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과 삶/크리스천과 독서

장자 도를 말하다(오쇼, 류시화, 청아출판사)

기독항해자 2012. 11. 5. 16:07

장자 도를 말하다(오쇼, 류시화, 청아출판사), 2012년 10월에 읽음



이 책은 오쇼가 장자를 읽고 깨달은 것을 풀어놓은 책이다. 오쇼는 모두 열 한 편의 장자의 글을 읽고 그것을 풀어놓고 있다. 장자는 우리 시대에는 일면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렇지만 일면 우리 시대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치유법이 그곳에 있다. 현대인들은 성공을 향해 목표지향적인 삶을 살고 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새없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그러다보면 내면은 점차로 피폐해져 간다. 장자는 이렇게 내면이 피폐해져 갈 때, 어떻게 내면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지, 그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내면의 치유는 일반 은총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구원은 특별한 은총이지만, 내면의 치유는 일반 은총 영역에 해당한다. 

 

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살아야 할 신비(류시화)

주인공도 아니고 방관자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어디는 향해 가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우리의 삶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 같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부조리 투성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자신을 찾아나서는 여행보다 더 값진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라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이다.

우리의 심장에다 쓰자.

매일매일이 그 여행의 과정이 되리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세상은 한 권의 책이며, 여행하지 않는 자는 그 책의 단지 한 페이지만을 읽을 뿐이라고.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로 여행하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읽지 않는 것과 같다.

아마도 나는 내가 하는 일의 결과에 대해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결과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내 안에는 순수한 침묵이 있다. 그것은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은 절대 침묵의 세계다.

내가 누구이든, 어떤 사상과 감정을 갖고 살아가든, 그것은 변함없이 내 안에 있다.

나는 그것으로부터 나왔으며, 또 그것에게로 돌아간다.

그것은 눈으로 바라보이는 침묵이 아니다.

그것은 냄새도 없고 색깔도 없으며 내가 그것에 어떤 이름을 붙인다 해도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존재한다.

모든 명상은 그 침묵의 세계를 경험하기 위한 것이다.

내가 눈을 감고 단 1분만이라도 온 존재를 다해 그 침묵의 세계를 느낄 수만 있다면 나에게는 어떤 호흡법도, 만트라도, 요가 자세도 필요 없다.

그리고 그 순수한 침묵이 내 안에 있음을 안다면 나는 언제 어디서나 평화로울 수 있다.

어떤 감정을 나를 방문하더라도 나는 곧 그 순수한 침묵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

그것은 늘 내 안에 있다.

내가 어디로 가든, 또 무엇을 하든, 그것은 내 존재를 채우고 있다.

그리고 내가 마침내 육체를 떠날 때 그 순수한 침묵은 우주를 감싸고 있는 절대 침묵과 하나가 된다.

따라서 나는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나의 이름, 내가 이 세상에서 얻은 것, 내가 나라고 여기는 그것들은 그 순수한 침묵 위에 떠 있는 구름과 같은 것이다.

가끔 구름을 걷고, 그 너머의 절대 침묵의 세계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내가 아무리 오랜 세월 명성은 하고, 아무리 많은 다른 것들을 추구한다 해도 그 순수한 침묵과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하지 않는다면 나의 삶은 꿈과 같은 것이다.

하루에 단 1분이라도 안과 밖의 소음을 끄고 그 순수한 침묵과 마주한다면 나는 많은 것들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얻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내 삶의 중심에 서 있게 될 것이다.


첫째 날 아침/신발이 발에 맞으면

목수로 유명한 공수는 아무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도구를 사용한 것보다 더 완벽한 원을 그릴 수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무에서 형태를 낳고 그의 마음은 자유로워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 무심의 경지에 있었다. 무엇에도 자신을 맞출 필요가 없었다. 마음은 더없이 단순한 상태가 되어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았다. 신발이 발에 꼭 맞으면 발의 존재를 잊는다. 허리띠가 허리에 꼭 맞으면 허리의 존재를 잊는다. 마음이 옳으면 모든 옳고 그림의 판단을 잊는다. 무리하지도 않고, 강요하지도 않으며, 필요를 느끼지도 않고 유혹되지도 않는다. 그때 일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때 그대는 자유인이다. 쉬운 것이 옳은 것이다. 옳게 시작하라, 그러면 쉬워진다. 쉽게 나아가라, 그러면 그대는 옳다. 쉽게 나아가는 옳은 길은 그 옳은 길을 잊는 일이며 또 쉽게 나아간다는 것조차 잊는 일이다.


