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하는 삶(켄 가이어, 윤종석, 두란노, 2011), 2012년 8월에 읽음
1. 묵상하는 삶
삶의 성스러움
삶이란 우리 자신의 재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이다. 삶을 성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그 소유권이다(아브라함 헤셀).
우리 이웃의 성스러움
유대인 학자 아브라함 헤셀은 말했다. “인간 앞에 서 있을 때 느끼는, 느껴야 하는 경이는 인간의 본질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직관하는 순간이다. 인간뿐 아니라 무생물도 창조주와 이어져 있다. 모든 존재의 비밀은 그 속에 쏟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에 있다. 모든 사건에는 뭔가 성스러운 것이 담겨 있다.”
우리 삶의 성스러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물이다. 야고보는 말한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우리의 하루가 진정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그 선물을 주신 분의 모습이 그 선물 속에서 조금이라도 보여야 한다.
아브라함 헤셀은 말한다. “만물과 만사에는 특유의 투명성이 있다. 세상은 들여다보인다. 하나님을 완전히 가릴 수 있는 막은 없다. 경건한 사람은 만물의 겉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볼 줄 알며, 그의 인생에 대한 태도는 희망에 찬 외경이다.”
하나님과의 연합의 성스러움
성찬은 평범한 것이로되 비범한 것의 전달 통로가 된다. 평범한 떨기나무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불붙는다. 지상의 돌판에 천상의 손으로 글씨가 새겨진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인간의 손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하늘의 선물. 성찬처럼 우리 손에 들려져 우리를 돌봐 주고 사랑하는 분이 계심을 일러준다.
성스러움을 보려면 걸음을 늦춰야 한다.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 이들의 삶은 언제나 신비롭다. 특별한 것이 전혀 없는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하고 우연한 일 속에서 특별한 기적의 선물을 받는 것이다. 한없이 단순한 설교, 평범하기 짝이 없는 대화, 박학과 거리가 먼 책, 이런 것들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뜻하심에 힘입어 지식과 지혜의 원천이 된다. 그들이 똑똑한 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부스러기까지 정성 들여 줍는 이유가 거기 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소중하며 양분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장 피에르 드 코사드).
성스러움이란 다분히 우리 일상의 평범한 순간 속에 숨어 있다. 일상의 순간 속에서 성스러운 것을 보려면 걸음을 멈추고 더욱 묵상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묵상과 반추를 뜻하는 reflect라는 말은 라틴어의 두 단어에서 왔다. re는 ‘뒤로’라는 말이고 flectere는 ‘굽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묵상이란 마치 거울이 영상이 되받아 좀더 자세히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듯 뭔가를 되돌아보는 것을 말한다. 묵상하는 삶은 하루 중 사물과 사람과 자신과 하나님을 좀더 자세히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한다. 삶의 속도가 빠를수록 그런 기회를 놓치는 일이 많아질 것이다.
인간 삶의 성스러움
정말 중요한 것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통해 우리의 삶 속에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를 통해 그들의 삶 속에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그것이 성스러운 일이다. 그것을 알아보려면 걸음을 늦추고 멈춰야 한다.
모든 생명의 성스러움
원시의 인디언은 성스러운 것과 맞닿아 있었던 것 같다. 문명인인 우리는 동떨어져 있는 것 같다. 그 차이의 원인은 아마도 세상을 대하는 우리의 방식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객관화할 수도 있고 성화할 수도 있다. 객관화한다는 것은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우리의 소용 가치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 소용 가치가 쾌락이든 수익이든 애국심이든. 성화한다는 것은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을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지음받은 대상으로 인식하게 된다.
