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무화과나무(뽕나무)
성경에 나오는 식물 가운데는 번역이 잘못된 것이 종종 있다. 뽕나무는 그 중에서도 가장 엉뚱하게 번역된 것이다. '돌무화과나무'와 우리 말로 번역된 '뽕나무'는 생긴 모양새도 열매도 전혀 비슷한 구석이 없기 때문이다. 돌무화과나무는 히브리어로 '쉬크마'이다. 이는 '재활' 또는 '갱생'을 뜻한다.
뽕나무와 삭개오
삭개오는 왜 뽕나무에 올라갔을까? 삭개오가 세리장으로 활동하던 도시는 여리고였다. 요단 들판의 노른자위에 있는 여리고는 기후가 온화하고 샘이 많아 고대부터 발달된 도시다. 여리고는 광야의 오아시스 옆에서 자라는 종려나무가 많아서 '종려의 성읍'이라고 불렸다(삿3:13). 삭개오는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보고자 했지만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잽싸게 뽕나무에 올라갔다. 삭개오는 종려나무가 많은 여리고에서 왜 종려나무에 올라가지 않고 굳이 뽕나무에 올라간 것일까? 단순히 예수님을 보는 것이 목적이었을까? 그랬다면 그다지 높이 자라지 않는 뽕나무보다는 30m 가까이 하늘을 향해 쭉 뻗은 종려나무에 올라가야 훨씬 잘 보이지 않았을까?
삭개오는 여리고의 세리장으로서 여리고에서는 상당히 알려진 유력 인사였을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여러 명의 회계사를 거느린 회계 법인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삭개오는 여리고의 VIP였다. 당시 여리고는 헤롯 왕의 겨울 궁전이 있는 대도시였다. 그 대도시의 VIP가 뽕나무에 올라갔다는 것은 상당히 체면을 구기는 일이었다.
당시 여리고에서는 목자들이 뽕나무에 올라가서 뽕나무를 배양하고 있었기 때문에 삭개오는 종려나무 대신에 뽕나무에 올라갔을 것이다. 종려나무에 올라가면 어느 정도 체면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는 자신을 목자들 중의 한 명으로 봐 주기를 바라면서 뽕나무에 올라갔을 것이다. 그런대로 체면을 지키면서 그토록 사모하던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택한 셈이다.
목자들은 왜 뽕나무를 배양하고 있었을까? 성서시대에 목자들은 요단 들판에 잇는 뽕나무에 올라가서 뽕나무도 배양하는 이중의 작업을 소화해야 했다. 다음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아모는 남 유다에서는 웃시야 왕이, 북 이스라엘에서는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다. 그는 남유다에 속한 베들레헴 남동쪽에 있는 드고아 출신이다. 이곳은 농경지와 광야가 경계를 이루는 조그만 시골마을이다. 그런데 남유다 출신의 선지자가 북이스라엘 최고의 성소인 벧엘에 가서 선지자 노릇을 한 것이 문제였다. 당연히 이는 벧엘 제사장 아마샤의 심기를 건드렸다.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여 왕의 궁임이니라"(암7:12-13).
아모스는 이렇게 항변했다.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암7:14).
아모스는 자신을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 소개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목축을 해 온 광야의 백성이었다. 그들은 요셉을 따라 이집트에 내려갔을 때도 나일강 동편이 목초지 고센 땅에서, 나일강을 중심으로 농경 생활을 하던 이집트 사람들이 가증히 여기는 목축없을 계속했다(창46:34).
이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훈련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여전히 양 떼를 돌보는 목축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해 농경문화로 바뀌면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경문화의 우상숭배에 빠진 것이다. 목축문화는 이전에 이집트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가증히 여기는 것이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정착 생활을 하던 사사기 이후의 시대부터,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목초지를 찾아 반유랑생활을 하는 목자들은 사회에서 최하층부류에 속했다. 인구가 증가하고 농경지가 부족해지면서, 목자들은 더욱 황량한 광야로 밀려났다.
