍휼히 여길 줄을 알게 됩니다.

광야는 서로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하나님이 주신 훌륭한 실습장입니다.

 

아홉째, 광야는 우리를 안아서 인도하시는 곳(1:31)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의 노정에서 우리가 견딜 수 있는 훈련만을 겪게 하십니다.

우리가 정말 걸어가기조차 힘든 상황을 만나면 그는 우리를 안아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깨달아 안다면 아무리 험한 광야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 안에서의 깊은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발자국이라는 무명의 시인이 지은 시가 있습니다.

이 시에는 이런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꿈을 꾸었는데, 그 꿈 속에서 그는 주님과 함께 바닷가를 따라 걷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하늘을 가로질러서 자기가 그 동안 살아온 삶의 장면들이 하나씩 지나갔습니다.

각 장면마다 그는 모래 위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나란히 새겨진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그의 것, 또 하나는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이 그의 앞에 펼쳐지며 지나갈 때 모래에 찍힌 그 발자국들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는 그의 삶의 노정 가운데 오직 한 사람의 발자국만이 찍혀 있는 순간들이 여러 번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들은 바로 자기의 생애 중에 가장 힘들고 슬펐던 때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음에 의문이 생겨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당신은 내가 주님을 따르기로 결정했을 때, 나와 언제나 함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지요. 그런데 나의 삶의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그때 왜 한 사람의 발자국밖에 없습니까? 당신은 왜 내가 가장 당신을 필요로 했을 때, 나를 혼자 내버려 두셨습니까?”

주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내 아들아, 나의 귀한 아들아, 나는 너를 사랑했고, 한 번도 너를 떠난 적이 없었단다. 너의 환란과 어려움의 때에, 오직 한 사람의 발자국만 보이는 그때 나는 너를 안고 지나갔었단다.”

이렇게 광야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광야는 힘들고 어렵지만, 광야를 통해서 말씀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광야 학교는 배움의 장소인 동시에 시험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학교를 싫어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시험 때문입니다.

시험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지만 시험이 없다면 얼마나 잘 배우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위해 위대한 꿈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꿈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는 우리 안의 방해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런 방해요소들이 제거되어야만 합니다.

광야를 지나면서 이 방해요소들이 제거됩니다.

시험은 이 방해요소들이 잘 제거되었는지 알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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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3장 18-20절  (0) 2015.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