상대가 인간이든 동물이든 사물이든, 조작이란 취하는 쪽의 오만에서 비롯된다. 반면, 존중이란 돌보는 자의 겸손에서 시작된다. 세상을 보는 두 가지 방식 중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것은 돌보는 자 쪽이다. 하나님은 나라의 설립부터 참새의 추락까지 당신께서 지으신 세상을 돌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의 날 수부터 머리카락 수까지 세상 만물이 그분의 돌보시는 섭리의 눈빛 아래 있다. 그런 관점으로 세상을 보면 마음속에 경외의 반응이 우러나게 되어 있다. 경외의 상실은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 “자만에 젖어 경외의 능력을 잃으면 우주는 한낱 시장이 되고 만다.” 아브라함 헤셀의 말이다.
어린이의 삶의 성스러움
슬픔이 결실이 되었다. 걸음을 늦추기로 했다. 그런 순간들이 찾아올 때 알아볼 수 있도록. 걸음을 멈추기로 했다. 그런 순간들을 존중할 수 있도록. 반응하기로 했다. 내가 그런 순간을 만지고 그런 순간이 나를 만지게 하지 않고는 그냥 보낼 수 없기에.
2. 묵상하는 삶의 씨앗
이 땅을 사는 모든 인생의 모든 순간과 모든 사건은 그 영혼에 뭔가를 심어 놓는다. 눈에 보이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씨앗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듯 영적인 생명의 씨앗도 세월의 흐름을 타고 날아와 인간의 마음과 의지에 살며시 내려 앉는다. 그 무수한 씨앗은 대부분 죽어 없어지는데 그것은 인간이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토머스 머튼).
묵상하는 삶이란 영원히 의미 있는 것이 심길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어떤 씨앗이 우리를 찾아올 것이며 거기서 어떤 수확이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에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토머스 머튼의 경고처럼 그 씨앗은 대부분 죽어 없어질 것이다.
씨앗이 자라는 공간
글쓰기를 배우는 과정에서 나는 글 중간중간 잠시 쉬어 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았다. 쉬어 가는 시간은 독자의 마음에 생각할 여유를 주고 작가의 말이 살아갈 공간을 준다. 어느 글을 읽든 똑같이 적용되는 원리이다. 글 사이사이에 공간을 줄 때 그 글은 우리 마음속에서 살아갈 자리를 찾게 된다. 삶에 그런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지 않는 것은 곧 글이 가져다 줄 수 있는 모든 성장을 방해하는 것이다.
성경 속의 신앙인들은 삶 속에 쉬어가는 시간을 잘 낸 사람들이다. 그들은 쉬어 가는 시간을 매일 정해진 기도 시간, 매주 안식일 엄수, 유월절과 속죄일 같은 연례 성일로 지정해 두었다. 이렇게 쉬어 가는 시간을 떼어 놓는 습관 덕에 일과 중에도 자연스레 그런 시간을 내기가 한결 쉬웠다. 일과 중의 쉬어 가는 시간은 묵상하는 삶에 필수적인 것이다.
씨앗
‘지혜’란 히브리 단어로 ‘살아가는 기술’이라는 뜻이다. 그 기술은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을 더욱 민감히 듣는 습관을 기름으로써 배울 수 있다. 그 말씀이 평범한 우주적 지혜의 형태로 오든 특별한 인격적 계시의 형태로 오든.
뿌리는 자
우주적 지혜의 책 잠언에서 솔로몬은 하나님의 계시는 우적 차원을 넘어 인격적 차원으로 향한다 했다. 그는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잠3:32)라고 말한다. ‘교통하심’이란 말은 ‘사담’을 뜻한다. 히브리어 어근의 뜻은 ‘꼭 끼다, 든든하다, 꽉 누르다’ 등으로, 침대나 소파에서 꽉 눌리는 물건인 베개나 쿠션도 여기서 나온 파생이다. 잠언 3장 32절 말씀의 ‘교통하심’이란 말도 은밀한 대화를 위해 서로 바짝 붙어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베개에 머리를 나란히 대고 누워 조용히 깊은 얘기를 주고받는 여인들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 소파에 붙어 앉아 생각을 나누는 친구들에게도 사용된 말이다. 그런가 하면 텐트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전략을 의논하는 장군들을 가리킬 때도 이 말이 사용된다. 이런 인격적 관계는 서로 속을 내보임으로 유지된다. 관계가 깊을수록 내보이는 깊이도 깊어진다.