헬라 시대에 목자들이 포도원과 과수원과 농지에 양들을 데리고 들어가려면 양들에게 재갈을 물려야 했다. 이를 어기면 과중한 벌금형에 처하기도 했다. 농부가 주류를 이루던 사회에서 목자는 비주류요 사회적 약자였던 것이다.
헤롯이 통치하던 신약 시대에는 이러한 사회 인식이 더욱 심했다. 목자는 남의 농경지에서 몰래 양들을 치는 강도라는 의심을 받았으며, 법정에 증인으로 설 수 있는 자격도 주어지지 않았다. 급기야 목자에서 다른 직업으로 바꾸는 것은 회개를 한 것과 같은 의미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자신의 구역도 아닌 북이스라엘에 가서 그것도 북이스라엘에서 최고의 성소로 불리는 벧엘에서 목자인 아모스가 선지자 노릇을 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와 남유다의 시골 출신의 목자 아모스는 당시의 사회 신분으로 볼 때 최상류와 최하류를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오늘날로 보면 서울역 근처를 배회하는 노숙자가 은혜를 받고 김수환 추기경이 시무하는 명동성당에 가서 설교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뽕나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돌무화과나무임을 모르는 한국에서 '뽕나무를 배양한다'는 말은 종종 엉뚱한 해석을 낳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뽕나무 뿌리껍질은 '상백피', 가지는 '상지'라는 이름의 한약재로 사용한다. 호흡기 질환과 신경통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오디'라고 불리는 뽕나무 열매는 혈당 강하 작용이 있어서 당뇨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뽕나무로 오역된 이스라엘의 돌무화과나무는 성서 시대에 여리고를 중심으로 한 요단 평야의 밀밭 사이에서 흔히 자라는 나무였다. 이 나무가 돌무화과나무로 불리는 이유는, 비록 무화과와 계통은 다르지만 무화과와 비슷한 야생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유월절 즈음인 초여름에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무화과나무와 달리, 돌무화과나무는 한여름이 되어서야 구슬만 한 열매를 수없이 맺는다. 이것들은 그대로 두면 떫어서 먹을 수 없다. 그러나 뽕나무 위에 올라가 바늘로 열매들을 일일이 뚫고 그 자리에 올리브 기름을 발라주면 무화과처럼 단 열매가 된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뽕나무 배양으로 표현한 것이다. 전문용어로는 'blissa'라고 한다. 뽕나무 배양은 유대인의 신년(나팔절)인 10월 전에는 반드시 마쳐야 하는 작업이다. 이 시기를 놓치면 열매는 전혀 먹을 수 없게 된다.
아모스는 자신의 직업을 목자와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직업을 동시에 갖는다는 것을 말이 되지 않다. 당시에 목자는 농경지에서 멀리 떨어진 광야로 밀려났기 때문에 광야에서 양들을 쳐야 했다. 뽕나무 배양을 요단 평야의 밀밭 사이에서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 두 가지 일을 어떻게 동시에 할 수 있을까? 이렇게 하면 가능해진다. 여름에는 가를 하고 겨울에는 나를 하면 되는 것이다.
