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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의 옻칠쟁이다(전용복, 한림미디어)

기독항해자 2012. 6. 6. 21:22

나는 조선의 옻칠쟁이다(전용복, 한림미디어), 2012년 6월에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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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장인을 볼 수 있는 책이다. 장인이란 어떤 류의 사람인가를 알 수 있게 하는 책이다. 이 사람이 진짜 장인이구나! 하게 하는 책이다. 장인은 프로 혹은 전문가라고 할 수가 있다. 장인은 한 마디로 자기 일에 미친 사람이다. 우리는 전용복에게서 이 미친 사람 장인을 만나게 된다. 그는 옻칠에 미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당당하게 옻칠에 있어서 권위자가 되었다. 전용복씨가 옻칠에 있어서 세계적인 권위자가 되는 데는 메구로가조엔이라고 하는 일본의 요식업체와의 만남이 있다. 

메구로가조엔:

메구로 가조엔은 1928년 호소카와 리키조(細川力蔵)씨가 지금의 도쿄미나토구에 있던 자신의 자택인 시바우라조엔芝浦雅叙園을 재축하여 순일본料亭(료테이)를 오픈하였으나 1931년 지금의 자리에 메구로가조엔을 만들고 1938년에 결혼식장 일괄 시스템을 도입한 일본국내 최초의 종합 결혼식장이다. 그후 꾸준히 부지를 넓혀나간 끝에 연건평 8천여평, 객실 2백여호에 바닥길이만해도 2킬로미터에 이르는 대규모 호화판 연회장으로 꾸몄다. 격조 있는 명목을 사묭한 건물의 설계와 공사에는 당시의 일본건축계 최고의 기술진을 투입했다. 그 결과 메구로가조엔은 화려한 실내 디자인, 정교한 옻칠 가공, 나전과 목재의 섬세한 세공 등 일본의 독특한 기술이 모두 발휘된 우아한 예술품으로 탄생했다. 각각의 방들은 창의적인 디자인으로 개성을 뚜렷하게 살렸지만 전체적으로는 공통된 미의식이 흐르도록 고려했다. 무엇보다 건물 전체를 옻칠로 발라 그 신비한 기운을 가득 서리게 한 점이 독특하다. 1988년부터 3년반동안 리뉴얼오픈을 위해 전면 개축을 하였는데, 이 공사에 옻칠공예가 전용복씨가 참여했다. 조선 나전칠기 장인들이 식민지시대에 끌려가서 만든 아픈 현실이 있었지만 일본 장인들이 아무리 복원을 할려고 해도 못하던걸 전용복씨가 복원을 한 것이다. 전용복씨가 메구로가조엔의 복원 공사를 맞게 되는 데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남다른 노력이 있다.

2년간의 치밀한 노력:

그가 이 일을 맡기 위해서 한 노력은 우리 모두의 귀감이 될 수가 있다. 그의 노력을 옮겨 본다.

메구로가조엔 측에서는 앞으로의 신축계획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정보를 노출하지 않고 있었다. 결국 복원으로 결정나리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서 이는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당시 나는 일본 곳곳을 다닐 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작품에 거의 손대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의 생활비와 내 학비, 그리고 일본여행 경비를 충당하기에는 버거운 일이었다. 거의 무전여행에 가까운 최소한의 경비만 가지고 일본열도를 헤집고 다녔다. 내가 가장 신세를 많이 진 것은 신칸센열차였다. 알량한 여행경비에서 신칸센 요금을 감당하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어서 결국 외상으로 탈 수밖에 없었다. 담을 타넘어 무임 승차한 후 검표원이 나타나면 후다닥 화장실로 숨으면서 위기를 모면하곤 했다. 목표지에 내리면 모든 사람들이 개찰하고 나간 뒤 슬그머리 또 담은 넘곤 했다. 잠은 주로 역사나 공원 등지에서 노숙을 했다. 동경의 우에노 공원은 내 단골 잠자리였다. 가방을 머리에 메고 신문지로 이불을 대신했다. 허기진 배는 포장마차나 다찌구이 가게를 이용했다. 주로 낫또라는 것을 먹었는데, 우리 청국장과 비슷한 발효된 콩을 밥 위에 얹어 간장을 비벼 먹는 음식이다. 능숙한 일본어 구사가 일본여행의 또다른 목표 중의 하나였으므로 닥치는 대로 일본인들을 붙잡고 말을 건넸다. 처음에는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일본인들이 귀찮아 할 정도로 꼬치꼬치 되묻기도 했다.

그렇게 일본을 드나드는 나를 주위에서는 모두 미쳤다고 손가락질했다. 자신의 공방은 팽개친 채 뭔가를 연구한다고 틀어박혀 있거나 일본으로 훌쩍 떠나는 나를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적어도 서너 달에 한 번은 일본에 간 것 같다. 갈 때마다 반드시 메구로 가조엔을 찾아가 침묵하고 있는 작품들을 한 점 한 점 뇌리에 각인시켰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는 심정으로 선배 장인들의 숨결을 느끼며 그들과 소리 없는 대화를 나눴다. 막연히 기다리는 세월은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메구로가조엔에 대한 집념만 오롯할 뿐 새 작품운 엄두도 내지 못한 터라 극심한 생활고가 나를 지치게 했다. 이러한 나를 주위 모든 사람들은 비웃었다.


전용복 씨는 기약없는 2년의 기다림을 기다리면서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을 당하였다. 그렇지만 결국 그는 철저한 준비를 통해서 메구로가조엔의 복원 공사에 참여하게 되고 세계적인 칠공예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