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과 삶/경건서적산책

C.S. 루이스 기쁨의 하루(월터 후퍼, 홍종락외, 홍성사, 2011)

기독항해자 2012. 9. 11. 20:34

C.S. 루이스 기쁨의 하루(월터 후퍼, 홍종락외, 홍성사, 2011), 2012년 9월에 읽음



『C. S. 루이스 기쁨의 하루』는 C. S. 루이스 재단의 문학 자문위원이자 루이스의 비서였던 월터 후퍼가 교회력에 따라 엮은 선집이다. 이 책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순전한 기독교>, <고통의 문제>, <예기치 못한 기쁨>, <천국과 지옥의 이혼> 등에서 발췌한 글들로 구성되었으며, 365일 곁에 두고 읽을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책은 루이스의 저작을 다 읽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루이스 책들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우며, 이미 읽은 사람들에게는 루이스의 주옥 같은 글들을 다시 묵상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책은 단번에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음미하면서 읽어야 한다. 음미하면서 읽어가다보면 기독교 세계로의 여행을 쉽게 항해할 수 있을 것이다.

1월 25일 회심의 본질

이처럼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은 어떤 의미에서 도덕적으로 더욱더 열심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보면 이런 노력은 우리를 고향으로 인도해 주지 못합니다. 이 모든 노력은 하나님을 향하여 “당신이 이 일을 하셨습니다. 저는 못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그 지극히 중대한 순간까지만 우리를 인도해 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그 순간에 도달했을까?”라는 질문은 던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털썩 주저 앉아 자기 속을 들여다보면서 그 지점에 얼마나 가까이 왔나 확인하려 들지 마십시오. 그러면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우리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일들은 대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일어납니다. “와! 지금 내 키가 크고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중에 되돌아보고 나서야 비로소 어떤 일이 있어났는지 깨닫고, ‘이게 바로 키가 자란다는 거로구나’하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지요. 아주 단순한 일에서도 그렇습니다. 예컨대 언제 잠이 오나 초조하게 신경 쓰는 사람은 밤새도록 잠 못 들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제가 말하는 이런 일은 사도 바울이나 존 번연의 경우처럼 꼭 급작스럽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나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바람에 이 일이 몇 시에 일어났는지, 심지어 어느 해에 일어났는지조차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의 본질 그 자체이지, 변화가 일어날 때의 느낌이 어떠했느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노력을 노력을 의지하던 상태에서 자신에게 완전히 절망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상태로 변화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순전한 기독교 3장 그리스도인의 행동)

1월 26일 사도 바울을 둘러싼 엄청난 오해

사도 바울을 둘러싼 놀라운 오해 하나가 현대인의 정신을 오랫동안 지배해 왔습니다. 그 내용인즉, 예수님은 친절하고 소박한 종교(사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를 선포했는데 이후 사도 바울이 그것을 잔인하고 복잡한 종교(사도 서신에서 볼 수 있는“로 타락시켰다는 것입니다. 정말 도저히 지지할 수 없는 주장입니다. 오히려 가장 무시무시한 본문들은 모두 우리 주님의 말씀이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될 거라고 바랄 수 있는 근거가 될 만한 성경구절의 출처는 모두 사도 바울입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주인의 가르침을 어떤 식으로건 바꾸었음을 입증할 수 있다면, 그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 방향으로 바꾼 셈이 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교리와 다른, 바울 이전의 기독교 교리가 있다는 제대로 된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사도 서신은 대체로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초기의 기독교 문서에 해당합니다. 사복음서는 그 이후에 나왔습니다. 사복음서의 내용은 기독교 신앙의 명제를 담은 ‘복음’이 아닙니다. 사복음서는 이미 회심한 사람들,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위해 쓰였습니다. 사복음서가 ‘복잡한 내용들’(신학)을 상당수 제외시킨 까닭은 이미 그 내용으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을 위해 쓴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서신은 사복음서보다 근본적이고 더 중심이 됩니다. 물론 사복음서가 기록하고 있는 그 위대한 사건들이 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심적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성육신, 십자가 처형, 부활)이 먼저 있었고, 그 일에 대한 최초의 신학적 분석이 사도 서신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직접 알았던 세대가 죽어갈 무렵, 신자들에게 주님의 위대한 행하심과 그분의 일부 말씀에 대한 기록을 남겨 주기 위해 복음서들이 기록되었다.(피고석의 하나님 2부 현대어 번역 성경)

