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과 삶/경건서적산책

일상에 깃든 하나님의 손길(로널드 롤하이저, 이지혜, 포이에마, 2011)

기독항해자 2012. 10. 4. 11:12

일상에 깃든 하나님의 손길(로널드 롤하이저, 이지혜, 포이에마, 2011), 2012년 9월에 읽음

 


헨리 나우엔 이후 대표적인 영성 작가로 평가 받고 있는 저자는 일상의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영성에 대해서 이 책에 풀어 놓고 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은 다 영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의식하고 사느냐 아니면 의식하지 못하고 사느냐의 차이 뿐이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영성의 차이는 기독교는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손 길을 알아가는 것이고 다른 종교는 초월자를 찾아가는 삶이다. 영성을 추구하는 방법은 크게 차이가 없다. 그 차이는 영성의 내용에 있다. 많이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사람들은 더욱 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소외를 경험하게 된다. 소유를 탁하고 놓을 때 그는 자유를 경험하게 되고 행복해지게 된다. 그것은 2500년전 노자가 도덕경에 풀어놓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1. 창조주의 시선으로 세상 접하기/더 큰 그림을 보라

가져봐야 소용없는 것들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가져봐야 소용없다는 현실에 괴로워하면서, 여기 이생에서는 모든 것이 미완성 교향곡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칼 라너).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가져봐야 소용없어서 괴로워하는 모습이 현실에서는 이렇게 드러난다. 그러나 라너의 통찰은 단순한 진단에 지나지 않고 처방이기도 하다. 그의 말은 그런 괴로움, 즉 불안감이라는 암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도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 방법은 무엇인가? 이곳, 즉 이생에서는 모든 교향곡이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된다. 우리는 한정된 공간을 살아가는 무한한 영혼이요 모든 사물과 인간과 연합하도록 지어진 존재이면서도 유한한 개인과 사물과만 만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불만족과 백일몽, 외로움과 불안감에 시달리는 것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인생의 끊임없는 갈망

모든 인생은 갈망으로 불이 붙는다. 아주 간단한 형태의 식물도 인간 사랑의 절정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먹고 자라고 생명을 잉태하며 자아를 초월하려는 열망과 불안, 만족할 줄 모르는 어떤 압력. 그러나 열망이라는 것은 모든 인간 영혼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쉽게 검토하기가 힘든 정체이다.

공허한 인생

외부를 향한다고 해서 불안감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내면을 향해야 한다.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이미 진짜 인생이 존재한다. 우리의 불안한 열망과 환상, 하나님, 사랑, 공동체, 의미, 영원의 중요성 등 우리가 찾아 헤맨 모든 것을 초월한 진정한 삶이 거기 있다. 커다란 성취, 세계적 명성,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 유명인사가 되는 것 등 무언가 특별하고 영원한 일을 발견하거나 해낸다고 해서 한없이 작아 보이는 삶보다 우리가 커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에서 벌어지는 특별하고 영원한 일을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큰 사람이 될 수 있다.

불완전한 인생을 애도함

이생에서는 완성 교향곡이란 없다. 우리는 무한한 존재로 지음 받았다. 우리 마음과 지성과 영혼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심연이나 계곡과 같다. 그래서 이생에서는 늘 외롭고 불안하고 불안전하며 처녀로 남을 수밖에 없다.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가져봐야 소용없기에 괴로워하면서 말이다.

내면으로 향하는 여정

엘리자베스 오코너의 책 ‘침묵을 찾아서’ 서문에서 고든 코스비는 이렇게 썼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여정을 한 가지만 꼽으라면, 바로 한 사람의 가장 깊숙하고 고요한 내면으로 떠나는 여정이다. 그곳에 도달하는 것은 집에 도착하는 것과 같다. 거기 도착하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정착하지 못하고 불안해한다.”

내면의 고요함에 도달하지 못하면 영원히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 내면과 화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고요한 중심, 중심의 고요인 내면으로 향하는 여정은 지난한 길이다. 그곳에서 우리 삶과 영혼은 하나님의 삶과 영과 연합한다.