둘째 날 아침/그림자 도망치기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자신의 발자국 소리를 싫어한 나머지 그것을 떨쳐 버리기로 결심했다. 그의 머리속에 떠오른 방법은 그것들로부터 도망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발을 내디뎌 달리면 달릴수록 새로운 발자국 소리가 늘어만 가고 그의 그림자는 조금도 어려움 없이 그를 따라왔다. 그는 이 모든 재난이 아직 자신의 달리는 속도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더욱 빠르게 달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힘이 다해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는 이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만일 그가 단순히 그늘 속으로만 걸어 들어갔어도 그의 그림자는 사라졌을 것이다. 그가 자리에 가만히 앉아만 있었어도 그의 발자국 소리를 더 이상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셋째 날 아침/도인이 된 싸움닭

기성자는 왕을 위해 싸움닭을 훈려시키는 사람이었다. 그는 훌륭한 닭 한 마리를 골라 훈련을 시켰다. 열흘이 지나자 왕은 닭이 싸움할 준비가 되었는가를 물었다.

조련사는 대답했다.

“아직 안 됐습니다. 아직 불같은 기운이 넘치고 어떤 닭과도 싸울 자세입니다. 공연히 뽐내기만 하고 자신의 기운을 너무 믿고 있습니다.”

다시 열흘이 지나 왕이 문자, 조련사는 대답했다.

“아직 안 됐습니다. 아직도 다른 닭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불끈 성을 냅니다.”

또 다시 열흘이 지났으나 왕의 물음에 그는 여전히 대답했다.

“아직 멀었습니다. 아직도 상대를 보기만 하면 노려보고 깃털을 곤두세웁니다.”

또 열흘이 지나 왕이 묻자, 기성자는 마침내 대답했다.“다른 닭이 울어도 움직이는 빛이 안 보이고, 먼 곳에서 바라보면 마치 나무로 조각한 닭과도 같습니다. 이제 성숙한 싸움닭이 되었습니다. 어떤 닭도 감히 덤비지 못할 것이며, 아마 바라보기만 해도 도망칠 것입니다.”


넷째 날 아침/원숭이 동산에서의 일

오나라 왕이 강에 배를 띄우고 놀다가 강변의 원숭이 동산에 이르렀다. 원숭이들은 왕의 일행을 보자 모두 겁에 질려 나무 꼭대기로 도망쳤다. 그런데 한 마리 원숭이만은 완전히 무관심한 듯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여 나뭇가지 사이로 이동하며 자기의 재주를 왕에게 자랑했다. 왕이 활을 들어 그 원숭이를 향해 화살 하나를 쏘았다. 그러자 원숭이는 날아오는 화살을 능숙하게 손으로 잡는 것이었다. 이에 왕은 신하들에게 일제히 원숭이를 향해 활을 쏘라고 명령했다. 한순간에 원숭이는 온몸에 집중적으로 화살을 맞고 그 자리에 떨어져 죽었다. 그러자 왕은 친구인 안불의를 돌아보며 말했다.

“방금 일어난 일을 보았는가? 이 원숭이는 자기의 영리함을 자랑하고 자기의 재주를 너무 믿었다. 이것을 기억하라! 사람들과 상대할 때 자신을 돋보이지 말고 재능에 의존하지 말라.”

집에 돌아오자 안불의는 그 길로 한 현자의 제자가 되었다. 자기를 돋보이게 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지금까지의 모든 쾌락을 버렸으며, 어떤 것이든 자신의 뛰어남을 감추는 법을 배웠다. 머지않아 나라 안의 누구도 그를 어떻게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모두가 그를 경외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섯째 날 아침/거북이의 생

한번은 장가가 푸 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때 초나라 사신 두 사람이 왕의 공식 문서를 받들고 찾아왔다.

