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과 삶/경건서적산책

희망의 사람들 라르슈(장 바니에, 김은경, 홍성사)

기독항해자 2012. 10. 24. 20:35

희망의 사람들 라르슈(장 바니에, 김은경, 홍성사), 2012년 10월에 읽음



사람은 혼자 살 수가 없다. 사람은 함께 살 수밖에 없도록 지음을 받았다. 우리는 함께 더불어 살면서 서로를 채워가며 완성되어 가도록 창조된 존재들이다. 우리 공동체 안에 있는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 고통받는 사람들이 우리를 완성시키는 존재들이다. 우리가 그들을 무시할 때, 우리는 결코 완성될 수가 없다. 우리가 소외된 자들을 직시할 때만 우리는 완성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만 완성할 수가 있다. 희망의 사람들 라르슈에서 그 희망을 본다.


1. 예수를 따르는 삶

예수를 따르라

나는 발언권이 없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사에서 소외되어 버려진 채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 이들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복음에서조차 격리되어 있을 때도 너무나 많습니다.

와서 나를 따르라

나는 정신병원들을 방문하여 정신지체 장애인들의 고통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알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네 세상에서 가장 억압당하는 존재입니다. 그들에게는 발언권이 없습니다. 그들은 많은 두려움과 몰이해를 불러 일으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원치 않습니다.

라르슈가 시작되다

나는 일을 잘할 줄 알았고, 어떤 것을 계획하고 운영하고 가르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내게 바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라는 것은 본질적인 것, 즉 함께 머물며 관계를 맺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라르슈가 커 나가다

우리의 목적은 무엇보다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열린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또 다른 게토가 될 수 있는 자급자족 공동체를 만들지 않으려고 합니다.

‘믿음과 빛’ 운동

‘믿음과 빛’은 정신지체 장애인들이 있는 모습 그대로 환영받고 인정받는 우정과 화합의 장이며, 그들의 은사뿐 아니라 진정으로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있고 우리를 더 큰 평화와 사랑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는 장입니다.

가장 가난한 이들의 은사

정신지체 장애인들과 함께 사는 가운데 그들의 연약함과 고통의 크기뿐 아니라 그 마음의 아름다움과 섬세함을 알아가면서, 나는 복음이 우리에게 밝혀 주는 무한히 큰 존재와 무한히 작은 존재 사이의 친밀감, 곧 하나님과 가장 가난한 자 사이의 친밀감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의 한계와 어두운 부분들과 근본적인 궁핍함을 보게 합니다. 그것이 그토록 자주 우리가 그들을 무시하고 배척하고 가두려 하는 이유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외면하게 되며, 우리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를 그들이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지 못하게 만듭니다.

나에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이 숨어 계신 연약한 자와 가난한 자 사이로 그분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2. 공의를 행하는 삶

희망이 있을 때에만 우리는 기다린다. 희망이 없으면 생기 없이 슬퍼하며 죽음을 산다.

고통의 부르짖음

정신지체 장애인은 아무도 자신을 원치 않는다고 느낄 때 몸이 굳어지면서 방어적인 자세를 취합니다. 현실을 직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를 외부로부터 차단해 버립니다. 그는 일종의 내적인 죽음을 경험합니다. 생명은 더 이상 순환하지 않습니다. 그의 내적인 동요가 그가 평화롭게 자라나는 것을 방해하며, 그의 뇌와 언어와 모든 정신의 발달에 영향을 끼칩니다. 심지어 정신적 실재의 어떤 부분들은 활동이 정지되어 더 이상 발달할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존재의 분열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가치 있는 존재인가? 나에게 관심을 갖고 나와 관계를 맺으며 살 만큼 나를 충분히 믿어 주는 사람이 있는가?’

이것은 애정을 나누며 서로 인정해 주는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인간의 외침입니다. 애정을 호소하는 이 외침에는 서론 공존할 수도 없으면서도 공존하고 있는 세 가지 다른 형태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이것은 약함을 돌보아 줄 줄 아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외침입니다. 이것은 어린아이의 연약함이나 청소년의 불안에서 터져 나오는 외침이며, 애정과 환영, 친절과 긍휼, 지원과 교육, 그리고 격려를 필요로 하는 정신지체 장애인의 외침입니다.

또한 이것은 모든 인간의 외침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연약함과 어려움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누군가에게 사랑받기 위해 부르짖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외침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친구나 동반자, 형제나 자매를 찾으려는 외침이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사랑받는 어린아이’로만 머물러 있을 수 없으며, 공동체적 삶 속에서 사랑을 주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친구요 형제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정을 찾으려는 갈망은 사랑과 결혼을 위한 배우자를 찾는 외침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나보다 더 연약한 자의 친구가 되어 그들을 섬겨 달라는 부르짖음이 있습니다.

