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과 삶/경건서적산책

교회 밖에서 승리하라(김종춘, 21세기북스, 2007)

기독항해자 2012. 9. 18. 16:44

교회 밖에서 승리하라(김종춘, 21세기북스, 2007), 2012년 9월에 읽음


우리는 총체적인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 나라는 자살률 세계 1위라는 불명예을 안고 있다. 그렇지만 아무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만큼 우리의 정신과 사고가 병들어 있다는 말이다.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궁구하지 않는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교회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게 자살하는 사람들 중에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렇지만 그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이 한국호가 물질만능주의에 매몰되어 사람의 생명을 하찮게 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만큼 우리는 사회는 병들어 있다. 병든 이 사회를 어떻게 하며 치유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이 물음에 대해서 하나의 해답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1. 감은 눈으로 미래를 점치지 말고 눈을 뜨고 현실을 파악하라

눈에 깡을 더하라

우리는 실패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 바르게 잘 돼서 주님께서 주신 뜻을 마음껏 펼쳐야 한다.

그러면 첫째로 현실감각이 있어야 한다. 현실에서는 정글의 법칙이 통한다. 강하고 악하고 야비한 사람이 지배하고 빼앗는다. 그런 사람을 잘 분별해야 한다. 분별력이 곧 성숙이다. 악한 사람, 야비한 사람, 사기꾼, 거짓말쟁이, 게으름뱅이는 제압하든지 피하라. 하지만 현실에서는 사랑의 법칙도 작동한다. 무조건 베풀고 사랑하고 희생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을 만나고 닮아라. 무엇보다 십자가의 주님을 닮아라.

둘째로 행동감각이 요구된다. 모든 것을 갖추고 시작하려면 할 수 있는 게 없다. 하고자 하면 주님이 길을 열어주신다. 한 쪽 문이 닫혀도 다른 쪽 문이 열린다.

셋째로 은혜감각을 키워야 한다.

열심히 하고 싶은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형편인가. 그렇다면 더욱 내공을 쌓아야 한다. 이랜드의 박성수 사랑은 대학졸업 후 5년간 근육무력증에 시달렸다.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수많은 책을 읽고 8개의 신문을 스크랩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때 얻은 방대한 지식 덕분에 이랜드의 급성장을 무리없이 감당할 수 있었다고 한다. 민들레 영토의 지승룡 대표는 원래 목회자였다. 그러나 36세의 이혼한 목회자를 반기는 교회는 없었다. 딱히 할 일이 없었던 그는 도서관에서 신문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경제, 경영, 창업에 관한 책들을 섭렵했다. 그렇게 3년을 보내면서 그가 읽어낸 책 2,000권은 민들레영토의 창업주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멀리 바라보고 오래 웅크린 새가 드높이 난다. 열린 상황이면 열심히 노력해서 계속 진볼ㄹ 이뤄야 하고 닫힌 상황이면 미래를 기약하면서 내공을 쌓아야겠다.

꿈의 창의력만 있는 몽상가도 안 되고, 깡의 추진력만 있는 도전자가도 안 된다. 꿈과 깡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꿈과 깡의 추진력이 함께 할 때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역이 될 것이다. 어떤 환경에서도 꿈을 꾸고 깡을 기르자. 그러면 언젠가는 하나님을 위해 유감없이 역량을 발휘하는 정상의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시37:4).

상상력에 추진력을 곱하라

내가 있는 지를 이전보다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면 그것이 성공이다. 내가 있는 곳이 사막이라면 거기에 풀씨를 심는 것부터가 성공의 시작이겠다. 천국도 겨자씨 한 알을 심듯이 시작되지 않는가. 더 나은 곳을 찾아 헤매지 않고 자신의 현장을 가꿈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게 하는 것, 참으로 위대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이 성공인가? 내가 서 있는 현장을 이전보다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면 그것이 성공이다. 지금 서 있는 현장에서 좋은 씨를 뿌리고 땀을 흘리며 즐겁게 투신하라.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사람들이 찾아들게 하라. 현장에 깊은 물을 만들고 그곳에 인생의 그물을 내려라.

미래의 숲과 새들의 둥지를 꿈꾸며 지금 나의 밭에 겨자씨 한 알을 심는 상상력, 그리고 일을 반복하는 추진력이 지금의 자리를 천국으로 만든다. 나의 밭, 나의 현장이 어떠할지라도 좋은 씨를 뿌리고 땀을 흘리며 즐겁게 투신해야 하겠다. 변두리이든, 중심지이든, 이전보다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면 성공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름진 초지를 찾아 헤매지 말고 척박한 현장에 찰거머리처럼 붙어살아야 한다. 정글을 뚫고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샘을 파야 한다. 더 나은 곳을 찾아 헤매지 말고 지금 서 있는 현장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자.