아모스가 소개한 두 개의 직업을 알면 당시 광야로 밀려난 목자들의 생활상을 이해할 수 있다. 농경문화가 주류였던 사사기 이후의 성서시대에 목축은 그야말로 찬밥 신세였다. 광야만이 목자와 그들을 따르는 양 떼들에게 허락된 공간이었다. 문제는 이스라엘의 극단적인 기후로 우기 동안에는 광야에 양들에게 먹일 풀이 있지만 건기 동안에는 풀이 바싹 마르고 돌멩이 외에는 남지 않는 것이다. 건기의 6개월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이스라엘은 초막절이 있는 10월부터 유월절이 있는 4월까지는 비가 오지만, 그 이후에는 비가 오지 않는 건기가 시작된다. 광야의 풀들은 이 기간 동안 바싹 마르게 된다. 이때부터 목자들의 고민이 시작된다. 목자들은 광야에 남아 있는 풀을 가지고 7주 동안 버틸 수 있지만, 그 이후에는 다른 전략을 구할 수밖에 없다. 바로 옆동네인 요단 평야의 밀밭으로 양 떼들을 데리고 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건기가 시작되는 유월절에서 7주가 지나면 칠칠절인데, 이때는 이스라엘의 밀추수기다. 목자들이 양 떼들을 데리고 요단 평야로 내려오는 시점은 이제 막 밀 추수기가 끝나고 밀 밑동이 남아 있는 때다. 이런 상황에서 밀밭 주인과 목자들의 협상이 진행된다. 목자는 자신의 양 떼들이 밀 추수가 끝난 밀밭에서 밀 밑동을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그 대가로 밀밭 사이에서 난 뽕나무에 올라가서 뽕나무 배양을 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칠칠절이 지난 요단 평야의 밀밭에서 목자과 밀밭 주인 사이에 주고받는 계약 조건이었다. 그러면 누가 이익을 본 것인가?
밀밭 주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차피 버리는 밀 밑동을 주고 선심을 쓰는 것이다. 양 떼들은 밀 밑동과 아울러 밀밭의 잡초들을 깨끗이 먹어 치운다. 양 떼들의 분변은 최고의 퇴비가 될 것이다. 밀밭 주인은 한 푼의 인건비도 지불하지 않고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한 뽕나무 배양을 끝낼 수 있다. 칠철절 이후에 열매를 맺는 돌무화과나무는 수없이 많은 열매들에 일일이 구멍을 뚫고 올리브기름을 발라 줘야 한다. 지금은 비싼 인건비 때문에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아서 배양하지 않는다. 당시 광야로 밀려난 목자들로서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계약을 한 것이다. 이런 방법이라도 쓰지 않으면 자신의 양 떼들은 광야에서 모두 떼죽음을 당할 것이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런 계약 조건은 당시 이리밀리고 저리밀리던 떠돌이 목자들을 대상으로 한 밀밭 주인들의 횡포요 노동력 착취였다.
아모스는 남유다의 시골 드고아 출신으로서 북이스라엘의 심장부인 왕의 성소 벧엘에 가서 사역을 했다. 그는 선지자도 아니었고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었다. 정식 신학교를 졸업한 사역자도 아니었다. 그가 벧엘의 터줏대담 제사장인 아마샤에게 내민 명함은 고작 부끄러운 떠돌이 목자에다가 노동력 착취의 대명사였던 뽕나무 배양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드고아는 광야와 인접한 시골 마을이다. 아모스는 이곳에서 양들을 치다가 칠칠절이 지나면 요당 평야의 밀밭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그곳에서 벧엘 출신의 목자들과 만났을 것이고,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의 부자들의 사치와 극도의 빈부 격차의 실상을 들었을 것이다.
당시 요단 평야의 거대한 밀밭의 소유주는 사마리아의 부자들이었다. 여로보암 2세 시대에 북이스라엘은 솔로몬 시대의 영토를 모두 회복하여 '이스라엘의 백은기'라고 불리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아모스는 그 내부의 사회상을 통렬하게 비판했다(암2:8).
최고의 목재 뽕나무
뽕나무는 재목으로 자라는 데 6년이면 충분하다. 심은 뒤 7년째가 되는 안식년 전에 재목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뽕나무를 이스라엘에서 최고의 건축자재로 사용되었다. 목재가 귀한 이스라엘에서는 사방의 벽을 돌로 쌓고, 지붕만 목재로 빔을 깔고 그 위에 종려나무 가지를 올린 뒤 진흙으로 덮는 경우가 많았다. 지붕의 목재 빔으로 주로 쓰이던 나무는 가볍고 단단하며 잘 썩지 않는 뽕나무였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들보인 것이다.
