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신상담
춘추 말기 패권을 다툰 나라는 오와 월이다. 회계산을 분기점으로 국경을 맞댄 남방의 두 나라가 천하의 패권을 다투려니 앙숙이 될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496년 월왕 윤상이 죽었다. 태자가 대를 이으니 그 이름은 구천이었다. 이 구천의 야심과 패기가 만만치 않았다. 오는 군주가 바뀌는 틈을 이용해 월을 쳤다. 우방의 안전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중앙으로 마음놓고 진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월은 임금의 죽음으로 인한 혼란이 채 수습되지 않았고 새 임금은 국정을 온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에 구천은 죽음의 돌격대를 조직했다. 돌격대가 먼저 오를 공격했다. 세 줄로 늘어서서 거침 없이 오의 진영으로 내달았다. 겨우 수백의 군사로 선공을 감행하는 월의 무모함에 오의 진영은 어리벙벙할 지경이었다. 돌격대가 가까워지자 오나라도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 순간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돌격대가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스스로 제 창칼에 엎어지거나 목을 베는 것이었다. 오나라 군사들은 기겁해 지켜보기만 했다. 오나라 진영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는 사이 구천은 다른 부대를 이끌고 뒤를 기습했다. 이 전투에서 오왕 합려는 손가락에 화살을 맞았는데, 그 독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신출내기 임금 구천이 패자 등극을 눈앞에 둔 합려를 꺾은 것이다. 합려로서는 억울하고도 원통한 일이었다.
"아비의 원수를 잊지 말아라."
합려가 죽어가며 태자 부차에게 유언했다.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반드시 3년 안에 원수를 갚겠습니다."
부차가 복수를 다짐하며 이를 갈았다. 그 날 저녁 합려가 숨을 거두고 부차가 위를 이었다. 부차는 초나라에서 귀순한 대부 백비를 태재로 삼고 오자서를 책사로 삼아 복수전을 준비했다. 군비를 확충하고 강도 높은 군사 훈련을 시켰다. 그런 한편 원수를 잊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핍박했다. 장작더미를 침상 삼아 자면서 고통과 싸웠다. 뼈에 사무치는 와신의 세월이 시작된 것이다. 부자는 침소를 드나들 때마다 시종더러 외치게 했다.
"너의 부친을 죽인 자가 월나라 구천임을 잊지 말아라!"
부차는 반드시 이렇게 대답했다.
"예 3년 안에서 반드시 원수를 갚겠습니다."
와신의 세월이 2년쯤 되었을 때였다. 부차의 소식을 들은 구천은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오나라 군대가 점점 정예화되어 가니 세월이 갈수록 불리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선공해 기세를 꺾으리라!"
구천의 결단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책사 범려였다. 구천은 정치와 병법은 물론 천문 지리에도 능통한 범려의 보필에 힘입어 빠른 시간 안에 강자로 자랄 수 있었다. 그런데 구천은 범려의 만류를 뿌리치고 과감하게 출정을 단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부차는 기꺼이 정예병을 앞세워 대적했다. 와신의 세월을 살며 복수심에 불타는 부차는 부초산에서 월군을 크게 물리쳤다. 구천은 남은 군사 5천을 이끌로 회계산으로 숨었다. 이에 부차가 회계산을 포위하니 승부는 가름나고 말았다. 와신으로 노낸 세월을 보상받는 순간이었다.
탄식하는 구천에게 범려가 말했다.
"충만함을 지속하려면 하늘의 도리를 본받아야 하고, 넘어지려는 것은 안정시키고자 하면 사람의 도리를 알아야 하며, 사리를 통제하고자 하면 땅의 이치를 본받아야 합니다. 겸허한 말과 두둑한 예물을 갖추어 그 부차에게 보내십시오. 만약 받아들이지 않으면 왕께서 스스로 볼모가 되어 그를 섬기십시오."
어떤 치욕을 당하더라고 살아 남으라는 얘기였다. 구천은 그대로 따르기로 하고 대부 문종을 보내 화의를 청했다. 자신의 부차의 신하가 디고 왕비까지 첩으로 줄 테니 화약을 맺자는 것이었다. 이 굴욕적인 조약을 부차는 승인하려 했다. 이에 결연히 반대하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오자서였다. 오자서는 단호했다. 그러나 승리감에 도취된 부차는 결국 조약을 맺고 포위망을 풀었다. 그토록 복수의 칼을 갈았건만 선왕에 대한 최종적인 복수는 포기한 셈이었다. 구천은 피눈물을 머금고 도성으로 귀환했다. 왕비마저 부차의 첩으로 내주었으니 씻을 수 없는 패배였다. 구천의 낙담은 컸다. 실의에 빠진 구천에게는 문종이라는 매우 자상한 신하가 있었다.
"성탕은 하대에 갇혔고, 문왕은 유리에 구속되었고, 소백은 거나라로 도망쳤습니다만 종국에는 모두 천하를 얻었습니다. 왕께서도 훗날을 도모하십시오."
절치부심 구천은 복수를 결심했다. 그는 원한을 잊지 않고자 특이한 행태를 연출했다. 침소에 쓸개를 매달아 놓고 앉고 일어설 때나 음식을 먹을 때도 혀로 핥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너는 회계산의 치욕을 잊지 않았겠지?"
상담의 세월이 시작된 것이다. 나라의 위신과 명예를 되찾는 방법으로 구천은 자신을 한없이 낮추었다. 결국 구천은 나중에 원수를 갚게 된다.
(재상 중국편, 박윤규 지음, 이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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