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창(켄 가이어, 윤종석, 두란노, 2007), 2012년 8월에 읽음
1. 영혼의 창
우리는 많은 길을 통해 하나님에게 다가간다. 조각과 성경을 통해, 그림과 기도를 통해, 글쓰기와 예배를 통해. 하나님도 그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그분의 다가옴은 말씀으로 시작된다. 우리의 다가감은 들음으로 시작된다. 그분은 찾음은 보이심으로 시작된다. 우리의 찾음은 봄으로 시작된다. 하나님을 찾는 우리와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은 일상 생활의 창으로 서로 만난다.
이것이 영혼의 창이다.
영적으로 훈련되지 않은 이들에게 이것은 영적 훈련 같은 것이다. 실은 훈련 중에서도 가장 혹독한 훈련, 즉 감수성의 훈련이다. 창을 보고 그것을 통해 들려 오는 음성을 들으려면 항상 눈여겨보고 귀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보는 법과 귀에 들리는 것 이상을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소리는 때로 희미하고 기름 때로 아득한 까닭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민감해야 한다. 창은 어디에나 있어, 언제 눈에 띌지 모르기 때문이다.
때로 우리가 그 창의 한 광경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오랜 세월 우리를 찾으신 그분을 찾지 않는 한.
영혼의 창은 세상을 보는 하나의 방식이며, 그것은 대상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시작된다. 존중하는 마음은 다시 보는 눈을 통해 전해진다. 눈으로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보지 않을 때가 많다. 볼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존중한다는 것은 거기 뭔가 볼 것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표면이 전부가 아니라 이면에 뭔가가 있음을.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을 바꿔 줄 위력이 있음을. 삶은 보는 방식뿐 아니라 실제 살아가는 방식까지 달라지게 할 깊은 계시가 있음을.
2. 창가에서 쉬어 가기
프레더릭 뷰크너는 말했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그들을 보아야 한다. 마치 예술가처럼 눈으로는 물로 상상으로, 얼굴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얼굴 이면의 삶을 보아야 한다.”
너무 바빠서 보지 못하고 놓쳐 버린 창이 얼마나 많을까? 눈앞에 있는 것조차 보지 못할 만큼 스케줄에 쫓겨 그냥 지나쳐 버린 지혜가 얼마나 많을까?
언제가는 쓰리라. 언제가는 출판되리라. 언제가는 전업 작가가 되어 내가 좋아하는 일로 생계를 꾸려 가리라. 그러나 그 언젠가를 위해 사는 동안 나는 오늘을 놓치고 있었다.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데만 너무 바빠 현재 있는 곳과 지금 하나님이 후하신 손으로 베풀어 주시는 것을 잊고 산 것이다.
내 하루하루의 삶의 창을 들여다보게 되고 나서부터 모든 것이 바뀌었다. 내 영혼의 소음을 고요하게 하면서부터 비로소 내게 주어지는 선물은 물론 그 선물을 주시는 분도 함께 깨닫게 되었다. 그제서야 나는 그렇게 주어지는 것을 받기 시작했다. 언젠가가 아니라 오늘.
3. 저 창에 그 무엇이
우리 삶의 일상적 사건 이면에 뭔가가 있다. 우리가 지나치는 모든 이들의 삶의 이면에 뭔가가 있다. 누구나 언젠가 한 번쯤은 보았다. 적어도 느꼈다. 우리가 찾아내지 못하면 그것이 우리를 찾아낸다. 우리 어깨를 두드리며 재촉한다. 걸음을 멈추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듣고 보라 한다. 하나님은 많은 것을 통해 말씀하신다. 게으른 자의 밭과 삶의 열매는 그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걸음을 멈춰 뭐가 있는지 보지도 않고 그런 밭들을 그냥 지나친 적이 얼마나 많은가. 노동의 열매는 보았지만 노동자의 영혼은 보지 못한 때가 얼마나 많은가. 보면서도 배우지 못하고, 관찰하면서도 그 사람의 삶이 내게 무슨 교훈을 주는지 생각해 보지 않는 때가 얼마나 많은가.
