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과 삶/경건서적산책

크레이지 러브(프랜시스 챈 지음, 지영순 옮김, 미션월드)

기독항해자 2012. 8. 2. 14:58

크레이지 러브(프랜시스 챈 지음, 지영순 옮김, 미션월드), 2012년 7월에 읽음



형식적인 그리스도인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한다. 이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신앙의 기준이기 때문에 교회는 꾸준히 나간다. 미지근한 사람도 헌금을 하기도 하고 자선단체에 기부도 한다. 그러나 자신이 정한 생활수준이 타격받지 않는 수준에서만 그렇게 한다. 다른 모든 비용을 제하고 약간의 여유가 있을 때만 드린다.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은 다툼이나 논쟁이 있을 때 옳은 것을 선택하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쪽을 택한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와 세상, 양쪽에 속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하나님보다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해줄까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가령 교회 모임에 얼마나 많이 참석하며 헌금을 얼마나 하는지를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눅6:26, 계3:1, 마23:5-7).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은 진정으로 죄에서 구원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죄로 인한 벌을 피하고 싶어할 뿐이다. 또한 죄를 미워하지 않으며 죄를 지어도 진정으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이 죄를 벌하실까봐 두려워할 뿐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주신 새 삶이 이전의 죄된 삶보다 더 낫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요10:10, 롬6:1-2).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은 주를 위하여 목숨 거는 사람들의 간증을 들으며 감동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는 것은 비상적인 것이며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주님을 따르려면 모두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미지근한 사람들은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고 말한다(약1:22, 약4:17, 마21:28-31).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은 친구와 동료 등 주변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거의 없다. 거절당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마10:32-33).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선함과 도덕적 가치를 세상과 비교해 만족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떤 나쁜 사람과 비교해 만족하며, 예수님을 위해 온 삶을 바치는 사람을 보면서는 자기가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을 내심 다행으로 여긴다(눅18:11-12).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은 말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주님께 삶 전체를 열어 드리지 않는다. 주님은 그들의 삶에 극히 적은 일부분일 뿐이다. 또한 주님께 시간도 드리고 재물도 드리고 마음도 드리지만 삶 전체를 책임지시도록 허락하지는 않는다(눅9:57-62).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되, 온 맘과 온 정성과 온 힘을 다해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보통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정도면 된다고 오히려 사람들을 설득한다. 자신에게 더 이상의 헌신은 불가능하다면서 오로지 목사나 선교사들만 그런 삶을 사는 것이라 주장한다(마22:37-38).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는 하나 자기 자신보다 훨씬 덜 사랑한다. 또한 뭔가 되돌료 받을 것이 있을만한 사람에게만 잘해준다. 가족이나 친구 등 자신에게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은 사랑하지만 자신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는 사람들은 거의 사랑하지 않는다. 특히 자신의 자녀들보다 뛰어난 자녀를 둔 가족은 의도적으로 적대시하거나 불편을 마음을 갖고 대화도 자연스럽게 나누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의 사랑이라 매우 편협하며 선택적이고 조건적이다. 뭔가 끈이 없으면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마5:43-47, 눅14:12-14).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을 위해 봉사하지만 그 섬김에는 한계가 있다. 시간과 물질로 힘닿는 데까지 돕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 자신이 정한 만큼만 돕는다(눅18:21-25).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하늘나라를 소망하기보다 이 세상에서의 삶을 생각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매일 해야 할 일과 매주 짜인 일정, 그리고 다음 달로 예정된 휴가를 계획하는 데 온 정신을 쏟는다.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해 보지 않는다(빌3:18-20, 골3:2).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누리는 삶에 대해 감사한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데는 인색하다. 그들은 “예수님께서는 돈 자체가 악의 뿌리가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악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하면서 부자를 위해 섬기는 것을 좋아한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자신이 부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별로 많지 않다(마25:34, 40, 사58:6-7).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하든지 죄책감이 들지 않은 만큼만 한다. 최소한의 겻을 드려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평을 들을 만큼만 한다. 그 기준을 넘는 일은 하지 않는다.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하면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인 나 자신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을까?” 보다는 “어느 정도면 내가 죄지었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을까?”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금액이 얼마나 될까?” 보다는 “도대체 얼마를 내란 말이야?”라고 물으면서 신경을 곤두세운다.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은 “기도는 얼마나 하고 성경은 얼마나 읽어야 하지?”라고 묻지만 그들은 “회사도 가지 않고 여기 앉아서 말씀만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대상29:14, 마13:44-46).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은 적당주의를 추구하면서 자신이 모든 것을 제어하려는 집착에 붙들려 산다. 안전선을 지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지도, 희생하지도 않는(딤전6:17-18, 마10:28).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게서 안정감을 느낀다. 교회에 출석하는 것, 청소년 때 침례받은 것, 온 가족이 교회 다니는 것, 기독교 전통사상을 고수하는 정당을 지지하는 것, 좋은 국가에서 사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구약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것만으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금물이라고 경고했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옷을 입고 있다고 해서 안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또한 우리나라를 기독교 국가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안전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도 큰 착각일 수 있다(마7:21, 암6:1).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살지 않는다. 이미 정형화된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간다. 갑작스런 일을 만나도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은행에 모아둔 저축을 의지한다. 이미 노후대책이 마련되어 있기에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치 않다. 그들은 하나님이 펼쳐주실 삶이 어떤 것인지 구하고 바라지도 않는다. 자신이 만든 인생설계를 따라가면 된다. 냉장고는 가득 찼고 크게 아픈 곳도 없으니 하루하루를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갑자기 신앙생활을 그만둔다고 해도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은 그런 삶을 살아간다(눅12:16-21).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은 평범한 사람들보다 욕설도 덜하고 술도 덜 마시지만 그렇다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도 않다. 그들은 죄를 회개하고 거룩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마23:25-28).

