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성서지리

바벨론

기독항해자 2013. 5. 16. 14:55

바벨론

인류 역사 속에서 바벨론만큼 사람의 마음을 매료시키는 도시도 없을 것이다. 바벨론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부와 영광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상상을 초월하는 돈과 보석이 그곳에 있었다.

이처럼 풍요로운 도시로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가 풍부한 삼림자원이나 광산으로 둘러싸인 은혜로운 자연조건을 가졌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바벨론은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는 낮고 건고한 계속에 위치해 있었다. 바벨론은 삼림도, 광산도, 건설에 사용할 석재도 없었다. 천혜의 무역로에 위치한 것도 아니고 농작물이 잘 자랄 만큼 비가 충분히 오는 지역도 아니었다.

바벨론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사용해서 대업적을 이루어내는 인간 능력의 최선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도시를 지탱하는 모든 자원을 인간이 개발했으며, 풍요로움도 인간이 만들어냈다. 천연자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비옥한 토양과 강물뿐이었다.

바벨론의 기술자는 역사상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우수한 기술력을 댐과 대운하로 강물을 끌어들였다. 운하는 건조한 계곡의 반대편까지 물을 운반하여 척박한 대지에 생명을 잉태하는 물을 공급했다. 역사상 최초의 공학적 업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바벨론에서 풍부한 농작물을 수확할 수 있었던 것도 세계 최초의 관개 시설인 운하 덕분이었다.

바벨론에는 오랜 동안 침략과 정복을 거듭한 왕들의 계보가 있다. 그들은 많은 전쟁을 치뤘지만, 대부분이 재산을 노리고 침략해 오는 탐욕스러운 적들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다. 바벨론의 유명한 왕들은 뛰어난 지혜와 위대한 업적, 그리고 공평함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려는 전제군주는 없었다.

바벨론이라는 도시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수 천 년 동안 도시를 지탱하던 정열적인 시민들이 모습을 감추자 도시는 곧 폐허로 변했다.

유적은 페르시아 만의 북쪽, 수에즈 운하에서 동쪽으로 960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다. 위도는 애리조나 주의 유마와 거의 비슷한 북위 36도 부근이며 기후도 유마와 비슷해서 덥고 건조하다.

예전에는 인구 밀도가 높은 관개농업 지역이었던 유프라테스 계곡도 지금은 황량한 황무지로 변해, 모래 바람 속에 풀과 나무가 듬성듬성 자라고 있을 뿐이다. 비옥한 토지도, 대도시도, 사치스러운 물건을 가득 실은 카라반의 긴 행렬도 더 이상 없다. 약간의 가축을 키으며 근근이 살아가는 아라비아 유목민만이 이곳의 유일한 주민들이다. 이것은 기원 후 변하지 않는 것 중의 하나다.

이 계속에는 모래 언덕이 여러 군데 있다. 몇 세기 동안 여행자들은 이 모래 언덕에 눈길도 주지 않았는데, 강풍과 폭우로 인해 도기와 기와의 파편들이 출토되자 고고학자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서구 박물관의 지원을 받아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고 얼마 안 가서 이 언덕들이 고대 도시의 유적이었음이 밝혀졌다.

바벨론은 고고학자들이 '도시들의 무덤'이라고 부르는 것 중 하나다. 2천년전 간 두터운 모래층이 그 위를 덮고 있었던 것이다. 성벽은 원래 벽돌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시 흙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풍요의 도시' 바벨론의 현재 모습이다.

많은 학자들이 이 계곡에 위치한 도시 국가를 세계에서 가장 오랜된 문명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확정된 연대는 8천년전, 즉 기원전 6천년이다. 이 연대를 결정하는데 사용된 방법이 참으로 흥미롭다.

바벨론의 유적 중에 일식에 관한 기록이 발견되었다. 천문학자들잉 바벨론의 일식 관측 연대를 계산하여 그들의 달력을 현대의 달력으로 환원하는 작업에 성공했다. 이 달력을 이용해서 8천년전에 바벨론에 성벽을 가진 도시가 존재했었음이 판명되었다.

그곳에 살던 주민들은 그저 성벽이나 쌓고 살던 야만인들이 아니었다. 교양과 지혜를 겸비했던 그들은 역사상 최초의 엔지니어, 천문학자, 수학자, 금융학자들이었으며 문학을 가진 최초의 민족이었다.

불모의 계곡을 농업의 낙원으로 바꾼 관개시설에 관해서는 이미 언급했다. 대부분은 두꺼운 모래 묻혀버렸지만 지금도 대운하의 흔적이 희미하게마나 남아 있다. 말 열두마리가 동시에 달릴 수 있을 정도의 폭에, 규모를 콜로라도와 유타의 쵀대 규모의 운하와 비슷하다.

바벨론의 엔지니어들은 계속에 관개수로 공사를 하는 외에도 비슷한 규모의 공사를 해냈다. 정교한 배수 시스템으로 유프라테스-티그리스 강 하구의 광대한 습지를 간척했다.