몸을 사리지 마라

우리는 실패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성공하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한다. 무엇이 성공인가. 성공은 명품을 걸치고 자격증을 갖추고 상좌에 앉는 것이 아니다. 성공은 자신의 목소리, 자신과의 약속, 자신의 뜻을 발견하고 그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가치를 창조하고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끝가지 걷는 것이 성공이다. 남의 길을 걷는 사람치고 비범한 이를 보지 못했다. 하늘의 소명을 느끼고 평생 자신의 길을 걷는 사람이 비범함을 겸한 위인이다.

자신의 목소리, 자신과의 약속, 자신의 뜻은 내면의 불이다. 이 불에서 카리스마, 리더십, 열정, 모험심, 지구력이 나온다. 내면의 불이 있다는 것은 진정한 자기를 이미 발견했다는 것이다. 어떡하면 내면의 불을 가질 수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 무엇을 잘 하는가.” 이런 질문을 반복해서 답이 나온다면 내면의 불씨가 생긴 셈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 곧 자신감은 대중에게 전염돼 대중의 신뢰와 지지로 되돌아온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사안에 대한 지식부족으로 말실수가 잦아 보좌진이 늘 긴장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위대한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크고 작은 정책들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도 전혀 기죽지 않고 매사에 적극적이었다. 그의 자신만만함은 국민들에게 전염됐다. 국내외 여러 문제들에 시달리던 국민들은 그의 자신감에 안도할 수 있었다. 보좌진들의 걱정과 달리 국민들은 그에게 신뢰를 보냈고 재선의 임기를 성공적으로마칠 수 있었다. 그는 자신감이 넘치는 낙관주의자였다.

이에 반해서 지미 카터 대통령은 자신의 어깨에 놓여 있는 책임에 눌려, 늘 노심초사했다. 그는 책임감에 압도당했고 자신의 능력부족에 지나치게 민감했다. 중요한 사안들에 대해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을 되풀이했다. 국민들은 그의 고민을 무능으로 받아들여, 재선을 좌절시켰다. 그는 국가의 위기를 진심으로 걱정했지만 국민들은 그의 불안감 때문에 불신할 수밖에 없었다. 퇴임 후 막중한 책임감에서 벗어난 카터는 대통령 직에 있을 때보다 더 빛나는 역할을 수행했다.

얼굴이 두껍고 마음이 두터워야 자신의 길을 고수하는 승리자가 될 수 있다. 승리자들의 공통점은 남들의 비난, 판단, 평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남들의 칭찬에 연연하거나 남들의 칭찬과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하는 인생은 낭비로 끝나기 마련이다.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기르자.

자신의 목소리, 자신과의 약속, 자신의 뜻이 내면의 불이다. 이것이 있으면 주님이 허락하시든지, 더 강화시키든지, 아니면 주님 자신의 것으로 대체하신다.

현실을 직시하고 실력으로 말하라

약자가 강해지는 데는 많은 시간이 요구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해서 한 순간에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천하의 다윗도 처음부터 강하지 않았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대상11:9).” 설익은 벼는 이삭을 맺을 수 없다. 오랜 시간 영근 벼만이 이삭을 맺는다. 뿌리에 저력이 생기려면 시간의 흐름이 필요한 것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적기다. 지금 40대이면서 30대에 하지 못한 일을 후회하는가. 지금 하라. 그러면 50대에 가서 40대에 하지 못했다고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성공에는 ㄴ과거의 투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가난에서 탈출하는 습관

물려받은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사람이 가난의 함정에서 빠려나오려면 첫째로 자기 색깔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명이나 대의명분, 아니면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이나 잘 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자신을 꾸준히 탐색하면 가능하다.

둘째로 지혜, 지식, 정보를 계속 갈아줘야 한다. 하늘의 것이든, 세상의 것이든 밝고 새로운 씨를 자기 안에 심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성장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셋째로 밑바닥에서 저력을 길러야 한다. 아무리 가난의 골이 깊다고 해도 밑바닥에서 저력을 쌓다 보면 언젠가는 화려하게 날 수 있다. 북미지역의 매미 중에는 땅속에서 애벌레로 17년 동안 수액을 빨아먹으며 저력을 키운 뒤, 나무 위로 올라오는 것도 있다. 밑바닥에서 저력을 쌓은 사람은 기회가 오면 땅을 달리고 하늘을 날게 된다.

넷째로 장기전을 벌여야 한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집단증후군은 바로 조급증이다. 스피드 시대, 디지털 시대를 거슬러 느긋한 농부의 마음으로 인생을 경영해야 한다.