우리는 대부분 종교로서의 기독교와 관계로서의 기독교에 차이가 있음을 깨닫고 그리스도께 돌아온 자들이다. 주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얼마 후, 우리는 또 다른 차원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인격적 관계와 친밀한 관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어떤 사이이든 대화의 깊이를 결정하는 것은 관계의 깊이다. 예를 들어 식품점 계산대 앞에서 마주친 낯선 사람과의 대화는 구면인 사람과의 대화와 다르다. 그것은 다시 친구와의 대화와 다르고, 그것은 다시 친한 친구와의 대화와 다르며, 그것은 다시 제일 친한 친구나 배우자와의 대화와 다르다.
C.S. 루이스는 피조물로서 인간 최대의 존엄성은 주도권이 아니라 반응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우리는 듣는다. 그분이 두드리시면 우리는 연다. 그분이 씨를 뿌리시면 우리는 받는다. 씨를 뿌리는 것은 광야 같은 인간의 심열에 에덴을 복원하려는 하나님의 시도이다. 씨를 받는 것은 그 일에 동참하는 우리의 몫이다.
3. 묵상하는 삶의 토양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배울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뿌리는 자가 아무리 훌륭하고 씨가 아무리 좋아도 작황을 결정짓는 것은 토양의 상태라는 것이다.
토양을 비옥케 하는 분해된 유기물을 부식토(humus)라고 한다. 겸손(humility)이라는 말도 그것과 상관이 있다. 겸손이란 낮아진다는 뜻이다. 이는 우리가 당신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과정이다. 그분은 우리를 낮추신다. 직접 밑바닥에 데려다 놓으실 때도 있다. 낮고 연약한 자
성경은 하나님께서 낮아져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겸손케 하는 일들은 장기적으로 볼 때 유익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길을 닦아 주기 때문이다.
높고 강한 자
야보고는 말한다.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겸손하게) 받으라(약1:21).” 맨 밑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 겸손이다. 토양의 수용력을 준비시키는 것이 겸손이다. 마음에 심긴 말씀을 간절히 붙들게 하기 위함이다. 토양과 씨앗이 만나면 발아 과정이 시작된다. 영혼이 말씀을 받아들여 어두운 땅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할 때, 말씀은 거기 있는 것을 취하여 변화시키되 생명을 줄 뿐 아니라 열매까지 맺게 한다.
4. 묵상하는 삶의 수분
발아란 이상한 과정이다. 죽음과 생명이 공존한다. 새해처럼 묵은 것은 가고 새것이 시작된다. 정적으로 완벽하던 씨앗이 균형이 깨지며 훼손을 입는다. 껍질 새로 물이 스며들면서 기적이 일어난다. 불모의 애리조나에 긴 겨울 우기가 지나면 대지가 갑자기 살아나 사막은 꽃밭이 된다. 몇 년씩 잠자던 씨앗들이 깨어 살아나 광활한 산비탈에 자줏빛 융단을 깔고 산자락에 울긋불긋 색을 입힌다. 건조한 이집트 무덤에서 발굴된 곡식 낱알이 습한 토양에 심기자 부풀어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씨앗의 밀폐된 관점에서 볼 때 발아란 유쾌한 과정이 아니다. 물이 껍질을 뚫고 들어가 속을 들쑤셔 놓는다. 생명의 싹이 잠에서 깨어나 부풀어 살아나기 시작한다(모턴 켈시, 기도와 레드우드 씨앗).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씨로, 말씀이 떨어지는 마음을 밭으로 표현하셨다. 그러나 한 가지 핵심성분이 없다면 씨는 싹을 틔울 수 없다. 바로 수분이다. 수분이 씨앗에 하는 일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하시는 일과 같다. 씨앗이 생명의 싹이 되는 것이다. 말씀과 성령은 창조 때부터 짝이 되어 일했다. 성령은 둥지의 알을 품는 새처럼 수면을 운행하시며 말씀과 협력하사 새 땅의 형질과 만상을 이루셨다. 똑같은 식으로 성령은 말씀과 협력하사 새로운 피조물에도 생명의 싹을 틔우신다. 그 새 생명의 씨앗은 우전자 기호상 예수님 닮은 모습을 열매로 맺도록 되어 있거니와, 이 역시 말씀과 성령이 합력해서 하는 일이다. 어떤 말씀이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뿌리 내리려면 바로 그러한 협력이 필요하다.