2. 여러 방식으로 함께 계신 하나님/축복받은 인생

축복하고 저주하는 삶

본인의 삶이나 가족, 배우자나 친구들을 보며 기뻐하는 사람이 주변에 몇이나 되는가? 각자의 생활이나 각자가 맺는 관계에서 기쁨을 느끼기보다는 지루함이나 후회, 편집증, 질투, 집착과 소유욕, 죄책감이나 위협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또 주변에 기쁨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죽이기에 바쁘다. 삶의 열정과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들에게 입 다물고 조용히 좀 하라며 소리 치고, 남이 웃거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때면 무신경해지거나 질투를 느낀다.

축복받은 삶

축복이란 말은 라틴어 동사 ‘베네디체레’에서 파생한 단어로 ‘칭찬’이라는 뜻이다. 즉 누군가를 축복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칭찬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특별한 형태의 칭찬이다. 축복이란 어떤 말이나 동작, 의식을 통해 그 사람이 다음 세 가지를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1) 하나님이 세상과 인류를 창조하시고 난 후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실 만큼, 원래 창조세계가 선했다는 점. (2) 하나님이 세례를 받은 예수님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체험하신 기쁨과 즐거움을 그 사람에게도 똑같이 경험하신다는 점. (3) 축복하는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그 선함을 발견하고 그 사람을 온전히 기뻐한다는 점.

인간의 굶주림은 대부분 축복이 부족해서이다. 인간의 아픔은 대부분 축복받지 못한 아픔이다. 인간의 슬픔은 대부분 아무도 순수하게 우리를 기뻐해주지 않는 데서 비롯한 슬픔이다.

축복은 보는 것이다

누군가를 진짜로 지켜본다는 것, 특히 당신을 우러러보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상대방에게 아주 중요한 축복이다. 인정과 이해의 시선에는 큰 축복이 담겨 있다. 우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많은 말을 해주기보다 그들을 봐주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 안에 존경하는 사람들, 즉 부모나 연장자, 리더, 교사, 코치, 목사, 상사 등이 우리를 봐주기를 바라는 깊은 갈망이 있다. 윗사람이 주시하여 보고 인정해주는 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

훌륭한 왕은 자기 백성을 본다. 훌륭한 부모는 자기 자녀들을 본다. 훌륭한 교사는 자기 학생들을 본다. 훌륭한 목사는 자기 교인들을 본다. 훌륭한 코치는 자기 선수들을 본다. 훌륭한 경영자는 자기 직원들을 본다. 정말 훌륭한 식당에 가면 주인이 식탁에 와서 자기 고객들을 본다. 그러면 손님들은 딱히 이유를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주인이 시간을 내서 일부러 손님을 보는 수고를 해주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된다. 우리를 봐주는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복을 받는다.

축복은 생명을 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축복한다는 것은 가장 먼저 그들을 봐주는 것이다. 그들에게 주목해서 상대방이 진정한 관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그 시선에서 축복을 느낄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것은 진정으로 기뻐하고 감탄하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메시지를 눈빛으로 전달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축복하기 원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내 삶을 그 사람에게 줌으로써 상대방이 더욱 풍성한 삶을 살게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축복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해 죽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훌륭한 부모는 자녀를 위해 죽는다. 아이들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자기 삶을 희생한다. 부모는 죽고 자녀는 산다. 훌륭한 교사를 학생을 위해, 훌륭한 멘토는 멘티를 위해, 훌륭한 성직자는 교인을 위해, 훌륭한 의사와 간호사는 환자를 위해, 훌륭한 정치인은 조국을 위해, 젊은이를 진정으로 축복하고자 하는 훌륭한 어른은 청년을 위해 죽는다.

축복의 통로

이해하고 용서한다는 뜻으로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른 사람들을 축복할 때 우리는 그들과 비밀 약속을 맺는다. 그들은 평생 그것을 간직하게 된다.