1월 31일 중간 지점은 없다

중간 지점은 없고 다른 종교에서는 이와 비슷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누군가 부처를 찾아 “당신이 브라마의 아들입니까?”라고 물었다면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아들이여, 그대는 여전히 환상의 속세에 빠져 있구나.” 소크라테스에게 찾아가 “당신이 제우스입니까?”라고 물었다면 그는 우리를 비웃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마호메트에게 가서 “당신이 알라입니까?”라고 물었다면 그는 옆 사람에게 옷을 맡겨 놓고는 우리의 목을 잘라 버렸을 것입니다. 공자에게 가서 “당신이 천제입니까?”라고 물었다면 그는 “본성에 합하지 않은 말들은 적절하지 않다”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위대한 도덕적 스승이 그리스도가 한 말과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제가 볼 때, 그런 종류의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거나, 정신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망상에 시달리는 미친 사람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자신에게 어울리는 토스트 한 조각을 찾는 삶은 계란이라고 생각한다면 정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상일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게다가 그분이 자신을 단순한 도덕적 스승으로 여긴 적이 없다는 사실도 가볍게 언급할 수 있습니다. 그분을 실제로 만난 사람들은 그런 식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분을 만난 사람들은 주로 증오나 두려움, 흠모, 이렇게 세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분은 적당히 인정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피고석의 하나님 1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2월 1일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그분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지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그분이 우리를 어떤 존재로 만들기 원하시는지 묻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이 말하는 내용은 다른 모든 스승이 말한 내용과 전혀 다릅니다. 다른 스승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우주에 대한 진리다. 이것이 네가 가야 할 길이다.” 그러나 그분은 이렇게 말하십니다. “내가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도 나를 통하지 않고는 절대적 실재에 이를 수 없다. 자기 목숨을 지키려고 애를 쓰면 너는 망하고 말 것이다. 자신을 버리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부끄럽게 여기면, 네가 이 부름을 듣고 외면하면, 나도 숨김없는 하나님으로 다시 올 때 너희를 외면하겠다. 무엇이건 너를 하나님과 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건 내다버려라. 그것이 네 눈이라면 빼어버려라. 그것이 네 손이면 찍어버려라. 네가 자신을 첫째로 여기면 너는 마지막이 될 것이다. 무건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너라. 내가 그것을 처리해 주겠다. 너희 죄, 너희 모든 죄가 씻겼고, 나는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다. 나는 중생이요, 나는 생명이다. 나를 먹고 나를 마셔라. 나는 너희 음식이다. 끝으로 두려워 말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것이 진짜 중요한 문제입니다.(피고석의 하나님, 1부 예수 그리스로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2월 2일 선택의 무게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선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우리가 염려하는 그런 편애가 전혀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선택받은 민족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그들 자신의 영예나 쾌락을 위해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바로 선택받지 못한 이들을 위해 선택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들은 말씀은 ‘그의 씨’(즉 선택받은 민족)를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선택받은 민족은 다름 아니라 무거운 짐을 지기 위해 선택된 것입니다. 그들은 큰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깨달았듯이, 그들의 고난은 다른 이들에게 치유를 가져다주는 고난이었습니다. 최종 선택을 받은 여자, 마리아에게는 어머니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이 임합니다. 그녀의 아들, 성육하신 하나님은 ‘고통을 많이 겪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아래로 임하여 오신 사람, 그래서 찬미의 대상이 되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신 그분은 누구보다도 고통을 많이 겼으셨던 분입니다.(기적 14장 장엄한 기적)