살과 피, 밭과 시내, 플루트오하 드럼같이 낮은 것들로 나타나신 예술가 하나님의 영혼의 보려면 평소에 잘 쳐다보지 않던 곳에서 창을 찾아야 한다. 작은 마을에서, 마구간에서. 평소에서 잘 듣지 않ㅎ던 음성에 귀기울여야 한다. “이리로 오라”는 하늘의 별의 말에. “다른 길로 가라”는 한밤의 꿈의 말에. 말구유 건초더미 위에서 성스러운 것을 볼 때까지 우리는 그 창을 보고 또 보아야 한다.
4. 영혼의 갈망
인간 본성의 고지대와 저지대, 우리는 그 둘 사이에서 끝없는 긴장 속에서 살아간다. 나무처럼 우리도 두 세계에 끼여 있다. 한쪽은 이 땅에 뿌리를 두고, 한쪽은 하늘로 잎을 향한 채. 그러나 잎이 하늘을 붙들기보다는 뿌리가 땅을 붙드는 편이 안전하기에 안제나 현실성이 커 보이는 쪽은 땅이다. 땅이란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천국은, 천국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잎이 하늘을 붙들 수 없듯 우리는 천국을 붙들 수 없다. 그러나 잎의 기공으로 하늘이 흡입되고 그 세포 속으로 태양이 빨려든다. 그렇게 잎은 이산화탄소를 공급받아 생명에 필요한 엽록소를 만든다. 하늘이 주는 모든 것을 박탈하면 잎은 양분을 얻고자 뿌리에 더욱 매달리다 결국 시들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영혼도 하나님과 단절되어 영원한 의미의 근원이 태양이 가려지면 엉뚱한 곳에서 의미를 찾으려 한다. 좋은 직장, 좋은 학교, 좋은 소속 단체를 찾아 뿌리를 뻗으며 더 깊이 땅속으로 파고든다. 돈과 권력과 명예만 충분히 얻으면, 의미를 찾는 영혼의 갈망이 그것으로 채워질 줄 생각하는 것이다. 갈망은 영혼의 본질적 기능이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갈망은 다윗만큼 절실하지는 못할지 몰라도 어디까지나 사실이다. 그러나 굶주림이란 고통이기에 우리는 아무 방법으로나 그 고통을 덜려 한다. 여러 방법 중 하나가 종교 활동이다. 독서나 테이프 청취나 세미나 참석 같은 활동이 다 해당될 수 있다. 모두 아주 좋고 유익한 일이지만, 그런 활동을 통해 우리는 남의 경험으로 배를 채운다. 내 경험이 아닌 것이다.
5. 창을 열며
하나님의 말씀은 비와 눈처럼 온 땅에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특정 장소, 예컨대 성경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빗물을 가장 눈에 잘 띄는 호수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나 같다.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의 말씀의 흔적이 있다. 역사 속에. 우리 삶의 상황 속에. 인간 세상 구석구석에. 모든 꽃잎의 가는 줄무늬 속에.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면 그 응답을 이루는 삶의 상황은 그대로 그분의 말씀의 메아리가 된다. 대부분 그 응답은 사자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 사자는 천사나 예술 작품일 수도 있고, 선지자나 함께 점심을 먹는 사람일 수도 있고, 성경 말씀이나 노래일 수도 있고, 환상이나 꿈일 수도 있고, 자연이나 영항의 한 장면일 수도 있다. 비와 눈이 이 땅에서 맡은 바 소임을 이루기 전에는 다시 하늘로 올라가지 않는 것처럼 이 사자들도 보냄받은 사명을 성취하기 전에는 그냥 빈손으로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6. 직업의 창
프레더릭 뷰크너는 어느 졸업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직업을 선택할 때 가장 귀담아들어야 할 음성은 바로 우리가 가장 듣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음성, 즉 자기 자신의 기쁨이라는 음성입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 중에 자신을 가장 기쁘게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기쁨이란 정 방향으로 순항하고 있다는 확신과도 같거니와 자신에게 그런 느낌이 가장 강하게 드는 일이 무엇입니까? 나무나 돌이나 물감이나 캔버스를 가지고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일입니까? 말로 진실을 밝혀 인간이 동경하는 세상을 이루는 일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을 울고 웃게 하여 영혼을 씻어 주는 일입니까? 자신을 진정 기쁘게 하는일이야말로 선한 일이고 자신의 일이며, 온 인생으로 응답해야 할 부르심의 음성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7. 이야기의 창
이야기는 다른 이들의 삶, 다른 나라의 삶, 나아가 자기 자신의 삶 이면에 감추인 것을 드러내 준다. 이야기는 외적인 힘이 아니라 내적인 힘으로 우리를 움직인다. 율법이 아니라 은혜로, 양심을 일깨우고 마음을 휘저어 놓음으로 우리를 움직이는 것이다. 이야기가 집까지 우리를 쫓아와 마음의 문으로 발을 들여 놓거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물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 이 이야기가 말하려 하는 바가 무엇인가? 그리고 나에게 말하려 하는 바는 무엇인가?
