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는 예수님 당시 상업의 상징이었다. 나귀는 밭을 다지고 맷돌을 돌려 곡식을 갈고, 쟁기를 끄는 수단으로 사람들의 중요한 소득이었다. 고대사회에서 나귀는 요즘으로 치면 트럭이나 화물열차 같은 역할을 했다. 나귀는 작은 몸집에도 불구하고 매우 무거운 물건을 날랐으며 말보다 훨씬 사료를 적게 먹었기 때문에 건사하는 데에도 별로 부담이 없었다. 이런 점에서 나귀를 풀어 끌고오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누군가의 일과 소득원을 취하시겠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전설에 의하면 하나님이 나귀의 목 뒤에 십자가의 형상을 새겨 예수님의 생애에서 나귀가 행해야 할 역할을 알려 주셨다고 한다. 텍사스의 한 나귀 목장 주인은 "나귀의 등에는 모두 십자가 형상이 그려져 있다. 세로선은 목에서 등뼈를 따라 그어져 있고 가로선은 앞 어깨의 좌우 날개를 향해 그어져 있다. 그 형상은 회색 나귀의 경우에 더욱 선명하다. 흰색이나 검정색 나귀의 경우에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그 털을 밀어보면 선명한 십자가 형상을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일터사역, p24)
나귀는 한편으로는 고집스럽고 우둔하다고 하여 멸시받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유용하고 온순하다 하여 높게 평가받기도 한다. 이집트인들은 나귀는 악마적인 동물로서 악의 화신인 세토에게 귀속되어 있다고 여겼다. 고대 인도인들은 나귀를 음란한 동물이라고 여겼으므로 방종, 단정치 못함의 상징으로 사용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시리아에서는 나귀를 신성한 짐승으로 숭배하였고 여신 아틸라트는 나귀를 타고 있다. 나귀는 제사 행렬에도 참가하며 디오니소스신은 나귀를 타고 다닌다.
나귀는 그 거센 발정 때문에 음행의 상징이 되었으며(겔23:20), 이 동물은 죽으면 쓰레기 산에 버려졌다. 삼손이 발견했다는 "나귀의 새 턱"은 그런 식으로 버려진 나귀의 턱이라고 생각된다. 작고 부서지기 쉬운 나귀의 턱뼈도 하나님께서 성별하신 사람이 손에 쥐면 무서운 무기가 된다. 삼손은 이것을 가지고 일천 명을 죽였다(삿15:15). 여호야김이 나귀 같이 매장당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무서운 벌이며,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들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끌려 예루살렘 문 밖에 던지우고"(렘22:19).
그러나 나귀는 탈 것으로도 사용되었는데 명망있는 사람들도 이것을 탔다: "흰 나귀를 탄 자들, 귀한 화문석에 앉은 자들, 길에 행하는 자들아 선파할지어다"(삿5:10). 탈것으로서의 나귀는 고귀함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그 때문에 사사 압돈에 대해 "그에게 아들 사십과 손자 삼십이 있어서 어린 나귀 칠십 필을 탔었더라"(삿12:14)고 기록되었다.
나귀가 구속자의 상징으로서 중요한 의의를 띠게 된 것은 족장 야곱이 아들 유다에게 준 축복의 말 때문이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라"(창49:11). 스가랴는 "시온의 딸에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고 선포하였다.
예언자 발람과 관계된 이야기는 분별을 못하는 피조물이 눈을 반짝이며 보지 않는 인간보다도 하나님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평소에 매우 어진 인간이었던 발람이 하나님이 바로 가까이에 계시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엇던 것에 반해서, 발람이 타고 있던 나귀는 이것을 분명히 알았다.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나귀를 탄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예루살렘 입성 때의 일이다. 주님은 두 제자에게 "너희는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마21:2)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자랑스럽게 말을 타신 것이 아니라 온순하게 나귀를 타고 오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동물 새끼, 그것도 인간이 탄 적이 없는 나귀 새끼였다. "보라 너희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요12:15).
암브로시우스에 의하면 나귀는 우쭐대지 않는 인간, 겸허한 인간을 상징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가축에게서 그리스도를 태우는 기술을 배우라. 나가서 배우라. 그리스도에게 네 영혼의 등을 내민 사실을, 그리고 밑에 있고 세상 위에 서는 것을 배우라."
