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과 삶/크리스천과 독서

인생수업(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데이비드 케슬러, 류시화, 이레)

기독항해자 2013. 9. 5. 08:27

인생수업(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데이비드 케슬러, 류시화, 이레), 2013년 9월 4일(수)


살고 사랑하고 웃으라.

그리고 배우라.

이것이 우리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다.

삶은 하나의 모험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 가슴 뛰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1.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갑자기 더 행복해지거나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 더 평화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도 당신이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당신만의 여행이다.

삶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수업과 같다.

그 수업들에서 우리는 사랑, 행복, 관계와 관련된 단순한 진리들을 배운다.

오늘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삶의 복잡성 때문이 아니라, 그 밑바닥에 흐르는 단순한 진리들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때, 우리는 더 많이 성장한다.

조건이 가장 나쁠 때, 오히려 자신이 가진 최상의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배움을 통해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진정한 자신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인간적인 자아를 존중하는 것을 말한다.

때로 감추고 싶은 자아의 어두운 부분까지도 포함해서.

우리는 흔히 사람들이 선한 마음에 이끌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진정한 인간의 모습에 이끌리는 것이다.

2. 사랑 없이 여행하지 말라

삶의 이 여행을 하는 동안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당신의 임무는 사랑을 찾는 일이 아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스스로 만들어 놓은 사랑의 방해물을 찾아내는 일이다.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은 사랑에서, 삶에서, 그리고 죽음의 순간까지도 가장 중요한 일이다.

사랑

사랑, 정의 내리기조차 매우 힘든 이것은 삶에서 유일하게 진실하고 오래 남은 경험이다.

그것은 두려움의 반대말이고, 관계의 본질이며, 행복의 근원이다.

또한 우리 자신을 이루고 있는 가장 깊은 부분이고, 우리 안에 살면서 우리를 연결해 주는 에너지이다.

사랑은 지식, 학벌, 권력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사랑은 모든 행위 너머에 있다.

또한 삶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유일한 선물이다.

결국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환상과 꿈, 공허함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사랑은 진실의 근원이다.

사랑에 대한 조건은 관계를 무겁게 짓누른다.

그런 조건들에서 벗어난다면 생각지도 못한 다양한 방식으로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그 사랑이 되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우리는 사랑의 감정이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우리가 받는 사랑을 일일이 계산한다면 결코 사랑받는다고 느끼지 못할 것이며 언제나 손해 본다는 기분이 들 것이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주위에 언제나 있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장벽을 없애는 것이다.

자기 주위에 세워 놓은 장벽들을 감지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장벽들은 엄연히 그곳에 있고 우리의 모든 관계에 개입한다.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3. 관계는 자신을 보는 문

사람과의 관계에서 때로 텅 빈 공간이 되라.

다른 사람이 지나다니게 하라.

자신 안에서 세계의 영혼을 발견하고, 인간 안에서 신의 정신을 보라.

그것이 진정한 관계이다.

삶은 거울과 같다.

삶에 미소 지으라.

그러면 삶이 당신에게 미소 지을 테니까.

전 생애동안 우리는 많은 이들과 관계를 맺는다.

배우자나 연인, 친구처럼 우리가 선택해서 맺는 관계도 있고 부모나 형제처럼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정해진 관계도 있다.

그 관계를 통해 우리는 배움을 얻는다.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두려워하며 진정한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 깨닫는 기회를 갖는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든, 완벽한 배우자와 결혼을 했든 혼자 살든, 당신은 이 세상에 소중하고 독특한 선물이다.

외부적인 어떤 일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이, 당신은 이미 완전한 사람이다.

그 해답은 낭만적인 사랑에 있지 않다.

당신의 삶에 더 많은 사랑을 원한다면, 당신의 삶과 사랑에 빠져야 한다.

관계는 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자신이 바라는 인물이 아니라고 해서 관계를 깨뜨릴 수도 없다.

모든 관계는 상호 작용이다.

곧 관계속에서 서로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다.

같은 것이 같은 것을 끌어당기듯, 우리는 자신이 갖고 있는 것에 매력을 느낀다.

관계에 실수란 없다.

모든 것은 정해진 대로 일어난다.

첫 만남에서 마지막 작별 인사까지, 우리는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관계를 통해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보고, 그 과정에서 상처를 치유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사랑하는 관계에서 자신이 미리 갖고 있는 수준을 버릴 때, 누구를 얼마나 사랑할 것인가의 문제에서도 해방될 수 있다.

신에게 선물 받은 위대한 사랑을 찾기 위해서는 이런 한계들을 뛰어넘어야 한다.

4. 상실과 이별의 수업

당신은 아름다운 정원에 앉아 있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고통속에 있다면, 만일 당신이 상실을 경험한다면, 그로 만일 당신이 모래에 묻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아주 특별한 목적으로 당신에게 주려는 선물로 여긴다면 당신은 성장할 것이다.