위축된 마음 풀기

어른의 축복이 마음을 해방시켜준다. 새끼를 낳은 직후 새끼의 몸을 핥아주는 모습에서 그 점이 원초적으로 드러난다. ‘연장자’인 누군가가 우리를 긍정해줄 때 마음이 온전해진다. 어른이란, 그들이 제공하는 무언가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을 가리킨다. 생명을 주어서, 나이가 많아서, 지혜나 미덕, 재능이나 지위가 출중해서 자유롭게 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의지하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어른들을 의지하기에 그분들이 인정해주느냐 저주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억압되기도 하고 풀어주기도 한다.

조상에게서 내려오는 축복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집은 친족 및 혈연 관계, 가족, 심리적 유대 관계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장소로서의 중요성도 가진다. 어떤 사람에게 집이 있으려면 특정한 장소 즉 조국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땅을 신성하게 여겨 성지를 두고 수많은 전쟁을 벌인 것도, 자기 땅을 빼앗긴 원주민들이 그토록 많은 혼란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고향에서 쫓겨나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라도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일이다. 집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그런 고통과 혼란을 느낀다.

3. 외로움과 갈망과 성/손에 쥘 수 있는 것은 가져봐야 소용없다

사랑과 외로움과 실망

철없는 어린 시절에 사랑 노래를 들으면서 우리가 슬퍼하고 실망하는 것은 사랑받지 못해서라고 생각한다. 사랑만 찾아오면 이 모든 괴로움은 끝날 거라고 굳게 믿는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경험이 많아지면 슬퍼하고 갈구하고 실망하는 것은 우리에게 사랑이 찾아오지 않아서가 아니라, 인간의 사랑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러한 통찰 덕택에 우리는 결혼이든 깊은 우정관계든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무엇인지 깨닫는다. 그것은 바로 바로 사랑에는 한계가 있어서 실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로 서로 위로하는 것이다.

두 사람이 얼마나 깊은 우정이나 결혼 관계를 맺고 있느냐 하는 것과 상관 없이, 우리는 홀로 남는다. 두 사람은 이생에서 결단코 한 마음, 한 머리, 한 몸을 이룰 수 없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랑이나 우정도 우리의 홀로 있음을 해결해주지 못한다. 가끔은 성적 충동이나 정서적·영적 친밀감이 두 사람을 하나로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런 하나됨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아무리 깊고 강력한 관계라 해도 결국 우리는 각자의 몸과 마음과 머리를 홀로 책임지고 또 책임져야 할 뿐이다.

성과 숭고

섹스는 우리의 바람을 채워주지 못한다. 외로움, 더군다나 윤리적 외로움은 아주 조금밖에 완화시켜주지 못한다. 섹스는 외로운 하룻밤, 외로운 한 계절을 버틸 수 있는 일회용 임시방편을 제공해주진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의 필요를 채워주지는 못한다. 순결한 삶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숭고한 섹스란 있을 수 없다.

4. 일상을 지탱해주는 성찬/받고, 감사하고, 나누라

감사, 최고의 미덕

감사함으로 받는 것, 합당하게 감사하는 것은 종교적 태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적절한 감사야말로 최고의 미덕이다. 감사가 성화를 정의한다. 성인은 감사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선물로 보고 받았다.

광이 나는 돌

가족과 공동체는 지루한 곳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곳이다. 그곳에는 우리를 흥분시키는 일들이 가득하다. 숨을 곳이 전혀 없다.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쉴틈 없이 주시하는 가족들의 눈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미성숙한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 그들과 함께 사는 것이 때로 지옥처럼 느껴질지도 모르나, 가정에서의 연단을 통해 우리는 천국에 도달하게 된다.

주신 선물을 온전히 누리는 것

선물을 준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은 그 선물을 온전히 누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삶이라는 선물을 충분히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흠만 잡아서는 안 된다! 아름다운 순간에 대한 최고의 보답은 그 순간을 즐기는 것이다.

5. 윤리적 동행과 섹스/결혼이라는 성례전

결혼의 이미지

*훌륭한 결혼생활은 따뜻한 벽난로이다. 두 사람의 사랑이 따뜻한 장소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 온기가 부부 두 사람만 따뜻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모두 훈훈하게 만들어 준다. 두 사람의 자녀와 이웃, 공체를 비롯하여 그들을 만나는 모든 사람이 온기를 받는다.