탈무드에는 뽕나무의 건축재료로서의 유용성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2층 이상의 집을 대여하는 사람이 지붕의 빔을 백향목으로 짓는 것을 금했다. 만약 백향목을 지은 집에서 지붕이 무너질 경우, 집주인은 뽕나무로 지은 집보다 더 많은 돈을 세입자에게 보상해야 했다. 대부분 백향목이 최고의 목재라고 알고 있지만, 이스라엘에서는 뽕나무가 지붕의 빔으로서 안성맞춤이었다. 백향목보다 뽕나무가 가볍고 단단해서, 크고 작은 지진이 많은 이스라엘에서는 뽕나무로 지은 집이 무너져 내릴 가능성이 훨씬 낮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 뽕나무는 목재로서의 명성이 자자했다. 이는 다윗 왕 때 뽕나무를 전담하는 내각 장관으로 게델 출신의 바알하난이 뽑힌 데서도 잘 알 수 있다(대상27:28).
바알하나는 감람나무와 평야의 뽕나무를 맡았다. 그는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던 것일까? 성서 시대에 이스라엘 가옥의 지붕의 빔은 대부분 뽕나무였다. 그런데 목재가 귀한 이스라엘에게 사람들은 한 그루의 뽕나무에서 최대의 목재를 얻어 내는 독특한 방법을 발견했다. 그것은 뽕나무가 어느 정도 자라면 도끼로 나무를 베는 것이다. 그러면 그루터기의 뿌리에서 수많은 가지들이 나왔다. 그 가지들로 이스라엘 전 지역에 있는 주택의 지붕을 덮었던 것이다. 아직도 도끼로 한 번도 베지 않은 뽕나무를 '처녀 뽕나무'라고 불렀다. 탈무드의 전신인 토세프타에는 이런 말이 있다: "이스라엘에는 세 종류의 처녀가 있다. 남자와 자지 않은 처녀 여자, 아직 땅을 경작해서 농작물을 재배한 적이 없는 처녀 땅, 그리고 아직 도끼로 쳐 내지 않은 처녀 뽕나무가 그것이다."
바알하나는 뽕나무를 배양하고 올리브기름을 발라서 수확하는 일과 함께, 처녀 뽕나무를 도끼로 베서 이스라엘 전 지역의 수요를 감당할 최대한의 목재를 얻을 일을 총괄했을 것이다. 아울러 그는 올리브나무도 맡았다. 올리브 열매의 수확과 네 번에 걸쳐 짜서 정확한 용도에 따라 사용되어야 할 올리브 기름을 책임진 것이다. 이는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주부같이 섬세한 리더십이 필요한 직분이었다.
(열린다성경 식물 이야기, 류모세, 두란노)
돌무화과나무 열매 맛은 무화과만은 못해 가축 사료로 많이 사용했지만 단맛이 있어서 가난한 사람들의 식량으로 사용했다. 신약성경에서 세관이었던 삭개오는 키가 작아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 예수님을 보게 된다.
돌무화과나무는 팔레스티나와 시리아와 동부 아프리카에 자생하는 나무이다. 돌무화과나무는 잎과 껍질이 뽕나무를 닮았지만 열매는 오히려 무화과를 닮았다. 그러나 그 열매는 더 작고, 숫자는 훨씬 많다. 또 나무의 여러 곳에서 열리는 것이 특징이다.
열매는 어린 가지나 묵은 가지 할 것 없이, 심지어 굵은 줄기에서도 달리기도 하고 1년에 여러 번 열매를 맺는다. 열매 맛은 무화과만은 못해 가축 사료로 많이 사용했지만 단맛이 있어서 가난한 사람들의 식량으로도 사용했다. 따라서 돌무화과나무는 특별하게 관리했던 나무다(역대 27,28).