이 세상이 하나의 학교라면, 상실과 이별은 그 학교의 주요 과목이다.

상실과 이별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필요한 시기에 우리를 보살펴 주는 사랑하는 이들, 또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손길을 자각하기도 한다.

상실과 이별은 우리의 가슴에 난 구멍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이끌어 내고 그들이 주는 사랑을 담아 둘 수 있는 구멍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삶이 곧 상실이고 상실이 곧 삶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평생 상실과 싸우고 그것을 거부한다.

상실 없이 삶은 변화할 수 없고, 우리도 성장할 수 없다.

옛 유대 격언에도 ‘많은 결혼식에 가서 춤을 추면 많은 장례식에 가서 울게 된다’는 말이 있다.

이는 당신이 많은 시작의 순간에 있었다면 그것들이 끝나는 순간에도 있게 된다는 뜻이다.

만일 당신에게 친구가 많다면, 그만큼의 이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죽음을 포함한 모든 상실의 과정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다섯 단계의 반응은 삶에서 겪는 모든 크고 작은 상실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첫 번째 반응은 부정이다.

두 번째 반응은 분노이다.

세 번째 반응은 타협이다.

네 번째 반응은 절망이다.

다섯 번째 반응은 수용이다.

모든 사람이 상실에 대해 매번 이 다섯 단계를 모두 거치지는 않으며, 반응이 항상 순서대로 나타나지도 않다.

또는 한 단계를 반복적으로 겪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매번 여러 가지 형태로 상실을 경험하며 그것에 반응한다.

이렇게 축적된 상실의 경험은 삶에 더 잘 대처할 수 있는 힘이 된다.

5. 아직 죽지 않은 사람으로 살지 말라

죽음에 도달하는 순간 모두 제로가 된다.

삶이 끝에서 아무도 당신에게 당신이 얼마나 많은 학위를 가졌으며, 얼마나 큰 집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좋은 고급차를 굴리고 있는지 묻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죽어가는 사람들이 당신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의 진정한 힘은 사회적 지위나 넉넉한 은행 잔고, 번듯한 직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진실하고 강인한 그리고 고귀한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들 각자는 우주의 근본적인 힘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사람들은 힘으로 충만해 있고 자연도 힘으로 가득 차 있다.

씨앗은 꽃으로 피어나고 날마다 태양은 하늘을 가로지른다.

우리 안에 우리 자신으로부터 생명이 잉태되는 것을 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스스로에 대해서는 이 모든 힘과 상관없는 존재로 생각한다.

신은 이런 힘을 자연에게만 주고 인간은 나약하게 만들지 않았다.

부와 가난은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스스로를 부자라고 생각하는 가난한 이들이 있는 반면,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부자들이 있다.

가난한다는 것은 스스로 가난하다고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돈이 바닥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상태이다.

돈이 호주머니를 드나드는 것과 상관없이 자신이 언제나 가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함으로써 스스로를 무가치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부유하게 생각하는 것은 가난하게 생각하는 것의 정반대이다.

자신의 가치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진정한 부의 출발이다.

어떤 이들은 물질을 가치 있게 여긴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단, 우리가 손에 넣는 어떤 물질보다도 우리 자신이 더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돈이 우리에게 힘을 줄 거라고 믿듯이 다른 사람들과 상황을 지배할 수 있게 되면 힘을 얻을 것라고 흔히들 생각한다.

많이 지배할수록 더 많은 힘을 갖게 된다고 여긴다.

자기가 앞장서서 모든 것을 통제하지 않으면 온통 혼란에 빠질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일상 생활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통제 능력이 필요하다.

문제는 정도를 벗어나 과도한 권력을 행사하려 들 때 생겨난다.

그때 우리를 강해지기는 커녕 오히려 불행해진다.

더 많은 통제를 움켜쥘수록 그 힘을 통제불가능한 것에까지 쏟아 붓기 때문에 삶의 질은 떨어진다.

더 많은 돈을 소유하거나 더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외부 환경을 더 잘 통제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힘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일시적인 영향력일 뿐이다.

육체, 직장, 돈, 아름다움 등 우리가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것들은 외면적인 힘의 상징이다.

감사

감사할 줄 아는 사랑이 강한 사람이다.

감사하는 마음에서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모든 여유로움은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진정한 힘과 행복은 감사하는 마음이 그리는 미술 작품 속에 있다.

자신이 현재 가진 것에 감사하는 일,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감사하고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갖고 나온 것에 감사하는 일.

자신의 독특함에 감사하는 일.

백만년이 흐른다 해도 당신과 똑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당신과 똑같은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바로 곁에 있는 사람들과 물건들에 감사하지 못한다면 나중에 더 많은 물건들과 더 많은 사람들, 더 많은 힘을 갖게 된다고 감사할 수 있을까요?

