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내가 사랑한 시

비극(정지용)

기독항해자 2013. 11. 29. 21:50



 

비극


                                                                                                    정지용

「비극」의 흰 얼굴을 뵌 적이 있느냐?

그 손님의 얼굴은 실로 미(美)하니라.

검은 옷에 가리워 오는 이 고귀한 심방에 사람들은 부질없이 당황한다.

실상 그가 남기고 간 자취가 얼마나 향그럽기에

오랜 후일에야 평화와 슬픔과 사랑의 선물을 드고 간 줄을 알았다.

그의 발옮김이 또한 표범의 뒤를 따르듯 조심스럽기에

가리어 듣는 귀가 오직 그의 노크를 안다.

묵(墨)이 말라 시가 쓰여지지 아니하는 이 밤에도

나를 맞이할 예비가 있다.

일찌기 나의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드린 일이 있기에

혹은 이 밤에 그가 예의를 갖추지 않고 올 양이면

문밖에서 가벼이 사양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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