성경은 누구나 읽고 다만 얼마라도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참고 서적과 주석 그리고 가르쳐 주는 사람만 있다면 많은 내용을 알 수 있다. 각 책의 저자와 거기서 다루는 특별한 문제도 알 수 있다. 그 책이 기록된 역사적 배경도 알 수 있다. 단어의 뜻과 구체적 양식도 알 수 있다. 신학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을 떠나서는 그 말씀이 내 신앙생활의 특정 시점에 나에게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지 알 수 없다. 성령이 없이는 그 씨가 내 안에서 발아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모습으로 자라 갈 수 없다.
A. W. 토저는 ‘하나님을 추구함’이라는 책에서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싹 틔워 처음에 떡잎, 다음에 줄기, 다음에 이삭으로 자라게 하는 과정을 이렇게 묘사했다. “잠잠히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 혼자 있는 것이 제일 좋다. 앞에 성경이 펼쳐져 있으면 더 좋다. 그 상태로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보통 사람의 경우 그 과정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선 동산을 거니는 한 임재의 소리. 이어 좀더 알아들을 수 있는 음성, 그러나 아직은 분명치 않다. 이윽고 성령께서 성경을 조명해 주시는 복된 순간이 찾아온다. 한낱 소리요 음성이던 것이 이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된다. 사랑하는 친구의 말처럼 따뜻하고 친밀하고 분명한 말.”생명의 성령
“우리가 시를 읽고 쓰는 것은 시가 예뻐서가 아니다. 시를 읽고 쓰는 것은 우리가 인류의 일원이요, 인류는 열정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약학, 법학, 경영학, 공학, 다 소중하고 생명 유지에 필요한 학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 있는 목적은 시, 아름다움, 낭만, 사랑, 바로 이런 것들 때문이다.”
사랑의 성령
성경은 뭐니뭐니해도 연애 편지다. 그 편지에 적힌 말은 우리 마음밭에 떨어지는 씨와 같다. 기술만 좀 있으면 씨의 길이며 무게를 정확히 재며 연구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씨에 생명을 불어넣는 데는 기술이 전혀 필요 없다. 그것은 오직 성령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5. 묵상하는 삶의 경작
우리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사명 선언서
묵상하는 삶은 모든 성스러운 것에 대한 영적 감각을 키워 가는 생활 방식이다. 그 성스러운 것 중에 하나가 성경이다. 유대인들의 경우 모든 성경 중 가장 성스러운 본문은 쉐마이다. 쉐마는 유대 신앙인들의 사명 선언서이다. 일에서 예배까지 삶의 모든 부분이 그것의 통제를 받았다. 이마에 차는 성구함에도, 문설주에 다는 메주자에도 그것이 들어 있었다. 조석으로는 물론, 최고의 성일인 속죄일 끝에도 그것을 외웠다. 죽을 때 마지막 읊조리는 말도 그것이었다.