한번도 감사의 근육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당신은 모든 것을 얻게 되어도 감사하지 못할 것이다.

죄의식

죄의식은 우리를 가장 어두운 내면에 묶어 둔다.

그것은 우리의 나약함, 수치심, 냉정함과 연결한다.

우리의 부정적인 부분이 그 죄의식을 먹고 자란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역시 죄의식을 키우는 자양분이다.

죄의식을 느낄 때 우리의 마음은 좁아지고 하찮은 생각들에 사로잡힌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수치심을 느낀다.

이것을 치유하려면 활발히 행동하고 그 감정을 다른 사람과 나눠야 한다.

진정한 자아는 죄의식을 알지 못한다.

진정한 자아는 이 세상의 죄의식을 초월해 있다.

수치심과 죄의식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수치심은 과거의 죄의식에서 생겨난다.

죄의식은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가에 대한 것인 반면, 수치심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감정이다.

의식 속에 자리잡은 죄의식은 영혼을 공격하는 수치심으로 변한다.

6. 가슴 뛰는 삶을 위하여

변화는 지금까지의 익숙한 상황에 작별을 고하고 새롭고 낯선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때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그 상황의 낯설음이나 익숙함이 아니라 그 중간에 존재하는 시간이다.

유방암을 두 차례나 이겨 낸 작가 로니 카예는 “삶에서 하나의 문이 닫히면 언제나 다른 문이 열린다. 그러나 그 사이의 복도는 매우 좁고 길다”라고 말했다.

변화는 대개 지금까지의 문이 닫히는 것을 시작되는데, 그 문들의 이름은 끝, 완성, 이별, 죽음 등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불안정한 시기 속으로 들어간다.

이 시기는 닫혀진 문을 보고 슬퍼하는데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확실한 시기이다.

이 시기가 가장 힘이 드는 때이다.

그러나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고 느끼는 바로 그때 새로운 일이 일어난다.

새로운 시작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변화에 맞서 싸운다면 평생 싸움만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를 껴안는 방법, 아니면 적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발견해야만 한다.

청춘은 순수의 시기인 무지의 시기이다.

아름다운 시기이면서 도이에 고통스러운 자의식의 시기이다.

모험의 시기이면서, 또 그만큼의 어리석음의 시기이다.

많은 이들에게 젊은 시절의 꿈은 늙은 시절의 후회가 된다.

삶이 끝나가기 때문이 아니라, 그 꿈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멋지게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하루를, 그리고 하나의 계절을 온전히 경험한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삶을 산다면, 우리는 그날들을 다시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후회를 가져다 주는 것은 살지 않은 삶이다.

두려움

두려움은 가장 원초적인 단계에서 우리를 지켜 주는 경고 체계 역할을 한다.

밤늦게 시내의 위험 지역을 걸을 때 두려움은 위험 가능성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라고 우리에게 경고한다.

위험이 잠재된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건강하다는 신호이다.

그런 두려움이 없다면 오래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 위험이 없는 곳에서도 두려움을 갖기 쉽다.

그런 두려움은 만들어진 것이며 사실이 아니다.

진짜처럼 느껴지지만 아무런 현실적 근거도 없다.

그럼에도 그것은 수시로 찾아와 우리의 삶을 방해한다.

그 두려움은 목적도 자비심도 없어 보인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고 정신을 병들게 한다.

두려움이란 ‘실제처럼 보이는 가짜 증거’(False Evidence Appearinr Real)의 약자이다.

이런 종류의 두려움은 과거의 경험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미래의 두려움의 원인이 된다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낸 이런 두려움은 한 가지 좋은 역할을 한다.

곧 우리에게 사랑을 선택하도록 가르쳐 준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성장과 치유의 갈망이다.

이는 또 다른 선택의 기회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기 위한 선택, 두려움 대신 사랑을, 환상 대신 현실을, 과거 대신 현재를 선택하기 위한 기회이다.

7. 영원과 하루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가장 후회하는 것은 ‘삶을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별의 순례자이며, 단 한 번의 즐거운 놀이를 위해 이곳에 왔다.

화를 내는 것은 정상적인 반응이며 알맞은 시간과 장소에서 적절하게 표현할 때는 매우 쓸모가 있다.

화를 낸다는 것은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상처가 현재의 고통인 반면, 화를 가끔씩 찾아오는 고통이다.

화를 안으로 삭일 때 그것은 종종 우울증이나 자기 비난으로 표현된다.

놀이

우리는 삶을 누리고 놀이를 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것도 일평생 동안, 흔히들 잘못 생각하고 있지만 놀이는 아이들만의 소일거리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생명 가진 존재의 생명력이다.

놀이는 마음을 젊게 하고, 일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며 인간관계를 잘 맺게 해준다.