직진하면 좋으련만 세상을 사는 게 그렇게 녹록치 않다. 역사는 직선이 아니라 나선형이다. 나선형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더 나은 존재로 빚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훈련방식이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고 저력을 키우면서 장기전을 벌이다 보면 마침내 부자가 되고 어느 새 승자가 된다.

다섯째로 남들의 평가에 초연해야 한다. 남들의 칭찬이나 비방에 민감하면 초지일관할 수 없다. 색깔을 분명히 하고 장기전을 벌이면 남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돼 있다. 일일이 대응하면 본래의 궤도를 이탈하게 된다. 전진을 방해하는 비방과 욕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앞으로 나가야 한다. 인생도, 믿음도 전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히10:38~39).

내 색깔이 주변의 사람들을 결정하고 나의 인생을 결정한다. 마음이 우중충하면 인생도 우중충하고 마음이 밝으면 인생도 밝다. 마음이 오락가락하면 인생도 오락가락하고 마음이 확실하면 인생도 확실하다.

차이를 내는 인생

성공은 차이에서 나오는 차이는 창의력에서 나온다. 생각의 차이가 세상을 새롭게 창조함으로써 세상을 더 잘 섬기게 된다.

주님은 구원주이시기 전에 창조주이시다. 우리는 죄로부터 구원받아야 하고 또한 창조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 가지 사역을 하여야 하는데, 첫째는 죄인을 위한 복음사역이요, 둘째는 어려운 계층을 위한 복지사역이요, 마지막으로 셋째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창조사역이다. 창조적인 생각이 창조적인 세상을 만든다.

어떻게 창조적일 수 있는가. 성령충만하면 된다. 성령 하나님은 지혜와 명철, 모략과 재능, 지식의 영이시기 때문이다(사11:2).

모든 것이 남아도는 과잉시대다. 이런 시대에는 차이를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차이를 내려면 자유 속에서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야 한다. 그러려면 성령충만이 필수적이다. 뜨거운 마음 곧 열정은 영어로 Enthusiasm이다. 이는 ‘하나님 안에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으면 뜨거운 마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님을 통해서다.

생각의 궁기를 벗고 시야를 밝혀라

우리는 솔개로부터 배워야 한다. 솔개는 40년을 살면, 부리와 발톱이 노화되고 깃털이 두꺼워져 날기가 힘들어진다. 그 때 솔개의 산 위로 올라가 바위를 쪼아 부리를 빠지게 한다. 그 후 새 부리로 발톱과 깃털을 뽑아낸다. 그러한 과정을 반년 동안 거치면서 완전히 새롭게 변신한 솔개는 30년을 더 살게 된다. 옛 것을 벗겨내야 새 것이 나오고 그래야만 장소할 수 있다. 인생에는 항상 궁기가 찾아오게 된다. 궁기를 벗겨내야 반질반질한 인생을 살 수 있다. 가장 먼저 벗겨내야 하는 궁기는 생각의 궁기다.

생각이 궁하면 믿음도 궁하고 믿음이 궁하면 인생도 궁하다. 생각의 전환은 인생의 전환이다. 새로운 생각이 새로운 인생을 초래한다. 인생에 궁기를 벗겨내고 풍요를 가져오는 첫째가 말씀충만이요, 둘째가 기도충만이라면 셋째는 행함충만이다. 행함이 인생의 풍요를 보장한다. 물론 거두기까지는 인내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눈이 밝으면 자신과 남과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있다. 더불어 환경을 제대로 보고 현재를 치밀하게 보면 미래를 꿰뚫어 본다. 그 결과 당연히 성공과 승리의식으로 충만하게 된다. 어느 분야에 종사하든지 눈이 밝아야 한다. 안력이 있어야 한다.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충성하되 표현하여 인류가 되라

세상에는 많은 법칙이 있지만 특히 이 세 가지가 매우 중요한 것 같다. 자연법칙, 심리법칙, 영계법칙이 바로 그것이다. 몸이 자연법칙을 따라야 한다면 마음은 심리법칙을, 영은 영계법칙을 따라야 한다. 여기서 핵심은 심리법칙이다. 마음은 영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따라서 모든 게 결정된다. 사실 열정, 용기, 믿음, 인내는 다 마음의 문제다. 마음이 게으름을 선택하는 순간 열정은 없어지고, 마음이 두려움을 선택하는 순간 용기는 없어진다. 마음이 의심을 선택하는 순간 믿음은 없어지고, 마음이 포기를 선택하는 순간 인내는 사라진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착하고 좋은 마음이란 첫째로 듣고 배우는 마음의 겸손이다. 둘째도 배우고 깨닫는 마음의 지혜가 필요하다. 많이 배웠지만 깨달음이 없으면 변화도 없다. 그래서 주님은 듣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깨닫는 것을 강조하셨다. 셋째로 깨닫고 지키는 마음의 인내다. 열 개를 깨닫고도 하나를 지키지 못하면 아무 결실도 없다.