8. 예술의 창
아브라함 헤쉘은 말한다. “예술 작품은 우리를 전에 품어 본 적 없는 정서와 만나게 해준다. 위대한 작품은 세상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갈증을 줌으로써 필요를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보는 예술 작품은 이 세상과 다음 세상을 갈라놓는 감옥의 벽에 뚫린 창이 된다. 그 창을 내다볼 때 우리의 영혼은 솔제니친의 말처럼 “열망하기 시작한다.” 제대로 보기만 한다면, 반드시 그래야 한다.
C.S. 루이스는 예술 작품을 제대로 보는 법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림 앞에 앉을 때는 내가 그 그림으로 뭔가를 하려 하지 말고 그 그림이 나에게 하는 일을 그대로 받으려는 마음으로 앉아야 한다. 예술 작품이 우리에게 제일 먼저 요구하는 것은 복종이다. 보라, 들으라, 받아들이라.”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하지 않는다. 보고 들은 뒤, 받아들이지 않고 대응한다. 복종하지 않고 저항한다. 변화되어 떠나지 않고 비평하며 떠난다. 토요일 밤 영화를 보고 떠날 때나 주일 아침 설교를 듣고 떠날 때나 마찬가지이다.
9. 광야의 창
음식이 없을 때 육체적 굶주림이 더 심해지듯, 하나님이 부재하실 때 영적 굶주림은 더욱 심해진다. 우리 삶에서 광야의 역할이 그토록 중요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모세와 다윗과 엘리야와 욥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광야란 장시간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는 곳이다.
광야의 위치가 어디이고 종류가 무엇이든, 우리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배우는 곳이 바로 그 광야이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 영혼에 가장 합당한 음식일 뿐 아니라 가장 절박한 음식임을 배우는 곳이 바로 그 광야이다.
하워드 메이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험을 좋아하지 않는다. 영적 성장의 개척지에 모험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사코 그것을 피하려 한다. 우리는 영혼의 개척지가 이미 남들에 의해 정찰 완료되어 있기를 바랄 뿐 아니라, 신도시 개발 지구처럼-거리마다 조명이 눈부시고 상하수도 시설도 완벽하고 번지 수 배당도 끝나고, 가옥은 따로 잔디나 수목을 심을 필요 없이 완비된 데다 쇼핑 센터도 가깝고 관내 경찰력도 든든한-완전히 길들여져 정착되어 있기를 바란다. 더 이상 개척할 곳이 없다. 캄캄한 황무지의 위험도 없고, 나무를 베거나 돌을 치워 가며 직접 정원을 꾸밀 일도 없고, 산길을 오르거나 범람한 강물을 건널 일도 없다. 우리는 모험보다 편안한 안전을 좋아한다.
10. 시의 창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라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지류가 아무리 꾸불꾸불하고 물살이 아무리 거칠어도, 그 흐름을 따라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하나님께 닿게 되어 있다. 때로 그 진리의 실개천은 시를 타고 흐르기도 한다. 시는 흔히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리라 기대하지 않는 부분이다.
아무리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이 말씀의 통로로 삼으실 수 없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수 없을 만큼 없다. 언제 어디서 어떤 수단을 통해서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 우리의 삶의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을 통해 말씀하실 때도 있다. 잔물결을 일으키는 시의 고요한 리듬을 통해 말씀하실 때도 있다.