*훌륭한 결혼생활은 온갖 음식과 음료를 차려낸 커다란 밥상이다. 부부가 성례전적으로 서로 사랑할 때, 그 사랑이 환대의 장소를 만든다. 식탁에서 사람들은 배부르게 먹는다. 진정한 결혼생활에서 비롯된 사랑은 두 사람뿐 아니라 운 좋게 두 사람을 만난 모든 사람에게 포만감을 가져다준다. 부부의 성례전적 사랑이 모든 사람을 먹이고도 남기 때문이다.

*훌륭한 결혼생활은 고난은 견뎌내는 그릇이다. “서로 나눌 수 있다면 견디지 못할 일은 없다.” 맞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 진정한 윤리적 파트너가 있는 사람이라면 수많은 고난을 견딜 수 있다. 윤리적·정서적 친밀감이 깊은 부부는 본인들의 고난을 견딜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고난을 견디도록 도울 수 있다.

*훌륭한 결혼생활은 그리스도의 몸, 곧 ‘세상을 위한 참된 양식’이 되는 살이다. 그리스도는 자기 몸을 세상의 양식으로 주셨다. 훌륭한 결혼생활은 바로 그와 같아서, 주변 모든 사물과 사람을 먹인다.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윤리적·심리적·종교적 자양분이 된다.

성례전적 섹스

첫째로, 부부과 성관계를 맺을 때마다 두 사람은 각자가 상대방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확인한다. 각각의 성관계는 두 사람이 상대방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주고 기뻐한다. 부부의 정당한 성관계, 결혼으로 성별된 사랑은 결혼서약의 내용을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확인하고 축하하는 것이다.

둘째로, 성관계는 상대방의 성 정체성을 강화시켜주는 가장 강력한 행위이다. 도미니언의 표현을 빌리자면 성관계를 통해 여자는 더 여자다워지고, 남자는 더 남자다워진다.

셋째로, 성관계는 잠재적으로 가장 강력한 화해와 치유, 용서의 행위가 될 수 있다. 부부는 성적 오르가즘에서 절정을 체험하게 되는데, 그런 절정의 체험에서 상처를 초월하고 조화를 회복할 수 있다.

넷째로, 성관계는 매우 독특하게도 두 사람이 상대방에게 이 관계를 계속 우지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하는 강력한 방법이다. 결혼생활에서도 성적 결합이 끊어져서 상대방과 잠자리를 같이하기를 꺼리거나 머뭇거린다면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두 사람이 관계 지속을 피하거나 망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지막으로, 성관계는 감사의 광맥이다. 합법적 부부 사이의 오르가즘은 감사를 낳는다.

부부침소는 성찬과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것이다. 성찬과 마찬가지로 부부의 침소는 특별한 사랑과 정절, 화해, 감사를 이 땅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런 특징이 성찬처럼, 성관계를 매우 강력하고 특권 있는 성례전으로 만든다.

진짜 부모는 하나님

자녀는 사실 우리 소유가 아니다. 하나님이 잠시, 아주 감깐 동안, 우리에게 맡기셨다. 우리는 아이들의 부모요 청지기, 멘토, 보호자, 교사, 친구 역할을 맡았지만, 아이들이 정말로 우리 자녀는 아니다. 아이들은 온전히 하나님의 소유다. 이것을 깨닫고 제대로 인정하면 큰 도전과 위안이 된다. 이 말이 도전이 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 말을 받아들이면 더 이상 자녀들을 ‘소유한’ 것처럼 행동하지 않고, 우리 필요에 따라 아이들을 조종하지 않으며, 아이들이 우리 궤도를 따라 도는 위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녀들에게 자유를 주면서도 더 많이 사랑하고 달래고 도전하고 교정해줄 수 있다. 이 말이 위로가 되는 이유는 덜 분명할 수도 있다. 우리 자녀가 진짜 우리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자녀들을 양육하고 돌볼 책임이 우리에게만 있지 않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결국은 우리는 양부모이고 하나님이 진짜 부모가 되신다. 하나님은 늘 부모된 우리보다 훨씬 더 자녀들을 사랑하고 보호하고 도와주시며 함께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훨씬 더 자녀들을 염려하신다.

