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창세기묵상

창세기강해27(예배의 두 길) 창4:1-7

기독항해자 2010. 8. 4. 13:54

2010년 8월 5일(목)

사도신경-182, 183장

본문: 창세기 4장 1~7절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제목: 창세기강해27(예배의 두 길)

오늘 아침에는 가인과 아벨의 하나님께 드린 첫 예배를 통해서 예배의 두 길에 대해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①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인류 최초의 직업의 분화가 나오고 있습니다. 목축업과 농업이 분화되었습니다. 목축업과 농업의 분화로 인해서, 두 사람 사이의 물물교환이 있게 되었습니다. 교환경제가 시작된 것입니다. 양치는 자란 목축업자를 말합니다. 양으로 번역된 촌은 '양'뿐 아니라 '염소'등 몸집이 비교적 작은 모든 가축을 뜻합니다(27:9 ; 민 32:16). 따라서 아벨은 여러 종류의 가축을 돌보는 자였습니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습니다. 이 두 개의 직업은 다스리라고 하는 창조 명령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나게 됩니다. 두 사람이 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한 사람의 예배는 받으시고 다른 한 사람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예배의 두 길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열납 되는 예배와 열납 받지 못하는 예배입니다.

②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더니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도 아벨도 자신들이 이룬 성과물을 가지고 나아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예배는 받으시고 가인의 받지 않으셨습니다. 열납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쳐다보지도 아니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과 그 제물에 대해선 관심조차 기울이지 아니하셨음을 뜻합니다. 본문만으로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How) 제사를 받아들이거나 혹은 거부하였음을 나타내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보통은 열납되는 예배는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그 제물은 태우셨습니다. 아벨의 제물은 태우고, 가인의 제물은 그냥 내버려두시는 방법을 사용하셨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아벨의 예배는 받으시고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을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이 있어 왔습니다.

첫 번째 해석은 전통적인 해석으로 가인이 ‘피 없는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담 이후에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것을 원죄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아벨과 가인도 죄인이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는) 먼저 속죄제가 필요했습니다. 레위기에 의하면 죄를 속하는 속죄제는 반드시 희생제물이 필요했습니다. 그 후에 사람들은 번제나 화목제물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해석은 가인이 이 속죄제(피제사)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되었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 해석은 제물이 아니라 예배하는 당사자의 삶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으나’, 그리고 5절을 보면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을 받으시기 전에 먼저, 아벨을 하나님은 제물로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거절하기 전에 먼저 가인을 거절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을 받으시고 가인을 거절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신약의 히브리서를 지은 기자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신 이유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의 제사에 대해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11:4)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신 이유는 그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가인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응답과 거절의 차이는 바로 믿음의 차이였습니다. 하나님의 판결은 공정한 것이었습니다. 잠언15:8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는니라.” 잠언21:27 “악인의 제물은 본래 가증하거든 하물며 악한 뜻으로 드리는 것이랴.” 잠언에서 말하는 악인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의 생각과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악인은 행위가 악한 사람들이 아니라, 생각이 악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악한 생각은 항상 언제든지 밖으로 들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③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하나님께서 가인의 예배를 거절하신 다음의 행동은 가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제사가 거절되었을 때, 분노했습니다. 그의 분노는 얼굴색까지 변하게 만들었습니다. 얼굴이 푸르락 붉으락하는 가인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가 누구에게 화를 내고 있습니까? 가인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자기 자신을 성찰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 내 예배를 거절했을까?라고 자기를 살피는 것이 신자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잘못을 타인에게 전가합니다. 자기는 옳고 하나님이 정당하지 못하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가인은 그럴 정도로 삐뚤어져 있었습니다. 그런 가인의 마음은 동생을 향해서 시기, 질투, 미움을 낳았습니다. 미움은 살의를 갖게 합니다. 가인은 ‘살인을 했기 때문에 악인이 된 것’이 아니라 ‘본래 악인이었기 때문에 살인도 하게 된 것’입니다. 가인에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없었습니다. 예배는 삶의 결정체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이 없다면, 우리가 드리는 기도, 찬양, 헌금을 하나님께서 거절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1:11-13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실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안색이 변하니’는 '얼굴을 강타하다'는 말로 극심한 분노나 불만에 의해 안면 근육이 경직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죄인의 일반적 태도인데 자신의 제물이 열납되지 못한 것을 본 가인은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했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방자히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④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은 가인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7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는 죄를 짓지 않은 자는 떳떳하게 행동할 수 있다는 히브리인들의 관용적 표현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한 낮에 대로를 활보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도 당당하게 행동하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주위를 살핍니다. 그리고 주로 밤에 활동합니다. 숨어서 삽니다. 경찰에 붙잡힐까봐 두려워서 그렇게 행동을 합니다. 따라서 본절은 '네가 잘했다면 왜 떳떳하지 않겠느냐?'라는 역설적 표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는 자신이 잘 압니다.

우리 앞에는 죄의 길과 선의 길이 있습니다. 죄의 길을 갈 수도 선의 길을 갈 수도 있습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선의 길을 가지 않게 되면, 죄의 길이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자가 초식동물을 잡기 위해서, 낮게 웅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오면 일어나서 혼비백산케 만듭니다. 당황한 동물들은 어쩔 줄을 몰라합니다. 그때 일격을 가합니다. 죄가 선을 행하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당사자가 죄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죄는 다만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고 삼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인아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 그렇지만 그 죄가 너를 삼켜 버린다.” 죄는 가지고 놀아서는 안 됩니다. 죄는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죄가 우리를 삼켜 버립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경고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가인아 너는 더 이상 가서는 안 된다. 너는 거기에서 멈추어서 돌이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끔찍한 일이 일어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