11. 영화의 창
영화는 인간 경험의 평범한 구슬을 취하여 자르고 광택을 내는 35mm 영사기의 조명 앞에 올려놓는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이 그 광채를 볼 수 있도록. 그리하여 극장을 떠날 때 그 광채를 조금이나마 묻혀 나갈 수 있도록. 물론 모든 영화가 그런 고상한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좋은 뜻으로 만든 영화라고 모두가 광채를 내는 것도 아니다. 영화란 봉우리와 골짜기, 농경지와 황무지, 무서운 협곡과 희망의 수평선이 모두 담긴 영혼 내면의 풍경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해 얼마든지 부정적으로 말할 수 있지만, 거의 모든 영화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영화란 근본적 차원에서 영혼의 갈망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선이 악을 이긴다는 갈망. 사필귀정의 갈망. 자신이 인생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갈망. 극이 진행되면서 선한 인물은 더 선해지고 현명해지고 마음이 넓어지는 대신 나쁜 인물은 구속되지 않는 한 반드시 정의의 대가를 치른다는 갈망. 그리고 결국 해피엔딩이 있다는 갈망-내가 보기에 이것은 천국에 대한 우리의 갈망의 희미한 그림자에 다름 아니다.
영화는 의심의 여지없이 놀라운 위력을 지는 예술 형태이다. 그것은 영화가 영혼의 갈망을 말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예의바르고 설득력 있고 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말할 뿐이다. 영화는 미술, 음악, 문학이 한데 어우러지는 곳이다. 이 모두가 제대로 어우러지기만 하면 아름다운 일이 벌어진다. 창이 열린다. 내 안에서 뭔가를 보게 된다. 어쩌면 평생 동안 숨어 있던 것을. 다른 사람 안에서 뭔가를 볼 수도 있다. 진기한 초월의 순간에는 다른 세상의 뭔가를 볼 수도 있다.
영화는 한두 시간 동안 다른 사람의 삶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때로 그것이 우리를 바꿔 놓을 수 있다.
12. 추억의 창
운전 속도가 아무리 빠르고 거리가 아무리 멀어도 우리는 과거를 절대 벗어날 수 없다. 과거는 우리 뒤쪽에 있지만 언제나 백미러에 담겨 있다. 과거의 영상은 점차 작아져야 할 것 같지만 인생의 주행 거리가 물어질수록 오히려 더 가깝게 다가올 때가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언제나 한눈에 들어오는 거리에 있다. 늘 그만큼의 거기로 우리를 좇는다. 그 거울 속의 영상은 우리가 가던 길을 안전하게 재촉할 수도 있고, 혹은 우리를 도랑에 처박히게 할 수도 있다. 그것이 추억의 힘이다. 모든 추억 중에도 고향의 추억만큼 위력 있는 것은 없다. 우리는 고향을 떠날지 모르나 고향은 영원히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내면 깊은 곳에는 누구나 과거로 잡아끄는 뭔가가 있다. 이유는 추억만큼이나 다양하다.
13. 꿈의 창
때로 하나님은 한밤중에 창을 열어 주신다. 그 창으로 그분은 그림을 보여 주실 때가 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각자에게 가장 친숙한 언어로 말씀하신다. 모국어를 말하는 게 아니다. 각 지방의 방법과 구어 표현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마음의 언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것도 인간 일반의 마음이 아니라 각 개인의 마음이다. 자기만의 이미지가 강하게 살아 있는.
그분은 우리 각자에서 가장 소중한 이미지를 통해 말씀하신다. 계산기가 회계사의 세계에 고유하고 크레용이 유치원생이 세계에 고유하듯. 그렇게 나의 세계에 고유한 이미지를 고르신다. 그 이미지는 너무 개인적이라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모든 것이다. 그분이 바로 그 이미지를 찾아 우리 각자의 마음을 살피신다.
14. 글쓰기의 창
작가로서 글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하나님이 삶의 다른 영역들보다 글 쓰는 일을 통해 내게 더 자주 말씀하시는 것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가장 열중할 때가 바로 글 쓸 때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전부는 그분이 거기서 나를 만나 주신다는 것이다. 그분은 동방 박사들도 거기서 만나 주셨다. 그들이 일하던 곳에서. 그분은 목자들도 거기서 만나 주셨다. 양 치던 들판에서.