현실의 정글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려는 크리스천이라면 우선적으로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 즉 영성이 깊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과 함께 세 가지가 더 필요하다. 한계를 모르는 상상력, 끝까지 추진해서 결과를 만들어내는 뚝심, 그리고 꼼꼼하고 세밀한 전문성이다. 특히 전문성이 중요하다. 전문성이 없으면 상상력은 공허함으로, 뚝심은 무모함으로 끝날 수 있기 때문이다.

땅땅거리고 살자

땅을 가지고자 하는 소원은 성경적으로 볼 때 정당하다. 우리도 야베스처럼 땅을 주시라고, 더 넓은 땅을 주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머리 둘 곳도 없이 가난하게 사신은 우리도 그렇게 가난하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우리로 하여금 그런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고후8:9).

생명의 하나님, 경제의 하나님

사업가는 국가에 세금을 내고 종업원의 가정경제를 책임진다. 좋은사업장을 만들고 경영수익을 통해 선교, 복지, 병원, 운영, 문화사업을 함으로써 이 땅에 주님의 뜻을 심고 그만큼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그렇다면 사업가가 키워야 할 자질은 무엇인가?

첫째로 분명한 사명감이다. 둘째로 강한 소원이다. 셋째로 좋은 재능이다. 사람을 의지하면 메마른 광야인생이요 하나님을 의지하면 풍성한 물가인생이라는 것이다(렘17:5-8).

하나님은 어떻게 구체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가. 첫째 믿음으로 생각하면 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고 축복하신다. 나는 잘 된다. 잘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무제한으로 공급하신다.’

둘째 믿음으로 기도하면 된다. 하나님을 앞장세우고 크고 작은 일을 놓고 기도한다. 하나님이 내 사업의 상관이 되시게 해 드린다.

셋째 믿음으로 모험하면 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시고 축복하신다. 믿음은 모험하는 것, 실험하는 것, 도전하는 것, 시도하는 것이다. 남들의 승리를 이야기하는 스톨리텔러에 머물지 말고 자신의 승리를 이야기할 수 있는 스토리메이커가 돼야 한다.

넷째 믿음으로 드리면 된다. 물질의 청지기가 되겠다면서 물질을 심는 데 인색하면 안 된다.


2 실패가 두려워 행동하지 못하면 그 무엇도 얻을 수 없다

피땀으로 적시는 인생과 믿음

주님이 주신 인생을 땀나게, 슬기롭게, 즐겁게 살면 성취하는 인생이 되고, 주님의 은총이 부어지면 폭발적으로 번식하는 인생이 된다. 우리는 풍성하게 나누기 위해서 풍성하게 성취하는 인생을 살아야 하겠다. 아직 그렇지 않다면 다음의 세가지를 자문하면서 더욱 분발하자.

첫째로 “남들보다 더 일찍 시작했는가?”하는 것이다.

둘째로 “남들보다 더 대가를 치렀는가?”라는 것이다.

셋째로 “남들보다 더 집중했는가?” 하는 것이다.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최후의 순간까지 몰아치는 집중력이다. 1%의 유전자 차이가 사람과 침팬지를 결정하듯이 1%의 집중력 차이가 승패를 가른다. 성취하기 직전에 그만 두는 사람과 성취할 때까지 계속하는 사람의 집중력 차이는 1%에 지나지 않는다. 집중 없이는 성취할 수 없다.

믿음은 반드시 기적체험으로 이어진다. 믿음은 참으로 중요하다. 눈에 안 보이시는 하나님과 눈으로 보고 사는 우리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 믿음이다.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인가?

첫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성경말씀을 받아들이고 설교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받아들이는 믿음이 내면의 기적, 환경의 기적을 일으킨다.

둘째로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막다른 골목일지라도 생각을 바꾸면 돌파구가 열린다.

셋째로 시도하는 것이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요, 만리장성도 벽돌 한 장부터다. 씨를 심어야 꽃이 피고 땅을 파야 물이 나온다.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다.

넷째로 공격하는 것이다.

다섯째로 나서는 것이다. 믿음은 주저 없이 나서는 용기다.

여섯째로 반복하는 것이다. 지속적인 반복속에 믿음이 있다.

일곱째로 복종하는 것이다. 하라면 즉각적으로 실행하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진정한 믿음에는 토씨가 없다. 믿음은 즉각적이고 온전한 복종이다.