그리스의 여행자이자 역사가인 헤로도토스는 화려한 시절의 바벨론을 방문했는데. 이는 외부인의 눈으로 본 바벨론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다. 그는 이 도시와 주민들의 특이한 풍속, 비옥한 토양과 그 토양에서 자라는 풍부한 밀과 보리에 대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바벨론의 영광은 사라졌지만 그들의 지혜는 지금도 살아 있다. 그들이 기록을 해두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먼 옛날에는 종이가 없었다. 그 대신 습기를 머금은 점토판에 글을 새겼다. 글을 새긴 점토판을 불에 구워 딱딱한 타일 상태로 만들었다. 점토판의 크기는 가로 15센치, 세로 20센치이며 두께는 2.5세치미터 정도다. 

이 점토판은 지금의 종이처럼 널리 사용되었다. 전설, 시, 역사, 왕의 칙령, 법률, 자산 목록 등을 기록하고, 계약서를 작성하거나 먼 곳에 보내는 편지 등에 사용했다. 우리는 이 점토판에서 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어느 가게 주인의 기록에는 날짜와 실제 이름이 적혀 있다. 예를 들면 점토판에는 손님이 암소 한 마리를 밀가루 일곱 자루와 교환했는데, 세 자루는 직접 들고 가고 나머지 네 자루는 원하는 날짜에 배달하기로 했다는 내용 등의 적혀 있다. 이와 같은 점토판 책이 도시의 폐허에서 만 개나 발굴되었다.

바벨론에서 경이로운 것 중의 하나는 도시를 에워싸고 있는 성벽이다. 고대인들은 그것을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함께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했다. 전설에 의하면 세미라미스 여왕이 처음으로 성벽을 건설했다고 하는데 그 흔적은 발굴되지 않았고 정확한 높이도 알려진 바가 없다. 고대의 기록을 보면 높이는 15~18미터이고 구운 벽돌이 붙어 있었으며 주위는 깊은 해자가 둘러싸고 있었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 유명한 성벽은 기원전 600넌 정도에 나보폴라사르 왕이 쌓기 시작한 것이다. 나보폴라사르 왕은 대규모의 재건 사업을 시작했지만 그것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는데, 구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그의 아들인 느부갓네살 왕이 사업을 계승했다.

이 성벽은 믿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규모였다. 신뢰할 수 있는 권위자에 의하면 높이는 지금의 15층 건물에 필적하는 50미터 정도고, 길이는 14~17킬로미터에 이르렀으며 성벽의 폭은 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가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넓다고 하는데, 지금은 성벽의 기초 일부와 해자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풍화 작용 때문이기도 하고 아랍인들이 다른 건물을 지으려고 벽돌을 떼어내 지금은 거의 파괴된 상태다.

당시 대부분의 정복자들이 바벨론을 함락시키려고 했지만 그들이 아무리 바벨론을 공격해도 성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당시의 군사력을 우습게 보면 안 된다. 역사가들은 당시의 군사력이 기병 1만 명, 전차 2만5천대, 보면 연대 1천100개(연대당 천명)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원정에 필요한 군수물자와 식료품을 모으는 기간만 2.3년씩 걸리기도 했다고 한다.

바벨론은 오늘날의 도시와 마찬가지로 운명되고 있었다. 도로와 상점이 있었으며 행상을 하는 사람들은 골목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았다. 사제들은 장엄한 신전에서 일했다. 도시 한가운데는 왕궁이 있는 성역이 있었는데 왕궁의 담은 도시를 감싸고 있는 외벽보다 높았다고 한다.

바벨론 사람들은 예술적으로도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조각, 회화, 자수, 금속 공예가 발달했고 금속으로 만든 무기나 농기구를 생산했다. 예술성 높은 보석 세공품들이 부유한 사람들의 무덤에서 출토되어 세계 주요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다른 민족들이 나무 도끼로 나무를 베고, 흑요석으로 만든 화살촉으로 전쟁과 사냥을 하고 있을 때, 바벨론에서는 금속으로 제작한 도끼와 화살을 사용했다. 바벨론 사람들은 머리가 비상한 금융업자이자 무역상들이기도 했다. 우리가 아는 한 교환수단으로서의 돈과 계약서, 부동산 증서를 세계 최초로 발명한 이들이 바로 바벨론 사람들이다.

바벨론은 기원전 540년 무렵까지 무패행진을 이어가다가 한순간에 어이없이 몰락해버렸다. 당시의 대정복자 중 한 사람인 키로스 왕이 무적의 바벨론 성벽을 함락시키려고 했다. 바벨론 왕이 나보니도스의 신하들은 키로스가 공격을 개시하기 전에 먼저 출정을 해야 한다고 왕에게 진언했지만 우물쭈물하다가 바벨론 군은 패했고, 키로스 왕은 활짝 열린 문으로 입성해서 어렵지 않게 바벨론을 손에 넣었다.

바벨론의 힘과 명성은 사라졌다. 모두 도시를 떠나 황폐해졌고 결국은 아무것도 없던 최초의 상태로 돌아가고 말았다.  

바벨론은 두 번 다시 부활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문명은 오늘날 우리 문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출처:연금술, 조지 사무엘 클라슨, 북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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