“왕께서 당신을 재상으로 임명하셨습니다.”

장자를 낚싯대를 든 채 여전히 강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초나라에 한 신령한 거북이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거북이는 죽은 지 3천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그것을 비단으로 싸고 귀한 상자에 넣어 사원의 제단에 모시고 있다고 들었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거북이는 죽어서 뼈만 남아 3천 년 동안 향 연기를 맡으며 왕의 제사를 받기를 원하겠는가. 아니면 진흙 바닥을 꼬리를 끌며 돌아다닐지라도 평범한 거북이로 살아 있기를 원하겠는가?”

두 사신이 대답했다.

“그야 물론 거북이로서는 살아서 진흙 바닥을 꼬리를 끌며 돌아다니는 편이 낫겠지요.”

장자가 말했다.

“어서 돌아가라. 나 또한 진흙 바닥을 기어다니고 싶으니!”


여섯째 날 아침/바닷새를 죽인 음악

주머니가 작으면 큰 물건을 담을 수 없고 두레박줄이 짧으면 깊은 우물물을 길을 수 없다. 이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가? 옛날에 바닷새 한 마리가 노나라 수도의 교외에 날아온 적이 있었다. 왕이 그것이 상서로운 징조라 해서 성대한 환영회를 베풀라고 명령하고 바닷새에게 종묘의 술을 마시게 하는가 하면 음악가들을 불러 순임금 시절의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그뿐 아니라 여러 맛있는 짐승 고기까지 대접했다. 그러나 이 소란스런 잔치에 놀라 불행한 바닷새는 슬픔 속에 죽고 말았다. 새는 어떻게 길러야 하는가? 인간의 입장에 따라서? 또는 새의 입장에 따라서? 새는 깊은 숲속에 둥지를 틀고 들판과 물가를 자유롭게 날아야 하지 않을까? 강이나 호수 위를 떠다니면서 미꾸라지나 물고기를 잡아먹고 때로 다른 물새들과 줄지어 날다가 갈대 끝에 앉아 한가롭게 쉬어야 하지 않을까? 새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거나 사람의 소리를 듣는 것조차 싫어하는데 어찌 시끄러운 음악에 놀라지 않겠는가! 그들은 음악으로 바닷새를 죽인 것이다. 물은 물고기를 위한 것이고 공기는 인간을 위한 것이다. 본래 성품이 각자 다르니 필요한 것도 다르다. 그러기에 옛 현자는 하나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 않았다.


일곱째 날 아침/물고기와 도

물고기는 물에서 나고 사람은 도에서 난다.

물에서 난 물고기는 연못의 깊은 그늘로 찾아 들어가면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모두 채워진다.

도에서 난 사람은 행위 깊은 그늘로 침잠해 다툼과 근심을 잊는다면 그는 아무 부족함이 없고 그 삶은 평화롭다.


열덟째 날 아침/강의 신과 바다의 신

가을 홍수가 밀어닥쳤다.

수천 갈래의 노도와 같은 물길이 황하로 밀려들었다.

강둑까지 물이 불고 강폭이 넓어져서 이쪽에서 바라보면 저쪽 강둑에 서 있는 것이 소인지 말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황하의 신은 무척 자랑스러워하며 세상의 아름다움이 모두 자기 손안에 들어온 것이라 여겼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물결을 따라 흘러내려가 마침내 바다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그는 헤아릴 수 없는 파도가 동쪽 수평선까지 무한히 이어진 것을 보고 놀라서 그만 말을 잊었다.

그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다가 비로소 정신을 차린 그는 바다의 신을 향해 한탄했다.

“속담에 ‘겨우 백 개를 도리를 듣고는 천하에 자기만한 자가 없는 줄 안다’는 말이 있는데, 역시 그 말이 맞도다. 바로 나를 두고 한 말이다. 이제야 넓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구나.”