여덟째로 희생하는 것이다.

불 같이 도전하라

실패가 없는 성공은 없다. 성공은 실패를 통과한다. 절망의 층도 지나고 고통의 층도 지나고 실패의 층도 지나야 성공의 층이 나온다. 실패가 두려워서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의식이 변해야 인생이 변한다. 부요한 의식이 있어야 부요한 환경이 열리고, 형통한 의식이 있어야 형통한 환경이 열리며 존귀한 의식이 있어야 존귀한 환경이 열린다. 내부적인 의식이 외부적인 환경을 앞선다.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면 되는 행동’을 하게 된다.

담장 너머로 모자를 던져라

지금 어떤 자리에 있든지 거기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려면 세 가지 자세가 필요하다.

첫째로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자세다. 잘 풀리면 주님의 은혜요, 안 풀리면 더 큰 복을 주시려는 주님의 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삶은 주님 안에서 만사형통이다. 모든 것을 합력해서 좋은 것을 이루시는 주님을 굳게 믿으니 만사가 긍정적이게 된다. 지금 복을 받으면 좋고 아니면 나중에 더 받게 되는 좋다. 그것도 아니면 우리의 후대가 받을 것이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고 행한 대로 갚아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둘째로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다. 성경에는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366번 있다고 한다. 그것은 우리가 매일을 두려워하면서 산다는 증거다. 그러나 말씀이 있으면 믿음이 생기고 기도하게 된다. 그래서 성령충만 하게 되어 자유함 속에서 마음껏 일을 저지르게 된다. 두려움을 이기려면 말씀충만이 선행돼야 한다.

셋째는 끈기를 가지는 자세다. 어린이는 뒤집기, 기기, 일어서기, 가기를 하려고 끊없이 도전한다. 어린이는 어떤 목표물을 보면 앞의 장애물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목표물만 바라보고 전진한다. 우리는 다 한 때, 그렇게 눈부신 끈기를 가졌었다. 그러다가 자꾸 장애물을 만나면서 끈기를 잃고 말았다. 목표에 집중하고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물에 집중하고 적응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안 된다. 눈도, 마음도, 몸도 장애물을 떠나 목표로 이동해야 한다. 그냥 되는 게 없다. 목표를 세우고 눈부신 끈기로 도전해야 한다.

이것이 일꾼이다

일꾼의 자질이 무엇인가? 첫째는 열정이다. 일단 명령이 떨어지고 임무가 주어지면 즉시 수행하는 것, 이것이 열정이다. 열정은 불덩어리다. 그렇기 때문에 열정이 있으면 온갖 장애물도 다 녹인다. 열정은 전염병과 같다. 열정은 금방 다른 사람들한테 옮겨 붙는다. 열정이 있는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감동을 불러일으켜 다른 사람들을 전염시키며 불가능한 것들도 이루어낸다. 일군의 첫째 자질은 분명한 비전과 목표 그리고 뜨거운 열정이다. 열정이 있는 사람은 자신도 돌고 남도 돌게 한다. 그러나 열정이 없는 사람은 리더가 돌려 주어야 한다. 스스로 도는 사람이 많고 또 남을 돌리는 일꾼이 많으면 그 조직은 아주 역동적이게 된다. 비전과 목표가 분명하고 열정이 있으면 자발적으로, 주도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리더십이란 스스로 움직이며 또 남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리더가 누구인가. 스스로 움직이고 남을 움직이게 하는 사람이다.

일꾼의 둘째 자질은 지혜다. 지혜란 똑같은 일에 더 많은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똑같은 일이라도 독창성을 겸비하여 효과적으로 민첩하게 처리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상황을 잘 파악하고, 사람을 잘 관찰하고 사리판단을 잘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지혜를 구해야 한다. 기도해서 구하고 성경을 읽어서 구하고 책을 읽어서 구해야 한다. 효과적인 일꾼이 되려면 무엇보다 성령 충만을 유지해야 한다. 지혜의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셋째 자질은 투명성이다(마25:21). 착하다는 것, 정직하다는 것은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투명하다는 것이다.

넷째 자질은 충성심이다(마25:21). 작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한다. 처음부터 크고 귀한 일,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작은 일에서 통과한 사람이 크고 귀한 일, 많은 일도 맡게 된다. 이것이 하늘의 이치요, 땅의 이치다.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큰 사람, 큰일을 사용하시지 않는다. 작은 일이라도 일단 시작하고 꾸준히 계속하면 크고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이다. 작은 사역이 쌓여 위대한 사역을 만든다. 내가 맡은 직분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소홀하게 다루면 주님은 더 나은 직분을 맡기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의 직분이 무엇이든지 간에 잘 감당해야 한다.