2월 12일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호기심

이 문제를 둘러싼 오해가 커진 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상당 부분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계시의 존재 목적이 모든 자연계를 비춰 주어 자연이 자명해지고 모든 의문이 풀리는 것인 양 말하는 나쁜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계시는 타락한 인간이라는 특정한 동물을 그의 절박한 어려움에서 구해 주려는, 순전히 실용적인 목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자유분방한 호기심을 채우고 싶어 하는 인간의 탐구 정신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찾아오셔서 구속하셨음을 압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창조 세계의 전반적인 특성에 대해 얼마나 말해 줄까요? 한 커다란 농장의 병든 암탉 한 마리에게 준 약이 영국 농업의 전반적 특성에 대해 말해 주는 정도와 비슷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길을 택해야 생명의 근원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압니다. 그 지시를 진지하게 따라갔던 사람은 누구도 속았다는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다른 피조물들이 존재하는지, 그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무생물은 생물을 섬기기 위해서만 존재하는지 아니면 다른 존재 목적이 있는지, 우주의 광대함은 다른 어떤 목적으로 가는 수단인지, 환상인지, 아니면 무한한 에너지를 만들어 내기 위한 자연스러운 환경인지. 이런 점들에 대해서는 그저 추측만 할 수 있을 따름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기독교는 방대한 우주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방대한 우주를 두려워해야 할 쪽은 우리 행성의 생물학적 또는 사회적 진화에 존재의 모든 의미를 두고 있는 체계들입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두려움에 떨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창조적 진화론자, 베르그송주의자, 쇼주의자 또는 공산주의자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침몰하는 배와 운명을 같이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그들은 이미 발견된 세상의 본질을 무시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단 하나의 행성에서 볼 수 있는 상승 경향에 집중함으로써 우주 전체의 불가피한 하강 경향, 낮아진 온도와 돌이킬 수 없는 무질서로 가는 경향을 잊을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피고석의 하나님, 3장 교리와 우주)

3월 5일 사회도덕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한 기독교의 도덕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 영역에서 새로운 종류의 특별한 도덕을 설파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황금률(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은 모든 사람이 늘 옳다고 생각해 온 바를 요약한 것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도덕 선생들은 새로운 도덕을 소개한 적이 없습니다. 가짜와 괴짜들이 새 것을 소개하는 법입니다. 존슨 박사 말처럼 “사람은 가르쳐야 할 때보다 기억시켜야 할 때가 더 많습니다.” 모든 도덕적 스승들의 진정한 임무는 우리가 자꾸 외면하고 싶어하는 단순한 옛 원칙들을 몇 번이고 다시 일깨우는 것입니다. 말을 넘기 싫어하는 담장 앞으로 자꾸 끌어가고 또 끌어가듯이, 아이가 공부하기 싫어하는 부분을 다시 보게 하고 또 보게 하듯이 말입니다.

두 번째로 밝힐 것은 기독교에는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원칙을 특정 시대 특정 사회에 적용시키기 위한 세부적 정치 프로그램이 없으며 그런 것이 있노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는 점입니다. 기독교에는 그런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으로, 한 시대나 한 공간에 맞는 특정 프로그램은 다른 시대나 다른 장소에는 맞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기독교는 그런 게 아닙니다. 기독교는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주라고 할 뿐, 그 조리법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으라로 할 뿐,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고사하고 우리 말 문법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정규적인 예술과 학문의 자리를 대신 차리하려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술과 학문이 기독교의 뜻에 따르기만 한다면, 그 모든 것에 새로운 생명을 공급하는 에너지의 원천이자 그 모든 것에 올바른 임무를 부여하는 관리자가 되어 줍니다.(순전한 기독교 3장 그리스도인의 행동)

3월 13일 분별력

분별력이란 실생활에 적용되는 양식을 뜻하는 말로 자신이 지금 어떤 행동을 하고 있으며 그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지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분별력을 덕목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착하기만 하면 어리석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첫째로 대부분의 어린 아이들은 자기가 정말 관신 있는 일에 대해서 상당한 분별력을 발휘하며, 아주 지각 있게 사고합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이 지적했듯이 그리스도는 지성의 영역에서 아이처럼 되라고 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비둘기처럼 순결할 뿐 아니라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바라시는 것은 아이의 마음과 어른의 머리입니다. 그는 우리가 착한 아이처럼 순진하고 한결같으며 정 많고 잘 배우기를 바라시지만, 동시에 우리의 지성은 어느 면에서나 그 임무를 다할 준비를 하고 있으며 최성의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기를 바라십니다.(순전한 기독교 3장 그리스도인의 행동)