6. 인간의 유한성, 죽음과 부활/모태에서 모태로, 어머니에게서 어머니로

어느 노수도사의 질문

우리가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 무엇이 되었든 그 일이 지금 이 땅의 삶과 우리를 격리하거나 소외시키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세상과의 격리는 결코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맞다. 죽음을 준비하려면 삶 속으로 더욱 깊이 빠져야 한다. 우리가 마땅히 살아야 할 진정한 삶을 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죽음을 준비할 수 있다.

찰나의 아름다움

때 이른 죽음은 감당하기 힘든 슬픔이다. 한 생명의 불이 꺼지고, 그와의 영원한 이별은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죽음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현실, 그 영원한 단절을 미리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신앙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어마어마한 죽음의 고통을 견디기는 힘들다. 모든 죽음이 그렇지만, 특히 젊은 사람이 죽으면 그 고통이 배가된다. 한창 때 생명이 끊어지며, 아까운 건강과 아름다움, 사랑과 기회가 사라진다.

생명이 곧 자연이고, 자연이 곧 생명이다. 생명은 짧고 우리 몸의 힘과 건강과 아름다움도 잠시 반짝일 뿐이다. 그 순간이 너무 짧아 놓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인간 만사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열병 같은 사랑, 신혼기, 성취와 안정감도 아름다운 하와이무궁화 같아서 한순간에 불과하다. 화려한 꽃을 보며 수많은 수고와 자연과 감정이 오가지만 꽃이 만개한 바로 그 순간, 그 생명체는 죽어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자연에서 그냥 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꽃은 세상을 변화시킨다. 하나님이 보시고 영원한 책에 기록하지 않고서는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 언젠가 그 책이 모든 숨겨진 비밀을 밝히 드러낼 것이다.

그리스도의 수난 같은 불치병

그리스도가 행위나 사역에서 가장 수동적이었던 고통스러운 순간에 우리를 위한 구원 사역을 이루셨다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활발하게 사역하던 기간에 하신 모든 일에서 유익을 얻지만, 특히 그분의 수난과 고난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예수님이 무언가를 하신다는 관점에서는 어쩌면 가장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것처럼 보이는 때에 그분은 우리를 위해 가장 큰 일을 하신다.

착한 사람들이 이토록 고통과 굴욕, 무기력함에 신음하며 힘겹게 죽음을 맞이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죽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죽음 안에 탄생, 탄생 안에 죽음이, 주는 것 안에 받는 것이, 받는 것 안에 주는 것이 있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보여주듯, 구속의 신비를 너무 깊어서 이해하기 힘들다. 구속의 신비를 우리를 끊임없이 놀라게 하고, 늘 생명을 가져다 준다.

제2의 출생, 죽음

죽음을 두려워할 때 우리는 출생을 두려워하는 배 속의 태아와 마찬가지 처지다. 이 세상이 어마어마하게 크고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것도 많지만 어머니의 자궁보다 조금 더 큰 또 다른 자궁에 불과하다. 더 온전하고 영원한 세상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세상 역시 작고 제한적이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엄마 뱃속의 태아처럼 우리도 현세 너머의 삶을 상상하기 힘들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것,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해주는 탯줄울 꽉 붙들고, 손아귀 힘을 뺏어갈지도 모르는 것들은 전부 경계한다. 태아가 출생 이후의 삶을 두려워하듯이 우리는 죽음 이후의 삶의 두려워한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죽음은 탄생과 비슷한 것이 아니라 탄생이다. 어머니의 태에서 드넓은 세상으로 막 태어난 우리는 한 동안 아무 말이 없다. 그렇지만 이 어마어마한 세상은 결국 우리가 또다시 잉태되어 더 큰 세계로 태어날 준비를 하게 되는 또 다른 자궁이다.