돌무화과나무는 더위나 건조한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잘 자라지만, 산악지대의 추운 기후에는 견디지 못한다. 돌무화과는 잎이나 나무에 상처를 내면 흰 즙이 나온다. 이것은 무화과나무와 공통된 성질이지만, 잎과 열매로 쉽게 구별할 수 있다. 돌무화과 줄기는 우리나라 오동나무처럼 연하고 가벼워 가공하기도 쉽다.
또 수분과 부패에 견디는 힘이 좋아서 고대 이집트인들은 관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 이집트 고분에서 B.C. 30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돌무화과나무 미이라 관이 발견됐다. 이밖에도 가구, 문짝, 상자 등을 만드는 데 널리 쓰였으며 가벼워서 천장재로도 이용했다.
돌무화과나무는 수명이 긴 나무이기도 하다. 사막에서는 그늘이 생명을 지켜주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 유목민은 그늘을 위해, 또는 식량을 얻으려 돌무화과나무를 즐겨 심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생명 나무로 숭배하기도 했다. 그래서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다산과 풍요를 바라며 돌무화과나무 밑에 과일, 곡식, 채소, 꽃, 물 등을 바치고 제사를 지냈다. 돌무화과나무는 가나안이나 예리코 등에 아주 흔한 나무였다(열왕 10,27).
구약성경에서 돌무화과나무 하면 아모스 예언자가 떠오른다. 아모스는 정의의 예언자로서 예언, 집필 문학 시대를 연 이스라엘 최초의 예언자였다. 아모스 예언자는 남부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으로부터 남동쪽으로 약 18km 떨어진 작은 촌락 드고아에서 태어났다. 고아는 사방이 언덕으로 둘러싸인 유다 광야의 가장자리에 있어서 염소나 양떼 목축업이 가능했던 지역이다. 아모스는 자신을 소개할 때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암 7,14).
옛날 유다인들은 무화과나 돌무화과의 열매가 덜 익었을 때 열매 중앙부의 일부에 구멍을 내서 벌레가 알을 낳기 전에 이 구멍을 통해 밖으로 도망가게 했다.
신약성경에서 돌무화과나무는 단연 자캐오를 상상할 수 있다. 세관이었던 자캐오가 키가 작아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 예수님을 보게되는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다. 돌무화과나무는 높이와 둘레가 커서 흔히 길가에 심어 좋은 그늘을 만들어 주는 녹음수였고 쉽게 올라 갈 수 있었다(눅 19,4).
또한 돌무화과나무는 크고 뿌리가 깊은 나무였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눅 17,6).
초대교회 전설에 의하면 카이로 근처 마타리아에는 오래된 돌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 나무는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헤롯왕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할 때 이 나무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고 기운을 회복했다고 해 성스러운 나무로 전해진다.
(출처: 평화신문)
돌무화과 나무는 나무의 원줄기가 매우 두텁고 질긴 잎파리를 지닌 매우 큰 나무이다. 아마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에 나오는 나무는 바로 돌무화과 나무 잎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동 지역에서 자생하는 다른 종의 무화과 나무는 없기 때문이다.
열매는 나무의 원줄기에서 바로 맺는다. 일반 무화과 나무의 열매에 비해 매우 작은 편이지만 식용으로 사용이 되기도 하였다 (대상 27:28 "게델 사람 바알하난은 평야의 감람나무와 뽕나무 (sycamore trees)를 맡았고 요아스는 기름 곳간을 맡았고). 튼실한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나무 열매들을 솎아주어야 한다. 아모스서에 보면 선지자 아모스가 돌무화과 나무을 돌보는 구절이 나온다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 (sycamore fruit)를 배양하는 자로서 - 7:14).
한때 돌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나무였다 (왕이 예루살렘에서 은 금을 돌 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 (sycamore tree) 같이 많게 하였더라 - 대하 1:15, 9:27). 신약성서 눅 19:4 (앞으로 달력기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기시게 됨이러라)에 언급이 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돌무화과 나무는 관을 만드는데 사용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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