15. 성경의 창
그분이 내게 오신 것은 내 수중에 뭐가 내놓을 것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분이 내게 오신 것은 굵은 보릿가루 빵과 바짝 마른 물고기로 당신이 어떤 일을 하실 수 있는지 보이시기 위함이다. 내가 드리기만 하면 그분을 그것을 취해 축사하시고 떼어 당신의 사람들에게 양분을 공급하실 수 있다. 그분은 내게 그것을 보이기 원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헌신된 관계라는 틀 안에서 자신을 보이시고 나타내시고 자신의 존재의 가장 내밀한 비밀을 알리시겠다고 약속하신다.
16. 인간의 창
사람의 발길을 끄는 것은 갓 구운 빵 냄새이다. 그 빵 냄새를 맡으며 영혼은 본능적으로 군침을 흘리고, 오랫동안 애써 참아온 허기가 되살아난다. 영혼을 유혹하여 맛보게 하는 것은 그 냄새요, 영혼을 유혹하여 먹게 하는 것은 그 맛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빵을 주기보다는 조리법을 줄 때가 얼마나 많은가. 조리법은 갖가지 종류의 요리 책에 들어 있다. 성경책에서 자동차 범퍼 스티커까지. 책에서 카세트까지. 설교에서 짧은 충고까지. 이 모든 것이 말로 가득 차 있다. 좋은 말들도 많이 있다. 좋은 의도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육신이 되지 않은 말. 우리 가운데 거하지 않은 말이다. 어느 날 이 모든 말들이 깨끗이 사라져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 삶이 남는다. 그 삶은 무엇을 말할 것인가? 우리의 존재에 대해, 우리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뭐라고 말할 것인가? 우리가 믿는 바에 대해 뭐라고 말할 것인가? 말이 모두 사라진다면 세상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17. 눈물의 창
눈물보다 위대한 영혼의 창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자신의 실체의 우물에서 길어 올려지는 것이다. 언어의 퇴적층 밑에 자리한 우물. 아득한 옛날의 의식층보다 더 깊은 우물. 눈물은 미세한 지하수 물줄기처럼 조금씩 배어 나올 수 있고, 분출하는 간헐천처럼 땅위로 펑펑 솟구칠 수도 있다. 엉뚱한 이유로 터질 수도 있고, 아무 이유 없이 터질 수도 있다. 세상의 어떤 힘도 억누를 수 없을 만큼 순수하고 의롭고 선한 이유로 터질 수도 있다.
눈물의 순간은 하나의 창이다. 그 창에, 순간을 거룩하게 할 뿐 아니라 순간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 담겨 있다. 흘리는 눈물마다 한 조각 영원이 녹아 있다. 한 조각 사랑과 긍휼과 애정이 스며 있다. 모두가 천국에서 발원하여 우리 영혼의 성찬으로 이 땅에 내려오는 것들이다. 기꺼이 받아서 먹을 마음만 있다면. 하나님과의 가장 가까운 교제는 눈물의 성찬을 통해 온다고 믿는다. 포도 알이 으깨져 포도주가 되고 곡식 낟알이 빻아져 떡이 되듯이, 이 성찬의 떡과 포도주도 으깨지고 빻아지는 인생 체험에서 비롯된다.
18. 우울의 창
우울이란 영혼이 땅속에 묻히는 것과 같다. 영혼은 차갑고 어두운 고독 속에서 말없이 홀로 기다린다. 봄이 오기를, 따뜻한 햇빛을.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우정을.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곡식 알갱이가 떨어지는 캄캄한 땅만 우울이 아니라 열매가 맺히는 땅도 우울이다.
19. 자연의 창
반 고흐는 말했다. “모든 자연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왜 모든 사람이 보거나 느끼지 않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안 간다. 자연은 눈과 귀와 깨닫는 마음이 있는 모든 이에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일 수도 있다.
자연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 바라보는 곳 중 하나이며,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에게 다가와 말씀하시는 곳 중 하나이기도 하다. 자연이 과연 하나님의 동족어 중 하나라면 자연이야말로 우리가 공부해야 할 언어임은 지극히 당연한 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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