7. 사회 정의로의 부르심/경건하고도 정의롭게 걷기

유연함과 정치

어느 쪽으로든 치우치지 마련이다. 종교생활에서 예배와 경건, 개인 윤리에만 초점을 맞충다 보면, 복음이 사회정의를 강조한다는 사실을 합리화하기 쉽다. 그렇게 되면 종교란 그저 교회에 가서 혼자 기도하고 개인 윤리만 겨우 유지하는 수준에 그친다. 경건파 사이에서는 진정한 예배는 교회 출석과 개인 윤리 이상을 요구한다는 의식이 전무하다시피 하다. 그와 반대로, 종교생활에서 사회 정의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그린피스와 복음을 혼동하고 정의 대한 헌신의 궁극적 기초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잊기 쉽다.

남 몰래 흘린 피

고난 받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개인 윤리와 사회 정의, 경건파와 사회 정의파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사회 정의파는 아주 사소한 개인의 윤리적·심리적·영적 행동 하나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깨닫고, 경건파는 가난한 이들의 삶에서 말로 형언하기 힘든 소중한 것이 훼손되고 망가지고 있는 현상을 즉시 목격하고 그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고 결단할 것이다.

8. 겸손으로의 부르심/작은 자 가운데서 우리 영혼 발견하기

열등함이 영혼을 세워준다

미국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사상가 제임스 힐먼은 영혼을 세워주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약점이라고 주장한다. 인격 성장과 성품 형성에 도움이 되는 것은 우리의 강점이 아니라 약점이라는 것이다. 실패보다는 성공 때문에 피상적으로 변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약점보다는 강점 때문에 무너지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은 이상하면서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무엇이 우리를 깊이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가? 우리에게 긍휼을 가르쳐주는 것은 무엇인가? 성공? 사람들이 칭찬하는 우리의 강점? 다른 사람보다 돋보이게 만드는 몸과 마음의 특징?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원벽한 몸매? 이런 것들 때문에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인가? 오히려 그 반대다. 깊이와 강점, 긍휼이 넘치는 영혼,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영혼은 완전히 다른 것들로 빚어진다. 살이 쪄서 엄마처럼 될까봐 두려운 마음, 이가 고르지 못해 생긴 수치심, 어떻게든 남들에게 숨기고 싶은 몸의 점, 자꾸만 사람을 피하게 만드는 얼굴 잡티, 나를 늘 창피하게 만드는 뱃살과 둔부, 그리 잘나지도 재밌지도 않은 사람이라는 두려움, 배경이 별로 좋지 못하다는 두려움, 나의 공포증, 소심함, 평범함과 부족함, 이 모든 것이 우리 영혼을 깊이 있게 해준다.

일어나 네 소파를 들고 걸어가라

모든 인간은 공동체에서 함께 살라고 부름 받았다. 우정과 결혼, 공동체를 낭만적으로 꿈꾸기는 해도, 공동체로 사는 것은 아마도 인간에게 가장 힘겨운 과제일 것이다. 오랫동안 한 사람과 가까이 지내다 보면 서로 심각한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상처와 아픔에도 불구하고 서로 용서하고 잊어버리고 회복하는 과정에서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회복력에 공동체의 성패가 달려 있다.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온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머니 배 속에서 이 세상에 나오는 바로 그 순간부터 모든 인간은 넘어지고 떨어지고 데고 거부당하고 학대를 받는다. 깊은 상처 없이 어른이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상담 자체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상담을 핑계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회복력을 방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회복력이 없다면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일은 요원하다. 사람들이 상담실과 치유 모임에서 자기 상처와 중독, 역기능과 그 원인이 되는 구조를 파악하기 시작하면서 긍정적인 일도 많이 생기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심리 치료가 또 다른 중독이 되고 있는 현상도 무시할 수 없다. 이렇게 해서 자기 상처와 역기능에 민감하다 보면 지나치게 민감해져서 다른 사람과는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우리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 상태가 심각해지면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흔히 생기는 정상적인 충돌과 갈등마저 견뎌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9. 구조와 정신, 분노와 슬픔, 남성과 여성/성차의 강