마르지날(주변인)은 마음속에 자신의 깨어진 모습을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가 마르지날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깨어진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은 절망의 경계선 아주 가까이에 살고 있거나, 모든 열정과 창의력을 가로막는 일종의 슬픔에 매우 근접하여 살아가곤 합니다. 우리 안에는 죄악이나 영적·도덕적 가난으로 말미암아 깨어진 형상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없는 이들일 수도 있고

배고픈 이나 집 없는 이, 일자리 없는 이,

버림받은 이들일 수도 있으며

불구와 장애와

겉으로 보기에 쓸모 없다는 이유로 밀려난 채

사랑과 용납을 갈망하는 이들일 수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죄 가운데 살면서도

죄에서 풀려나기를 갈망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따르지 못해

죄책감을 느낍니다

가난한 사람은 우리 가운데서

슬프고 외롭고 사랑받지 못하는 모든 이들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공허함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음의 상처를 고쳐 주고

평안을 가져다줄

구원자를 애타게 기다립니다.


우리에게는 성령의 역사 안에서 죽기까지 충성할 새로운 세대의 남녀가 필요합니다. 그드른 대가족이 주는 안위와 물질적 부요와 안락함이 주는 안위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사람들이어야 하며, 자기 조국이나 더 심각한 재난을 겪고 있는 다른 나라에 진리와 평화와 사랑의 영을 전파하기 위해 그 모든 안위를 내던지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환영과 일치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전하러 오셨습니다. 그분에게는 이 시대를 위한 놀라운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의 가치와 부와 권세와 야망을 구하지 말고 화평을 구하라

네가 지금 있는 그 자리에 머물라

그러면 내가 네게 화평을 주리라

네가 화평 가운데 성장하며 소박하고 가난한 생활과 복음적인 삶 속에서 성장하면,

나는 네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을 줄 것이며

너는 온유의 무기를 들고 의를 얻을 것이다

나는 네게 새 힘. 생명의 능력을 주겠다

그 능력은 무엇보다 긍휼로 나타날 것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

너는 가장 낮고 가장 비천하고 가장 천대받는 사람들

감옥에서 나온 사람들

정신병원에 있는 사람들

노인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라

중요한 것은 그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귀 기울이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긍휼을 요약한 것이다

긍휼은 그들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줌으로써 그들에게 자유를 주는 일이다

네가 귀 기울일 때 그들은 스스로 중요한 존재라고 느낄 것이다

네가 귀 기울일 때 너는 그들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며

그들이 자유에 도달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너는 평화의 되어 평화를 창조하게 될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마음을 열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들의 고통과 선물에 귀 기울이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두려워합니다. 현실은 고통과 파괴와 상처와 압제와 부정이 일어나는 곳이며,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을 준비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현실, 우리가 줄 수 없을 듯한 것을 달라고 요구하는 현실로부터 도피합니다.

환영은 우리의 건강과 영적인 삶의 척도이며, 우리가 얼마나 더 인간다워졌는지 보여 주는 척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인간됨을 환영하며 인간다운 존재로 살아가도록 가르쳐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마음과 자연에 있는, 여러 가지 차원과 리듬에 맞추어 사는 법을 배우는 곳입니다. 공동체는 인간이 우애와 평화가 넘치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함께 살고 사랑하며 축하하고 노동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징표가 되기 원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모른 척하거나 죽이는 일이 빈번한 이 물질주의 세상에서, 공동체 사람들은 사랑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징표임이 틀임없습니다.

공동체는 구성원 각자가 서로의 은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깨닫고 각각 더 투명하고 더 분명하며 더 통찰력 있고 더 성실하게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고자 노력할 때, 진정한 하나의 공동체가 됩니다. 이때 각 사람은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공동체를 세우는 것입니다.

3. 인자를 사랑하는 삶

사랑의 위험

사랑한다는 것은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며,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있는 모습 그대로, 그의 상처와 어둠과 가난 뿐 아니라 그의 잠재력과 숨겨진 은사까지 함께 존중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믿는 것이며 성장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진보를 소망한다는 것입다.

“너는 쓸모 없는 사람이 아니야. 너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고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어. 난 널 믿어.”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기뻐하는 것이며, 그의 마음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이 여전히 감추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아무리 연약하고 상처받기 쉬우며 반항하고 절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기꺼이 그와 더불어 깊고도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려 하는 것입니다.

긍휼, 기쁨, 자애

긍휼은 고통을 없애 주는 것이 아닙니다. 긍휼은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고통을 없애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와 함께 걷고, 함께 울며, 함께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그 어머니를 격려해줄 수 있고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그녀는 우리를 자신을 이해하는 친구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어머니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것입니다. 긍휼은 비탄에 빠진 이가 더 이상 자신이 혼자라고 느끼지 않고 용기를 되찾을 수 있게 만드는 존재의 품성입니다.