(성서 속의 상징 193, 최대형편역, 은성)
당나귀의 기원은 가축화된 것과 야생의 것 두 가지가 있는데, 야생의 것에는 아프리카 야생당나귀와 아시아 야생당나귀가 있다. 아프리카 야생당나귀는 아프리카 북동부에서 남부지방에 걸쳐 살고 있다. 몸의 크기는 큰 개 정도이며 좀더 큰 것도 있다. 힘은 세지만 성질은 소심하다. 아시아 야생당나귀는 시리아 ·아라비아·이란·티베트·몽골 등지에 살고 있다. 몸의 크기는 대체로 말과 당나귀의 중간 정도이다. 다윈은 아프리카 야생의 누비아당나귀(E.a.africanus)를 오늘날 당나귀의 선조로 취급하였는데, 켈러는 아시아 야생당나귀를 당나귀의 원종으로 취급하고 있다.
현재는 아프리카 야생당나귀가 가축화된 것이라는 게 정설화되어 있다. 가축화는 유목 유랑민족인 셈족이나, 또는 이들과 관계가 깊은 종족에 의하여 BC 4000년경 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한 서부 아시아에서 물자 운반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 같다. 인도·페르시아·아라비아 지방에서도 이것을 가축화했고, 아시아 야생당나귀는 소아시아를 경유하여 그리스·이집트로 옮겨 지중해 연안까지 분포되었다고 한다.
최초에는 운반용으로 많이 이용되었으나 승용·유용(乳用), 일부는 육용(肉用)으로도 이용하게 되었다. 또 오나거(onager) 계통의 것과 소말리당나귀(F.a.somalicus)를 교배시킴으로써 속력이 빨라져서 사람들이 승용에도 많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나귀가 중부 유럽에 수입된 것은 그로부터 상당히 오랜 후의 일이며, 주로 로마사람에 의하여 널리 분포되었다고 한다. 오늘날에 와서 당나귀 개량에 가장 힘을 기울이고 있는 나라는 프랑스이다.
가축화된 나귀는 전 세계에 분포하고 있고, 야생 나귀는 구릉이 있고, 물결치듯이 된 아프리카와 아라비아반도의 사막지역에 산다.
털색은 붉은 갈색부터 청회색이고 남쪽으로 갈수록 더 진해진다. 수컷의 색깔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어두워진다. 등을 따라서 쿠두는 6~10개 줄무늬가 있다. 꼬리는 끝이 검은색이고, 아래쪽은 흰색이다. 진짜 야생 나귀는 북아프리카와 아라비아반도에서만 발견되지만 가축화된 나귀는 전 세계에 분포하고 있다. 야생 나귀는 구릉이 있고, 물결치듯이 된 아프리카와 아라비아반도의 사막지역에 산다. 작은 무리는 한 마리의 수컷과 여러 마리의 암컷으로 되어있고, 큰 무리는 여러 마리의 수컷과 암컷으로 되어 있다. 이들 무리는 매우 유연성이 있어서 매일 매일 깨어졌다 다시 형성된다. 세력권을 가지는 수컷은 여러 마리의 암컷이 있는 넓은 영역을 확보하려고 한다. 가축이 된 나귀는 연중 번식이 가능하지만 야생나귀는 일반적으로 우기에 번식한다. 나귀는 사회적 동물이고 아침과 저녁에 가장 활동적이고, 하루 중 가장 더울 때는 휴식을 취한다. 야생에서 몇 마리에서 100마리 정도까지의 무리를 이뤄 이동을 하고, 평균적인 군집 크기는 4.7마리이다. 나귀는 관찰력이 예리하고 조심스러운 동물이다. 조금이라도 위험을 느끼면 꼼짝달싹을 하지 않으며, 놀랐을 때 말은 날뛰지만 나귀는 얼어붙거나 몇 발자국 움직이지 않는다.
나귀는 사회적 동물이고 아침과 저녁에 가장 활동적이고, 하루 중 가장 더울 때는 휴식을 취한다. 이들 무리는 매우 유연성이 있어서 매일 매일 깨어졌다 다시 형성된다. 세력권을 가지는 수컷은 여러 마리의 암컷이 있는 넓은 영역을 확보하려고 한다.
야생나귀는 일반적으로 우기에 번식해서 12개월의 임신기간 끝에 새끼를 낳는데, 새끼는 태어난 후 30분정도면 일어설 수 있다.
나귀는 관찰력이 예리하고 조심스러운 동물이다. 조금이라도 위험을 느끼면 꼼짝달싹을 하지 않아 이 행동 때문에 나귀가 고집 세다는 평을 받는다. 하지만 사실은 매우 복종심이 강하고 이유 없이 명령을 거부하지 않는다. 놀랐을 때 말은 날뛰지만 나귀는 얼어붙거나 몇 발자국 움직이지 않는다. 약 6000년 전에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축화 되었고, 스피드보다는 지구력이 뛰어나고 거의 먹이를 먹지 않고 며칠 동안 100kg의 짐을 운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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