3월 14일 절제

절제는 불행히도 그 의미가 변절된 단어 중의 하나입니다. 요즘 이 말은 대개 ‘절대 금주’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지요. 그러나 이 두 번째 덕목에 절제라는 이름을 붙였던 그 당시에 전혀 이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절제는 특별히 음주와 관련된 말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쾌락과 관련된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히 삼간다는 뜻이 아니라 적절한 정도까지만 하고 그 이상은 하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전부 절대 금주해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절대 금주를 요구하는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회교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일단 마시기 시작하면 도저히 멈추지 못하는 성향이 있다거나 자기가 그런 성향인 것은 아니지만 주변에 잘 취하는 사람이 있어서 자극하지 말아야 하는 상황처럼 특별한 경우에는 독한 술을 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자기한테 마땅한 이유가 있어서 술을 삼가는 것이지 남이 술 마시는 것을 죄로 생각해서가 아니라는 것, 따라서 남이 적당히 술을 즐기는 얼마든지 좋게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특정 부류의 악인들에게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는 자기들이 포기하는 것은 다른 사람도 다 포기해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기독교적인 방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특별한 이유로 어떤 것-결혼이든 고기든 술이든 영화든-을 포기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 자체를 악하다고 말하는 순간, 혹은 그런 일을 하는 다른 사람을 경멸하는 순간, 그는 잘못된 길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현대에 와서 ‘절제’라는 말을 음주 문제에만 국한해서 사용하는 바람에 생긴 큰 해악이 하나 있습니다. 음주 외에 다른 많은 부분에서도 똑같이 무절제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골프나 오토바이를 생활의 중심으로 삼은 남자나, 옷이나 카드놀이나 애완견에 온통 정신이 팔린 여자는 저녁마다 술에 취하는 사람만큼이나 ‘무절제한’ 사람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쉽게 드러나지 않지요. 카드놀이광이나 골프광이 길 한복판에 쓰러져 가는 경우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겉모습에 속지 않으십니다.(순전한 기독교 3장 그리스도인의 행동)

4월 1일 교만

기독교 스승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가장 핵심적인 악, 가장 궁극적인 악은 교만입니다. 성적 부정, 분노, 탐욕, 술 취함 같은 것들도 이 악에 비하면 세발의 피에 불과합니다. 악마는 바로 이 교만 때문에 악마가 되었습니다. 교만은 온갖 다른 악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맞서는 마음 상태입니다.

제 말이 과장처럼 들립니까? 그렇다면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조금 전에 저는 교만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교만을 더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여러분이 얼마나 교만한지 알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거나 알아주지 않거나 쓸데없이 내 일에 참견하거나 은인 행세를 할 때 얼마만큼이나 싫은 마음이 드는가?”

요점은 각 사람의 교만은 다른 이들의 교만과 경쟁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연회장에서 거물급 인사처럼 행세하는 사람을 볼 때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바로 내가 그런 거물급 인사가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같은 장사를 하는 사람들끼리는 화합이 잘 안되는 법입니다.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다른 악들은 이를테면 다만 우연히 경쟁적이 되는 반면 교만은 본질적으로 경쟁적이라는 것-본성상 원래 경쟁적이라는 것-입니다. 교만은 단순히 무언가를 가지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옆사람보다 더 가져야만 만족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돈 많고 똑똑하고 잘 생긴 것을 뽐낸다고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남보다 더 돈 많고 더 똑똑하고 더 잘 생긴 것을 뽐내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돈 많고 똑똑하고 잘 생겼다면 교만할 거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교만하게 만드는 것은 남과의 비교입니다. 즉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경쟁이라는 요소가 없으면 교만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교만은 다른 악들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경쟁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순전한 기독교 3장 그리스도인의 행동)

4월 10일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합니다. 첫째, 자연의 통상적 안정성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오감이 받아들이는 데이터가 규칙적인 패턴으로 되풀이됨을 인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둘째, 자연 너머의 어떤 실재를 믿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믿음이 다 있어야만 비로소 초자연적인 또는 자연 외적인 실재가 우리의 자연계를 이루는 시공간의 감각적인 것들에 침입하고 그것을 교란시켰다고 하는 다양한 보고를 열린 마음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초자연적인 실재에 대한 믿음은 경험으로 입증되거나 반증될 수 없습니다. 그 존재를 뒷받침하는 논증들은 형이상학적인 것이며 제가 볼 때는 결정적입니다. 그 논증들의 근거는, 우리가 자연계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자연계를 넘어서는 그 무엇을 가정해야 하고 심지어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그 무엇에 속한다고 가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우리의 추론에 타당성이 있다고 주장해야 하는데, 만약 우리의 사고가 뇌의 작용에 불과하고 뇌는 비이성적인 물리적 과정의 부산물에 불과하다면 우리의 추론에 대해 그런 타당성을 전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행동이 단순한 반응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 되려면 우리의 선악 판단에 대해 비슷한 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경우 우리 모두에겐 거북한 결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연’이라는 개념도 우리가 자신에 대해 모종의 초자연적 지위를 주장하고 암묵적으로 도달한 개념입니다.(피고석의 하나님 1부 기적)