이웃을 사랑할 수 있으려면 우선 이웃을 보아야 하고 이웃의 말을 들어야 한다. 정원사가 식물을 관찰하는 식으로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새벽에 돋아날 때 지켜보아야 하고 뿌리가 시들시들할 때 물을 주어야 한다. 만약 우는 자의 눈물을 보고 즐거워하는 자의 웃음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함께 울고 함께 즐거워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웃을 보고 듣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어쩌면 하나님을 보고 듣는 법도 배울 수 있으리라. 그렇게 보고 들으며 비로소 사랑하는 길도 찾을 수 있으리라.우리의 삶을 위한 단순한 사명 선언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말했다. “하루가 저물 때 우리는 사랑한 것을 기준으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루를 돌아볼 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했느냐이다. 적은 사랑으로 많은 일을 하는 것보다 많은 사랑으로 적은 일을 하는 것이 낫다.
영적 감수성을 키워 주는 마음의 습관
묵상 없이 읽으면 건조하고 읽지 않고 묵상하면 오류에 빠진다. 묵상 없는 기도는 미지근하고 기도 없는 묵상은 열매가 없다(구이고).
세 가지 습관
묵상하는 삶을 길어 주는 세 가지 마음의 습관이 있다. 순간을 읽는 것, 순간을 묵상하는 것, 순간에 반응하는 것. 이 습관은 성경 본문, 사진, 거리의 사람, 잡지 광고, 영화, 자연 등 우리가 보고 듣거나 어떤 식으로든 경험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에나 적용될 수 있다.
순간을 읽기: 눈으로 표면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관찰).
순간을 묵상하기: 생각으로 이면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해석).
순간에 반응하기: 마음에 그 관찰한 바가 머무를 자리를 내주어서 위로 하나님, 밖으로 다른 사람들을 향해 자라게 하는 것이다(적용).
말씀 연구에 적용한 세 가지 습관
신자들의 교회사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 묵상을 기점 삼아 기도로 반응하는 전통이 장구한 세월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흡수하는 자연스런 과정이다. 말씀을 읽되 묵상이 없으면 진수성찬이 차려진 식탁에 앉아 음식을 쳐다만 보고 먹지 않는 것과 같다. 말씀을 묵상하되 기도로 반응하지 않으면 음식을 씹기만 하고 삼키지 않는 것과 같다. 영혼에 양분을 섭취하는 방식은 육체에 양분을 섭취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우선 식탁에 앉아 음식을 한 입 베어 문다. 다음 씹는다. 그 다음 삼킨다. 그래야 한입 한입 식사가 소화, 흡수될 수 있다. 영혼에 양분을 흡수함에 있어 이것은 자연스런 과정일 뿐 아니라 필수적인 과정이다.
일기에 적용한 세 가지 습관
일기는 눈앞에 보이는 것을 제대로 보게 해준다. 일기를 쓰는 것을 하루 중 우리의 주의를 끈 순간을 즉석 사진기로 찍어 두는 것과 같다. 필름 대신 글로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필름과 마찬가지로 그냥 보이던 것들이 글을 쓰는 사이 우리 눈앞에 현상되어 전에 못 보던 것들을 밝히 보게 될 때가 많다.
중요한 것은 묵상을 일기에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기록하는 것이다. 그러나 묵상 내용을 찾을 수 없다면 십중팔구 도중에 날리고 말 것이다. 그래서 일기가 유익한 것이다. 일기에 어느 정도 질서를 주는 것도 그래서 유익하다
일기를 쓰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삶 속에 무시로 하나님이 나타나신다는 사실 때문이다. 일상의 매순간을 읽을 때 그분이 나타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일상의 매순간을 묵상할 때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일상의 매순간에 반응할 때 자신의 삶을 잃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얻을 수 있다. 그런 삶을 살 때 일상의 순간은 믿음의 고백이 된다.
삶의 스케줄에 적용한 세 가지 습관
읽기를 중단하고 쉬어 가기 혹은 묵상을 하지 않았다면, 기록된 내용에 마음이 반응할 기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입어 마음이 녹거나 깨질 기회를 어떻게 가질 수 있겠는가? 쉬어 가기는 말에 울림을 준다. 우리 마음에 살아갈 자리를 주는 것이다.