비탄에 빠진 사람은 절망으로 무너져 죽음을 경험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를 긍휼히 여기는 친구는 그가 일어나 계속해서 길을 갈 수 있도록, 그 슬픔과 비탄의 시간을 아주 작은 희망의 불꽃으로 버틸 수 있도록 도우려고 그의 곁에 있어 줍니다. 하나님의 마음에서 솟아난 이 희망의 불꽃은 고통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즉 고통을 겪을 때 우리는 그 고통을 통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의 구원에 동참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받는 이와 함께하는 것은 아마도 긍휼의 가장 어려운 측면일 것입니다. 아니 감히 불가능한 일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긍휼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나는 우리 자신이 어려움과 상처와 연약함과 궁핍을 겪지 않고서도 긍휼을 베풀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의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고서,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현실과 피조물이기 때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서 다른 이들의 고통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4.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삶

마음과 마음의 만남

예수님이 하나님의 표상이신 것처럼, 버림받고 거부당한 어린아이는 예수님의 표상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이와 신뢰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는 예언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는 변화를 촉구합니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촉구합니다. 만남과 축제, 나눔과 용서를 촉구합니다. 그러나 부유한 자는 두려워합니다. 그는 부와 고독과 과도한 활동과 여가 속에 갇혀 있습니다.

부유한 자가 자신의 고독과 감옥에서 빠져 나오려면 가난한 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를 위협하는 위험은 자기 혼자만으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안락과 지식과 능력 속에 갇혀 버리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는 그를 방해하러 옵니다. 만일 그가 그 방해를 수락한다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부유한 자가 갇혀 있는 감옥의 창살을 뚫고 들어옵니다. 그의 시선은 부유한 자의 심장을 찔러 생명에 눈뜨게 합니다. 이것이 만남입니다.

가난한 이들과의 동행

가난한 자의 사랑과 환영의 몸짓 속에는, 그 온유함과 꿋꿋함 속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침묵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의 마음은 또한 성례이기도 합니다. 그 마음을 찾아서 그 마음으로 살려면 예수님의 임재 안에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가난한 자의 마음과 우리 마음 사이에 진정한 일치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 일치는 마치 깊은 만남 같은 것이며 하나님의 선물 같은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과 함께 걸어가면서 나는 나 자신의 가난함에 부딪혔습니다. 그들의 상처는 나의 상처를 드러내 주었습니다. 그들은 내가 신뢰를 가지고 겸손하며 가난하게 예수님을 참으로 따르는 일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피하지 말라

용기를 내어 고통으로 들어가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신비로운 임재를 발견하기 위해

그가 숨어 계신 곳, 가난한 자의 성례 속으로 들어가라


스스로 강하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고통과

고뇌와 상처와

고독과 공허를 외면하지 말라


자신에게로 들어가

그 존재의 사다리에서 내려오라

예수님의 임재를,

어둠을 비추는 그 빛을

발견할 때까지


거기에서 예수님과 함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

세상의 생명을 위해

어제처럼 오늘도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라고 부르십니다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오라가 부르십니다


그대와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상관없이

그분 자신처럼 부활한 자로서 살라고 부르십니다


아버지의 인자한 사랑 안에서 확신을 가지라고

그분 자신이 사신 것처럼 가난한 자들 곁에서 살라고

자신이 사랑하신 것처럼 작은 자들과 비천한 자들을

먼저 사랑하라고

그분 자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말하라고

그분 자신을 드리신 것처럼 우리 삶을 드리라고

그분 자신이 행하신 것처럼 행하라고

아니 이제는 그분이 아버지께서 다시 올라가셨으니

그보다 더 큰 일을 하라고 부르십니다


부름과 근원

사랑이 자라나게 하려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식물이 자라나는 모습은 우리 눈에 결코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성령의 은혜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조금씩, 천천히, 그리고 조용하게 평화와 빛을 자라나게 하시도록 맡겨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침묵 안으로 천천히 고용하게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침묵하시며 그 침묵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의 심장이 그분의 심장과 같이 뛰며, 나의 호흡이 그분의 호흡 안으로 흡수되고, 그분의 임재가 내 안에 스며들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점점 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결코 나의 형제들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을 책임지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십자가에 달려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지 않고서는 결코 십자가에 달리신 분께 다가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골 골짜기는 재난의 계곡

여리고 근처에 있는 험난한 계곡

뱀과 곤충과 돋 품은 짐승들이

우글대는 저주의 장소

모두가 멀리하는 곳


고통의 장소

그대가 멀리하고

꺼리고

회피하고

잊으려 하는

그대 고통의 장소

그대가 멀리하고

거부하고

감추고

잊으려 하는

가난한 자, 고통받는 자, 불행한 자, 절망한 자들이 있는 곳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시네

“내가 아골 골짜기로 희망의 문을 만들리라”

바로 그것이 놀라운 신비

하나님은 말씀하신다네

“네가 도망가지 않으면

네가 네 마음속 골짜기

한가운데로 지나가면,

너를 두렵게 하는 모든 것

너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

가난하고 연약하고 상처받아

너를 위험에 빠뜨리는 모든 이를

기쁨으로 맞이하면,

그들 가운데 있는 네 안의 상처 입은 아이

아주 오래 전

네 마음속 깊이

파묻어 버린

그 아이를 기쁨으로 맞이하면,

너 자신을 기쁨으로 맞이하면,

너는 치유의 길로 나아가리라

아골 골짜기는

희망의 문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