놀이는 삶을 가장 충만하게 사는 방법이다.

놀이는 모든 한계를 초월해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이다.

놀이는 내면의 기쁨이 바깥으로 표현된 것이다.

웃음, 노래, 춤, 수영, 등산, 요리, 달리기, 게임 등 즐거움을 주는 것이면 무엇이든 놀이가 될 수 있다.

웃음

웃음은 저절로 채워지는 약과 같다.

웃음은 웃을수록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8. 무엇을 위해 배우는가

인내

인내심의 열쇠는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믿음, 인간이 모르는 큰 계획이 존재한다는 신뢰를 키우는 데 있다.

이것은 잊어버리기가 쉽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계획에 맞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면 당황하며 어떻게든 상황을 통제하려 한다.

당신이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곧 모든 일이 나름의 질서에 따라 진행된다는 사실을 믿고 이해하기 전까지는 당신은 삶에서 어떤 것도 제대로 경험할 수가 없다.

삶은 경험의 연속이며, 우리 모두는 그 경험들을 통과해야만 한다.

비록 우리가 보지 못할지라도 모든 경험에는 원인이 있고 목적이 있다.

모든 사건은 우리에게 필요한 배움을 주기 위해 일어나는 것이다.

성급하게 “난 싫어! 바꾸고 싶어!”하고 소리친다면 그런 배움을 얻기는 어렵다.

때로는 거부하고 불평하고 상황을 바꾸려고 시도하는 대신, 그 상황에 다만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다.

모든 경험은 당신을 치유해 주고, 더 나은 인간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더 많은 인내심을 갖는 첫 번째 단계는 상황을 고치거나 바꾸고 싶은 욕구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그렇게 보이지 않고 또 볼 수 없을지라도 어떤 일들은 이유가 있어서 일어난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상황을 바꿀 수 없다고 해서 최악이라고 여기지는 말아야 한다.

일이 일어나고 전개되는 과정을 신뢰해야 한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기적적인 일들은 대부분 우리의 도움이나 간섭, 지원 없이도 일어난다.

인내심을 갖는다는 것은 신뢰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신뢰하는 마음과 함께라면, 당신은 어떤 일도 목적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삶의 종착점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겪은 나쁜 경험조차도 후회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로부터 배움을 얻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겪은 모든 일, 인생의 거센 폭풍이 지금의 당신을 만들어 냈다.

일이 너무 빠르거나 느리게 진행되어 불안하다면 세상의 모든 일은 정확한 시간에 일어나며, 하나의 큰 계획 속에 움직인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받아들임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상황을 인정하려 들지 않으면 우리는 지치게 되고 그나마 남아 있는 힘과 마음의 평화마저 잃게 된다.

평화를 느끼지 못한다면 삶에 순응할 때이다.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받아들일 때이다.

모든 일을 책임져야 한다고 느낀다면 받아들여야 할 때이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고 싶다면 순종할 때이다.

어떤 일을 이루려는 욕망으로 끊임없이 분투하는 대신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우리 자신에게 베풀 수 있는 멋진 선물이다.

삶을 되돌아본다면, 가장 중요한 순간과 멋진 기회들이 반드시 당신이 세워 놓은 계획과 노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9. 용서와 치유의 시간

용서의 첫 단계는 상대방을 다시 인간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들은 실수투성이고 부서지기 쉽고 외롭고 궁핍하고 정서적으로 분완전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우리 자신과 똑같다.

그들 역시 오르막길과 내리막길로 가득한 인생 길을 걷고 있는 영혼들이다.

용서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하다.

용서는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이며, 우리를 다른 사람과 연결하는 방법이다.

우리 모두는 상처를 받는다.

문제는 상처를 입는 것이 아니라, 상처 입힌 사람을 용서할 수 없거나 용서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계속 아프게 하는 상처이다.

용서의 선택권은 상처를 입힌 사람보다 상처를 받은 사람에게 더 중요한 이기적인 행동이다.

용서하지 않을 때, 우리는 오래 된 상처와 분노에 매달린다.

용서하지 않을 때, 자기 자신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용서는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해서나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나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행복

진정한 행복은 어떤 사건의 결과가 아니며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다.

당신의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닌 바로 당신이다.

행복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가 아니라, 일어난 일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달려 있다.

행복은 일어난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고, 인식하고, 그 전체를 어떤 마음 상태로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10. 살고 사랑하고 웃어라

상실은 무엇이 소중한지 보여주며, 사랑은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가르쳐 준다.

관계는 자신을 일깨워주고 성장의 기회를 가져다 준다.

두려움, 분노, 죄책감조차도 훌륭한 교사이다.

삶의 가장 어두운 시간에도 우리는 성장하고 있다.

삶은 그 특별한 매력을 나타내기 위해 굴곡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