다섯째 자질은 끝맺음이다(마25:19). 시작이 있으면 끝을 봐야 한다.

일꾼에게는 열정과 지혜, 투명성과 충성심, 그리고 끝맺음이 있어야 한다. 이런 자질을 갖춘, 좋은 일꾼은 첫째로 주인의 칭찬을 받게 된다. 윗사람한테 칭찬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다. 좋은 일꾼은 둘째로 사역이 더 성장하게 된다. 처음에는 맡은 일이 작았지만 점점 더 크고 귀하고 많은 일을 맡게 된다. 좋은 일꾼은 셋째로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된다. 좋은 일꾼은 자신이 수행한 사역을 통해 주인을 더 신뢰하게 되고 주인도 그를 더 신뢰하게 되는 선순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군사다

주님은 군사를 찾으신다. 주님의 원수가 존재하고 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군사는 네 가지 자질로 요약된다.

군사의 첫째 자질은 열정이다. 열정이 있어야 활동이 증가하고 활동이 증가하면 열매도 증가한다.

군사의 둘째 자질은 용기다. 열정만으로는 리더가 될 수 없다. 용기도 있어야 한다. 용기란 두려움을 이기는 힘이다. 두려움과 무서움, 불안과 염려는 아무 것도 못하게 한다. 두려움은 숨게 하고 갇히게 하고 아무 것도 못하게 한다.

군사의 셋째 자질은 절제다. 명견과 잡견, 명마와 잡마의 차이는 절제다. 명견을 며칠을 굶겨도 독이 든 고기는 먹지 않는다. 며칠 굶은 명마는 물가로 이끌어도 중지 신호에 즉시 멈춘다. 멈출 줄 아는 절제가 명견, 명마를 결정한다. 용기는 넘치지만 배부른 사람, 술 취한 사람, 치마폭에 쌓인 사람, 군화를 벗어 제치고 알몸으로 쿨쿨 자는 사람, 아둔한 사람은 이미 군사가 아니다. 밥을 먹어도 몸이 가볍게 먹고, 군복을 입어도 몸이 가볍게 입어야 한다. 새우잠을 자도 군화를 신고 자다가 상부명령이 떨어지면 즉시 출동할 수 있도록 민첩해야 한다. 자기 절제 없이는 민첩할 수 없고 민첩하지 않고서는 용기가 있어도 삼손의 최후만 있을 뿐이다.

군사의 넷째 자질은 리더십에 대한 추종이다.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사람은 군사가 될 수 없다. 자신의 스타일을 버리고 주군의 스타일에 맞출수록 군사답다.

예수한국의 비결

내매교회는 지세로 보아 도무지 믿기지 않는 ‘역사교회’다. 1906년 구한말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조선의 이 외진 곳에 초대교인들이 교회를 세우고 유림 가문에서 파문당할 각오를 하고 보이지도 않는 신을 위해 기도를 하다니.

이곳 출신 강재원(?∼1927·목사)은 출향하여 대구 약령시(藥令市)에 머물던 중 전도책자를 접하게 된다. 조선 전도여행하던 미국 장로교 월리엄 베어드(1862∼1931·숭실대 설립자) 선교사가 뿌린 책자였다. 야소교를 믿게 된 강재원은 개명한 세상의 필요성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와 50가구 남짓한 마을에 예배 처소를 세웠다. 초대교인 유병두씨 집에서였다. 그리고 교인이 늘어나자 자신의 집에 십자가를 높이 달아 교회의 모습을 갖췄다.

그 무렵 이 마을의 또 다른 인물 강병주(1882∼1955)는 젊은 날 승려가 되겠다고 해인사로 향하던 중 회심하여 훗날 평양신학교를 졸업, 목사가 됐다. 교육자 한글운동가 농민계몽가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두 사람은 고향에서 의기투합해 내매교회를 중심으로 마을 전체를 복음화했다. 강병주의 부친 강기원은 성격이 강포하다며 호되게 야단을 쳤던 아들의 변화에 놀라 예수를 믿을 정도였다.

두 사람은 ‘예루살렘 이상촌’ 건설을 위해 향약 6개조를 만들어 실천했다. ‘우상숭배 금지와 미신타파’ ‘음주 도박금지’ ‘일경(日警) 출입금지’ ‘신·불신 막론 관혼상 지원’ ‘소 외에 가축사육 금지 통한 청결한 마을 가꾸기’ ‘주일 우물 사용 금지’와 같은 것이었다.