여성과 남성과 종교

오늘날 서구 기독교에서는 ‘이중 소외’를 찾아볼 수 있는데, 여성은 교회 구조에서 소외되고, 남성은 교회 정신에서 소외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현상은 곧 오늘날 서구 기독교의 구조는 남성적인 반면, 그 정신은 여성적이라는 점을 지적해주는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면서 성적 소외의 해결책을 매우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좌절한 여신과 슬퍼하는 전사

모든 인간은 ‘이마고 데이’ 즉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신의 자녀로 태어나는데, 이 사실은 우리가 그것은 인정하든 부정하든 간에 우리 삶의 여러 측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 몸과 마음, 정신과 영혼과 감정에 녹아 있다. 인간은 신과 왕과 부모로서 창조하고 명령하며 양육하고 축복하는 소명을 받았다. 이것은 남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인간은 남녀 상관없이 동일한 신성의 표지와 동일한 원형적 특징을 소유하며, 그 신성의 표지와 원형적 특징으로부터 창조하고 명령하고 양육하고 축복하는 남녀 공동의 소명을 부여받는다.

정직한 분노

첫째 정직한 분노는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다. 건전한 분노는 진실을 왜곡하려고 과거에 좋았던 일까지 눈감아버리지 않는다. 정직한 분노는 진짜 분노라서 잘못된 것을 느끼고 지적해내지마, 과거에 좋았던 일이나 조금 좋은 일까지 부정하지 않는다. 좋은 것은 좋게 기억한다.

둘째 정직한 분노는 격노가 아니다. 정직한 분노와 격노는 큰 차이가 있다. 겉으로는 다소 격하고 평화를 깨는 것처럼 보여도, 정직한 분노는 결국에는 관계를 세우고, 새로운 온전함에 이르며, 깨어진 것과 화해를 추구한다.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 약간 과격했을 뿐이다. 반대로 격노는 막무가내로 상대를 낙담시키고 관계를 깨뜨리며 철저한 파괴만을 바란다. 격노의 상처는 너무 깊어서 연합이나 회복을 바라는 마음이 전혀 없다. 격노가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자살인데, 상처 받은 사람이 배신한 연인을 죽이고 자살하는 경우와 같다.

마지막으로 정직한 분노는 시한부이다. 영원하지 않다. 정직한 분노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잃어버린 사랑의 대체물로 본다. 정직한 분노는 변명거리를 찾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

하나님은 남성인 동시에 여성이시고, 아버지인 동시에 어머니이시다. 기독교 전통, 특히 창조 이야기는 남성과 여성 모두 똑같이 하나님을 닮은 형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신학은 하나같이 하나님이 형언할 수 없는 분이라는 확신에 기초하며,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은 한계가 없는 무한한 분이시기에 우리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알 수는 있지만 그분을 생각할 수는 없다. 인간의 머리로는 하나님을 어떤 개념으로 담을 수가 없다. 그분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성경 내용을 포함해서 인간의 모든 개념과 단어는 부적절하다.

하나님의 성을 고려하면, 하나님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시다. 중성이나 무성도 아니시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언어는 그 신비에 미치지 못한다.

포괄적 언어를 재고하다

인간의 언어로는 하나님을 묘사할 수 없다. 세상 모든 신비주의와 신학은 그 전제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는 있어도, 그분에 대해 적절하게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0.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사랑/무모하고도 무조건적인

11. 시인과 상상력, 모국어와 종교 언어/겁에 질린 종교를 돕는 법

파스카 상상력

상상력이란 우리 체험을 이해하고 그에 반응하는 데 필요한 이미지들을 창조하는 능력이다. 상상력이 부족하면 무슨 일이 생길 때 주변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마비된 것처럼 굳어버린다.

일상의 성례

기독교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거룩하며, 모든 것이 성례에 중요하다고 가르쳐준다. 그런 관점에서 우주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우리 몸은 성령의 전이요, 우리가 먹는 음식은 신성하며, 노동과 성생활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공동 창조자다.

12. 삶 가운데 예배하기/세상을 위한 저녁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