6. 묵상하는 삶의 성장
사람의 마음은 정원에 비할 수 있다. 제대로 경작할 수도 있고 멋대로 버려 둘 수도 있다. 그러나 경작하든 버려 두든 반드시 뭔가가 자라게 되어 있고 실제 그렇게 된다.
성경 말씀 묵상하기
읽기
본문을 선정한다
문맥을 살핀다
관주를 찾아본다
세부 사항을 알아본다
묵상
질문을 던진다
단어를 공부한다
최대한 현대어로 바꾼다
반응
말씀을 개인화한다
헨리 나우웬은 그의 명저 ‘영적 발돋움’에서 말씀의 개인화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한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보기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공부를 중시하는 세상에 살다보니 읽는 것보다 분석과 토론에 붙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보다도 생각과 묵상으로 이어져야 한다. 말씀을 쪼개는 대신, 우리의 존재 가장 깊은 곳에서 오히려 하나로 묶어야 한다. 말씀에 대한 동의 여부를 따지는 대신, 어떤 말씀이 내게 직접 주시는 말씀이며 나만의 개인적 상황과 직접 연관되는 것인지 살펴야 한다. 말씀을 흥미로운 대화나 논문의 잠재적 주제로 생각하는 대신, 그 말씀이 우리 마음의 가장 은밀한 구석까지 파고 들어오게 해야 한다. 누구의 어떤 말도 여태 들어간 적 없는 깊은 곳까지. 그때서야 비로소 말씀은 옥토에 뿌려진 씨앗이 되어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때서야 우리는 진정 ‘듣고 깨달을’ 수 있다.”
말씀을 둗고 기도한다
말씀에 개인적으로 반응하는 과정을 거쳤으면, 이제 기도로 반응할 차례다.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지상 계명의 실천에 힘쓴다는 궁극 목표에 맞게, 위쪽과 바깥쪽을 동시에 향한다. 위쪽으로 나가는 것은 기도이고 바깥쪽으로 나가는 것은 행동이다.
마음에 말씀이 살아갈 자리를 내준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함께 사는 삶’에서 말씀 묵상의 과정에 대해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묵상 중에 꼭 새로운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 봐야 마음만 분산되고 허영심만 생기는 경우도 많다. 읽고 묵상한 말씀이 우리 마음을 뚫고 들어와 거기 거하는 것으로 족하다. 마리아가 목자들이 전한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한’ 것같이, 어쩌다 엿들은 말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 따라다니며 속수무책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방해하고 혹은 기분 좋게 하는 것같이, 하나님의 말씀도 묵상 중에 그렇게 우리 마음에 들어가 거기 머물고 싶어한다. 말씀은 우리를 뒤흔들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움직이기 원한다. 하루 종일 말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 한다. 그럴 때 종종 우리도 의식 못하는 사이에 말씀은 우리 안에서 역사할 것이다.”
7. 묵상하는 삶의 열매
우리 마음에 심긴 씨앗이 진정 하늘에서 온 씨앗이며 성령에 의해 발아되었다면 언젠가 열매 볼 것을 기대해도 좋다. 그 열매의 모양은 사랑을, 그 냄새는 희락을, 그 감촉은 화평을, 그 맛은 인내를 빼닮은 것이라야 한다. 묵상하는 삶의 열매는 변화된 삶이라야 한다. 변화는 우리의 존재뿐 아니라 삶의 방식까지 영향을 미쳐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삶은 서두르지 않는 평안과 능력의 삶이다. 단순한 삶이다. 침착한 삶이다. 미친 듯 서두를 필요가 없다. 그분이 키를 잡고 조종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작은 하루가 끝날 때마다 우리는 편안히 자리에 누울 수 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있기에.
8. 묵상하는 삶의 추수
열매 한 알 한 알에는 똑같은 것을 재생산할 수 있는 씨앗이 들어 있다. 추수가 곧 다음 번 씨앗이 되어, 음식 없는 세대가 없게 하고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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