일경 출입을 금지시켜 가며 신앙을 지켜온 내매교회는 1948년 9월 좌우대립 속에 좌익에 의해 6명의 성도가 숨졌고, 내매교회도 불탔다. 앞서 남녀유별의 유교사상 때문에 헌당했던 ‘ㅅ자’ 예배당은 급격한 교인 증가로 새 성전을 헌당하면서 아쉽게도 사라졌었다. ‘ㅅ자 교회’는 한국 초대교회 건축사적 의미로도 복원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이 교계와 건축학계의 의견이다.

또한 1910년 설립한 교회학교 부설 내명학교는 경북 북부 첫 조선총독부 인가 근대식 학교로 장로교단의 거목 강신명(1909∼1985) 목사 등을 비롯한 인재의 산실이었다. 내명학교는 내명국민(초등)학교에서 1991년 평은초교 내명 분교로 격하됐다가 95년 평은초교에 흡수되면서 폐교된다.

그러나 1915년 내매교회 여전도회가 마련해 기증한 땅 위에 설립됐던 학교 건물은 지금도 교회 맞은편에 쓸쓸히 남아 있다.

내매교회를 중심으로 내명학교, 내명마을 출신은 근대화시대 기독교 신앙으로 소금의 역할을 하며 살아간 이들이 적잖다. 계명대학 설립자 강인구 목사, 강신정 전 기독교장로교 총회장, 강병도 전 창신대 총장, 강진구 전 삼성전자 회장 등이 대표적이다.

한데 강산과 인걸이 분명한 ‘한국의 이스라엘 이상촌’이 곧 수몰된다. 건설 중인 영주댐이 완공되고 담수가 시작되면 2013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 이에 따라 1910년대 건축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내명학교(현 사택), ‘ㅅ자 교회터’ ‘여전도회 기증 학교터’ 등을 더는 볼 수 없게 된다.

함오호 목사와 교인이 영주의 모교회 ‘내매교회 이주 복원계획안’을 만들어 영주시, 문화재청 등에 기독교 근대문화유산으로 되살려 달라는 청원을 내고 있으나 교단 및 교계의 전폭적인 지지가 뒤따르지 않는 한 이 유적을 이어받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수몰지는 쓸쓸하다. 마을앞 은빛모래 고운 내명천을 따라 4㎞ 거리에 위치한 면사무소, 그리고 천변을 따라 계속 내려가다 만나는 중앙선 폐역 평은역 등은 고요하다 못해 을씨년스럽다. 부모가 죽은 후 찾은 고향 마을 같은…또는 예수 사후 거리 풍경 같다고나 할까.

그런데 오후 1시30분. 내매교회 마당이 부산스러웠다. 영주남부지역 8처교회 부활절 연합예배를 위해 산 넘어 망월교회로 가는 봉고차가 시동을 걸었다. 유순희(52) 집사 등이 밝은 얼굴로 나이든 교인을 부축해 태웠다. 골구렁 골을 따라 차가 산으로 오르자 수몰지역이 한눈에 보였다. 멀리 복음을 들고 내매마을로 들어오던 초대교인들이 걷던 신작로가 강과 나란히 이어졌다.

3. 특별한 수고 없이 별다른 은혜를 기대하지 마라

폭발적으로 번식시키는 은혜

부지런하고 지혜롭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밭을 잘 갈아도 비가 안 내리면 소용이 없다. 은혜의 단비가 내려야 한다. 은혜가 내리면 안 되는 것도 되고, 못하는 것도 한다. 은혜가 내리면 무엇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어디를 가든지 술술 풀린다.

은혜만이 바꾼다

우리는 은혜 없이 살 수 없다. 천국에서도 은혜로 살아야 하고, 이 세상에서도 은혜로 살아야 한다. 은혜는 3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은혜는 아무 수고 없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 사함을 받아 천국에 가는 것이다.

둘째 은혜는 수고하지 않았는데도 거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좋은 나라에 태어나서 좋은 부모를 만나고 좋은 교육을 받아 좋은 유산을 물려받는 것이 그런 은혜다. 심어야만 거두는게 아니다. 심지도 않았는데 거두기도 한다.

셋째 은혜는 우리가 수고하는 것에 복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수고한 것에 넘치도록 복을 주시고 수고한 대로 복을 주신다. 수고했다고 잘 된다는 보장이 없다(시127:1,2).

은혜를 많이 받으면 부족한 사람이 온전하게 바뀌고 미련한 사람이 지혜롭게 바뀐다. 험난한 사람이 평안하게 바뀌며 약한 사람이 강하게 바뀌고 가난한 사람이 부유하게 바뀐다. 우리의 형편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것은 하나님이 부으시는 은혜다.

하나님을 챙겨드리면 은총을 받는다. 하나님을 위해 시간을 드리면 시간이 남고, 물질을 드리면 물질이 남는다. 마음을 드리며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몸을 드리면 건강하게 된다.