주께 사로잡힌 그리스도인

주께 사로잡힌 그리스도인은 군소리 없이 나눠줄 줄 안다. 예수께 푹 빠진 사람은 자신을 미워하는 이들마저 사랑하며 그 사랑이 감사로 되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주께 사로잡힌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안전과 안락만을 위해 살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험과 고통에서 보호하는 일보다 다시 오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더 마음을 쏟는다.

주께 사로잡힌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가난한 사람들과 연결되어 살아간다. 전심으로 주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재물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꺼내신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안다(요일2:4-6, 마16:24-26).

주께 사로잡힌 그리스도인은 상황이나 사람들의 요구를 채워주기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에 더 우선순위를 둔다. 그들은 비록 이 세상의 재물과 명예, 성공과는 상관없는 일일지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달력에는 오직 이틀만이 존재한다. 어제, 그리고 오늘”(눅14:25-35, 마7:13-23, 8:18-22, 계3:1-6).

주께 사로잡힌 그리스도인은 교만의 죄가 항상 우리를 괴롭힐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아무리 마음을 낮추어도 스스로의 힘으로 ‘완벽한 겸손’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그리스도의 빛을 더 드러내도록 노력한다(마5:16).

주께 사로잡힌 그리스도인은 그분을 위한 희생을 짐처럼 여기지 않는다. 예수를 사랑하는 자는 그 사랑 안에서 즐거워하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줄 안다(마13:44, 요15:8).

주께 사로잡힌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지 아니하고 끝없이 나누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생각할 때 자기 자신을 위하듯 하며 세상의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저극적인 사람들이다(약2:14-26).

주께 사로잡힌 그리스도인은 항상 천국에 대해 생각한다. 그들은 이 땅에 살지만 영원한 세상을 그리며 산다. 그래서 눈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지 않는다.

주께 사로잡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불타오르는 사랑으로 헌신한 사람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주께 사로잡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죄의 흉한 모습을 가리려고 마스크를 쓰지도 않고 실패를 숨기려 하지 않는다.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에게는 하나님만이 피난처이고 그분 안에서만 비로소 진정한 평안을 맛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주께 사로잡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유지한다. 하루종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양을 공급받는다. 그들에겐 40분간의 주일 설교로 나머지 6일간을 지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원수의 훼방과 속임에 맞서 싸워야 하며 매 순간 자신을 붙드는 것은 오직 진리뿐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주께 사로잡힌 그리스도인은 안주하지 않고 성품의 계발을 위해 노력한다. 또한 그들은 참 기쁨이 환경과 상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참 기쁨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약1:2-4).

주께 사로잡힌 그리스도인은 구원자이신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감사뿐이라는 것을 안다. 또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기억하고 신실한 사람을 살도록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 애쓰거나 수고하는 만큼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헛된 노력이며 이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리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단지 하나님과 교제하며 자녀로서 누려야 할 특권을 맘껏 누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