7월 9일 마음이 부서지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마음이 부서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최고 지혜라고 한다면, 일단 그렇다고 가정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지혜를 제공하시는 분일까요? 그렇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결국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시는 자리까지 가셨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처받을 수 있는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행위입니다. 무엇이든 사랑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은 분명 아픔을 느낄 것이며 어쩌면 부서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마음은 아무 손상 없이 고스란히 간직하고 싶다면, 누구에게도-심지어 동물에게도-마음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취미와 작은 사치로 조심스럽게 감싸 두십시오. 또 모든 얽히는 관계를 피하십시오. 마음을 당신의 이기심이라는 작은 상자 안에만 넣어 안전하게 잠가 두십시오. 그러나 (안전하고 어두우며, 움직임도 공기도 없는) 그 작은 상자 안에서도 그것은 변하고 말 것입니다. 부서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깨뜨릴 수 없고 뚫고 들어갈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 것입니다. 비극-혹은 비극을 무릅쓰는 일-을 피할 유일한 길은 영혼의 멸망입니다. 천국을 제외하고, 여러분이 사랑의 모든 위험과 동요로부터 완벽하게 안전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지옥뿐입니다.

아무리 무법적이고 무질서한 사랑이라도, 스스로 선택한 자기 방어 차원에서 사랑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봅니다. 그런 사랑 없음은 마치 “저는 당신을 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는 이유로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수건에 싸서 숨겨 놓은 행위와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자신의 행복과 심지어 자연적 사랑에조차 더 신중해지라고 가르치시고 고통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만일 사람이 눈에 보이는 지상의 연인을 향해서도 계산적이라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서는 틀림없이 더 계산적일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랑에 내재해 있는 고통을 피하려고 애씀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분께 바침으로써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자신의 모든 방어 무기를 내어 던짐으로써 말입니다. 만일 우리 마음이 부서질 필요가 있다면, 만일 그것이 그분이 선택하신 방법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그 길을 감수해야 합니다.(네 가지 사랑 6부 자비)

11월 3일 만드는 것과 낳는 것

기독교의 주안점들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붙어 있기만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입니다. 어떤 이는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가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기독교의 주된 개념 중 하나가 아닙니까?”라고 묻습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를 존재하게 하시고 사랑하시며 돌보신다는 점에서는 그는 우리의 아버지 같은 분이시지요.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고 말하는 데에는 틀림없이 무언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우리를 신학의 중심부에 직면하게 합니다.

기독교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되신 것이 아니라 나셨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모든 세계가 창조되기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셨다’는 말이 덧붙어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을 때 동정녀의 아들로 태어나셨다는 사실과는 아무 관계가 없음을 분명히 아시겠지요? 지금 우리는 동정녀 탄생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연이 창조되기 전,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일어났던 어떤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세계가 창조되기 전에’ 그리스도는 창조되신 것이 아니라 나셨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낳는다는 것은 아버지가 된다는 뜻이고, 창조한다는 것은 만든다는 뜻이지요. 이 두 단어의 차이는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낳는 것은 여러분과 같은 종류에 속한 것입니다. 즉 사람은 사람의 아들을 낳고 비버는 비버 새끼를 낳으면, 새는 새 새끼로 부화될 알을 낳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만드는 것은 여러분과 다른 종류에 속한 것입니다. 즉 새는 둥지를 만들고, 비버는 둑을 만들며, 사람은 라디오를 만듭니다. 물론 사람은 라디오보다는 더 자기를 닮은 것, 이를 테면 조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실력 있는 조각가라면 정말 사람과 흡사한 조상도 만들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 해도 그 조상이 진짜 사람이 될 수는 없지요. 조상은 숨을 쉬거나 생각할 수 없습니다. 조상은 그저 사람과 흡사하게 생겼을 뿐입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순전한 기독교 4장 인격을 넘어서 또는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첫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