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창세기묵상

창세기강해28(아벨의 길) 창4:8

기독항해자 2010. 8. 5. 13:48

2010년 8월 6일(금)

사도신경-나의 가는 이 길이(1610),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1994)

본문: 창세기 4장 8절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제목: 창세기강해28(아벨의 길)

오늘 아침에는 아벨의 길에 대해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①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가인이 그의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아벨을 쳐죽였습니다. 범죄한 인류에게 찾아온 부정적인 성품 중에 하나가 시기심입니다. 시기심은 시기심의 대상을 살인하는 곳까지 이끕니다. 요셉의 형들의 시기심이 요셉을 구덩이에 던지게 하였고 요셉을 노예로 팔게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7:9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유대인들의 시기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7: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그런데 우리의 질문은 왜 이럴 경우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신가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께 질문하고 있습니다. 악인이 득세하고 의인이 핍박을 받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물음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불신자들이 신자보다 더 잘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신자들이 신자들을 핍박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때 우리들은 하박국과 같은 물음을 갖게 됩니다. 아벨은 이 바로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아벨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벨이 가인으로부터 살해를 당했을 때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이런 생각을 갖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이 죽는 순간에 개입하셔서 살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마땅히 하나님은 아벨을 살리셔야만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죽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공허하게 죽었습니다. 그의 이름대로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아벨의 죽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아벨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한다고 성경기자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한다는 말은 살아 있는 것을 말합니다. 죽은 사람은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산 사람만이 말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벨은 죽었지만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아벨의 길은 선사후생의 길이고 가인의 길은 선생후사의 길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바로 이 선사후생의 길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16:24-2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이란의 한 기독교인은 "만약 우리에게 영적인 비전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 지 모를 수밖에 없는 사람과 같습니다. 비전은 우리가 어디서 시작해야하고 언제 마쳐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비전이 있는 사람은 현재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고난과 핍박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눈으로 미래를 바라봅니다. 이란의 모든 순교자들은 주님이 주시는 비전이 있었기에, 그 비전 때문에 주님을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벨의 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고 가인의 길은 넓은 문으로 가는 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예수님은 아벨의 길의 특징을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좁다, 협착하다, 찾는 이가 적다.” 아벨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 적은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벨의 길은 죽음의 길이요 고난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내 자아가 죽는 종교입니다. 나는 없고 오직 살아계신 주님만이 존재합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기독교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만 주님이 내 안에 사는 역사가 있습니다. 내 뜻을 굽히고 가는 것입니다. 내 의지를 버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벨의 길을 가려 하지 않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서 아벨의 길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모두다 자기 색깔을 내기 바쁩니다. 자기를 어떻게 하면 더 드러낼 것인가 골몰합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아름답게 화려하게 사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더 많이 더 편리하게 사는 데에 우리의 관심이 온통 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벨의 길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길입니다.

아벨의 길은 알고 가는 길이고 가인의 길은 모르고 가는 길입니다.

아벨의 길은 생명의 길이고 천국의 길입니다. 가인의 길은 사망의 길이고 지옥의 길입니다. 사망길, 지옥의 길을 알고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망길, 지옥의 길, 가인의 길을 알고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아벨의 길은 알고 가는 길입니다. 아벨의 길은 고난의 길임을 알고 가는 길입니다. 아벨의 길은 죽음의 길임을 알고 가는 길입니다. 내가 죽어야만 사는 길임을 알고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생명의 길이고 천국의 길입니다. 그 길은 어려운 길이기 때문에 적은 사람이 가는 길입니다. 아벨의 길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출발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여행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천국에서 아벨의 길을 마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