주님의 관심을 사로잡아 주인공이 되자

행운은 그냥 찾아오지 않는다. 찾아오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누가 행운아인가. 우연히 행운을 만난 사람이 아니라 집요하게 행운을 불러들이는 노력을 하는 사람이다.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나를 돕도록 노력하는 사람이 행운아가 된다는 말이다. 주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 축복, 기적도 불러들이는 노력을 하는 사람의 것이다.

누구나 주님의 관심을 살 수 없고 아무나 주님의 특별한 복을 받을 수 없다. 남달라야 한다. 남과 같거나 남보다 못한 수고를 하면서 남보다 나은 복을 받고자 한다면 바른 심보가 아니다. 남다른 차이를 내야 한다.

비를 내리는 것은 하늘의 몫이다. 그러나 그 비를 받아서 열매를 맺는 것은 땅의 몫이다. 땅을 옥토로 만들기 위해서 계속해서 거름을 주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땅을 옥토로 만드는 피땀 어린 작업은 내가 해야 하는 몫이다. 심고 가꾸는 작업도 나의 몫이다. 많은 땅을 옥토로 만들고 거기에다 많이 심고 열심히 가꾸면 주님이 많은 열매를 주신다. 내가 땅을 만들고 심고 가꾸는 수고를 통해 주님은 자라나게 하시고 열매 맺는 은혜를 베푸신다. 그렇다면 수고의 크기가 수확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이다. 특별한 수고 없이는 특별한 은혜를 기대할 수 없다.

믿음을 시도하여 운명을 바꿔라

알렉산더 대왕이 신하들에게 땅을 나눠줄 때였다. 공이 많은 장군들에게 이집트, 시리아, 마케도니아가 분배되기 시작했다. 리시마쿠스 장군은 평소 왕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가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왕이 물었다.

“리시마쿠스, 그대는 원하는 것이 없는가?”

사람들은 그가 사소한 것을 구할 줄로 알았다. 그러나 그의 대담한 요구에 사람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소아시아를 주십시오.”

왕이 다시 물었다.

“리시마쿠스, 내가 소아시아를 줄 것이라고 그대는 믿었는가?”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그대에게 소아시아를 주겠노라.”

그렇게 해서 소아시아의 넓은 땅이 그에게 할당됐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있다. 대단한 기적을 일으키려면 큰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다. 단순한 믿음이 있기만 하면 큰 기적이 일어난다. 믿음의 대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진정한 믿음의 유무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믿음은 겉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는 반드시 기적을 끌어당긴다. 제자들의 관심사는 믿음을 더 키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사는 제자들이 단순히 믿음을 갖는 것이었다.

시작하는 곳에 믿음이 있다. 시작이 반이다. 시작하면 끝이 온다. 마차에서 떨어지면 또 타면 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목적지에 당도하게 될 것이다. 믿음으로 시도하고 인내하고 결실하자.

끝까지 신뢰하라

맨 주먹의 영웅, 이순신의 말이다.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머리가 나쁘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첫 시험에서 낙방하고 서른둘의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했다. 좋은 직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마라. 나는 14년 동안 말단 수비 장교로 변방오지를 돌았다. 윗사람의 지시라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불의한 직속상관들과의 불화로 수차례 파면을 당했다. 몸이 약하다고 고민하지 마라. 나는 평생 고질적인 위장병과 전염병으로 고통 받았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마라. 나는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후 마흔 일곱에 제독이 됐다. 조직의 지원이 없다고 실망하지 마라. 나는 스스로 논밭을 갈아 군자금을 만들었고 스물세 번 싸워 스물세 번 이겼다. 윗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하지 마라. 나는 임금의 끊임없는 오해와 의심으로 모든 공을 뺏긴채 옥살이를 해야 했다. 자본이 없다도 절망하지 마라. 나는 빈손으로 돌아온 전쟁터에서 열두 척의 낡은 배로 133척의 적을 막았다. 옳지 못한 방법을 쓰면서 가족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스무 살의 아들을 적의 칼날에 잃었고 또 다른 아들들과 함께 전쟁터로 나섰다. 죽음이 두렵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적들이 물러가는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김덕수, 맨 주먹의 CEO 이순신에게 배워라, 밀리언 하우스, 2004)

사는 것은 기죽는 일의 연속이다. 기죽지 않으려고 해도 기죽기 십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죽지 말고 항상 믿음을 선택하고 강해져야 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시지 않는가.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한 되는 것을 되게 하시며 멈춘 것을 가게 하신다.

끝까지 주님을 신뢰한다는 것, 그것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내일 죽는다 하더라도 오늘 영적인 진보가 있어야 하겠다.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