바다의 신이 말했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여름 한 철에만 사는 벌레에게 얼음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철학을 논하는 자에게 삶의 도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아홉째 날 아침/장자, 도를 말하다

마음에는 행복과 불행에 영향받지 않는 부동의 탑이 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의 도에 의해 그 탑은 보호받는다.

자연의 도는 인위적이지 않고 의식함이 없는 것이어서, 꾸미고 계산하고 의도적일 때는 이미 자연의 도가 아니다.

스스로를 의식해 자기를 드러내고자 할 때 그 행위는 자연의 도에 어긋나며 자기 본래의 것을 잃는다.

자기를 의식적으로 드러냄은 모두 거짓된 것이다.

그때 더 이상 자연의 도에 의해 보호받지 못한다.

자연의 도를 잃으면 행동 하나하나가 재난을 부른다.

남의 눈에 띄는 밝은 곳에서 행하면 사람들이 벌을 내릴 것이며,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은밀히 행하면 귀신이 벌할 것이다.

저마다 자연의 도를 이해하고 자기를 드러내려는 노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라.

그런 이는 사람에 대해서나 귀신에 대해서나 늘 평화로울 것이며, 마음의 탑에 초연히 홀로 머물며 늘 옳게, 그러나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할 것이다.


열째 날 아침/수레 만드는 자

나라의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환공이 어느 날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마침 수레 만드는 목수인 윤편이라는 자가 뜰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었다. 윤편이 문득 망치와 끌을 내려놓고 일어나더니 환공에게로 다가와 물었다.

“좀 여쭙겠습니다만, 왕께서 지금 읽고 계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성인들의 말씀이다.”

윤편이 다시 물었다.

“그럼 그 성인들은 살아 있습니까? 죽었습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오래전에 죽었다.”

그러자 윤편이 말했다.

“그렇다면 왕께서 읽으시는 것은 옛사람이 남긴 찌꺼기이군요.”

환공이 화가나서 말했다.

“수레 만드는 목수인 주제에 무엇을 안다고 떠드는 것이냐? 네가 지금 한 말에 대해 이치에 닿는 설명을 하지 못하면 목숨이 없어질 줄 알라.”

그 수레 만드는 자가 말했다.

“저는 어디까지나 제 일에서 얻은 경험으로 미루어 말할 것일 뿐입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너무 깎으면 헐렁해서 쉽게 빠져 버립니다. 또 덜 깎으면 조여서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더 깎지도 덜 깎지도 않게 적절히 손을 놀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바퀴가 꼭 맞아 제가 원하는 대로 일이 끝납니다. 그러나 그 기술은 손으로 익혀 마음으로 짐작할 뿐 말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 요령을 심지어 제 자식놈에게조차 가르쳐 주지 못하고 있으며 자식놈 역시 저에게서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이 일흔이 넘어서도 제 손으로 수레바퀴를 까꼬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의 성인들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진정으로 깨친 사실을 아무에게도 전하지 못한 채 죽어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왕께서 지금 읽으시는 그 글이 그들이 뒤에 남기고 간 찌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열한째 날 아침/장자의 죽음

장자가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제자들은 성대한 장례식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자가 말했다.

“나는 하늘과 땅으로 나의 관을 삼을 것이다. 해와 달은 나를 호위하는 한 쌍의 옥이 될 것이며 행성과 별무리들이 내 둘레에서 보석들처럼 빛날 것이다. 그리고 만물이 내 장례식 날 조문객들로 참석할 것이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모든 것은 두루 돌보아진다.”

제자들이 말했다.

“우리는 까마귀와 솔개들이 스승님의 시신을 쪼아 먹을까 두렵습니다.”

장자가 말했다.

“그렇다, 땅 위에 있으면 나는 까마귀나 솔개의 밥이 될 것이다. 그리고 땅속에서는 개미와 벌레들에게 먹힐 것이다. 어느 경우든 나는 먹힐 것이다. 그러니 왜 그대들인 새에게 먹히는 경우만 생각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