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면 가인은 믿음이 없었을까요?
가인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가인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아벨과 가인의 제사를 갈라놓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창세기에 나와 있는 이 믿음의 이야기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인생의 길은 아주 다양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 두 개의 길 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1편은 그 두 개의 길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1편이 제시하고 있는 인생의 두 길은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입니다.
아벨과 가인은 이 두 길을 따라 갔던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아벨의 길은 의인의 길이고 가인의 길은 악인의 길입니다.
이 두 사람의 길은 예배에서 극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오늘은 아벨의 길과 가인의 길을 통해서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은 어떤 길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인생의 두 길
①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인류 최초의 직업의 분화가 나오고 있습니다.
목축업과 농업이 분화되었습니다.
목축업과 농업의 분화로 인해서, 두 사람 사이의 물물교환이 있게 되었습니다.
교환경제가 시작된 것입니다.
양치는 자란 목축업자를 말합니다.
양으로 번역된 촌은 '양'뿐 아니라 '염소'등 몸집이 비교적 작은 모든 가축을 뜻합니다(27:9 ; 민 32:16).
따라서 아벨은 여러 종류의 가축을 돌보는 자였습니다.
반면에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습니다.
이 두 개의 직업은 다스리라고 하는 창조 명령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나게 됩니다.
두 사람이 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한 사람의 예배는 받으시고 다른 한 사람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예배의 두 길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열납 되는 예배와 열납 받지 못하는 예배입니다.
②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더니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도 아벨도 자신들이 이룬 성과물을 가지고 나아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예배는 받으시고 가인의 받지 않으셨습니다.
열납 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쳐다보지도 아니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과 그 제물에 대해선 관심조차 기울이지 아니하셨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제사를 받아들이거나 혹은 거부하였음을 나타내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보통은 열납 되는 예배는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그 제물을 태우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벨의 제물은 태우고, 가인의 제물은 그냥 내버려두시는 방법을 사용하셨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아벨의 예배는 받으시고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을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이 있어 왔습니다.
첫 번째 해석은 전통적인 해석으로 가인이 ‘피 없는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담 이후에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것을 원죄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아벨과 가인도 죄인이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는) 먼저 속죄제가 필요했습니다.
레위기에 의하면 죄를 속하는 속죄제는 반드시 희생제물이 필요했습니다.
그 후에 사람들은 번제나 화목제물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해석은 가인이 이 속죄제(피제사)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되었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 해석은 제물이 아니라 예배하는 당사자의 삶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으나’,
그리고 5절을 보면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을 받으시기 전에 먼저, 아벨을 하나님은 제물로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거절하기 전에 먼저 가인을 거절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을 받으시고 가인을 거절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신약의 히브리서를 지은 기자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신 이유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의 제사에 대해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11:4)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신 이유는 그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가인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응답과 거절의 차이는 바로 믿음의 차이였습니다.
하나님의 판결은 공정한 것이었습니다.
잠언15:8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는니라.”
잠언21:27 “악인의 제물은 본래 가증하거든 하물며 악한 뜻으로 드리는 것이랴.”
잠언에서 말하는 악인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의 생각과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악인은 행위가 악한 사람들이 아니라, 생각이 악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악한 생각은 항상 언제든지 밖으로 들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③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하나님께서 가인의 예배를 거절하신 다음의 행동은 가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제사가 거절되었을 때, 분노했습니다.
그의 분노는 얼굴색까지 변하게 만들었습니다.
얼굴이 푸르락 붉으락하는 가인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가 누구에게 화를 내고 있습니까?
가인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자기 자신을 성찰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 내 예배를 거절했을까?라고 자기를 살피는 것이 신자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잘못을 타인에게 전가합니다.
자기는 옳고 하나님이 정당하지 못하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가인은 그럴 정도로 삐뚤어져 있었습니다.
그런 가인의 마음은 동생을 향해서 시기, 질투, 미움을 낳았습니다.
미움은 살의를 갖게 합니다.
가인은 ‘살인을 했기 때문에 악인이 된 것’이 아니라 ‘본래 악인이었기 때문에 살인도 하게 된 것’입니다.
가인에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없었습니다.
예배는 삶의 결정체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이 없다면, 우리가 드리는 기도, 찬양, 헌금을 하나님께서 거절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1:11-13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실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안색이 변하니’는 '얼굴을 강타하다'는 말로 극심한 분노나 불만에 의해 안면 근육이 경직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죄인의 일반적 태도인데 자신의 제물이 열납되지 못한 것을 본 가인은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했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방자히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④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은 가인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7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는 죄를 짓지 않은 자는 떳떳하게 행동할 수 있다는 히브리인들의 관용적 표현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한 낮에 대로를 활보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도 당당하게 행동하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주위를 살핍니다.
그리고 주로 밤에 활동합니다.
숨어서 삽니다.
경찰에 붙잡힐까봐 두려워서 그렇게 행동을 합니다.
따라서 본절은 '네가 잘했다면 왜 떳떳하지 않겠느냐?'라는 역설적 표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는 자신이 잘 압니다.
우리 앞에는 죄의 길과 선의 길이 있습니다.
죄의 길을 갈 수도 선의 길을 갈 수도 있습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선의 길을 가지 않게 되면, 죄의 길이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자가 초식동물을 잡기 위해서, 낮게 웅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오면 일어나서 혼비백산케 만듭니다.
당황한 동물들은 어쩔 줄을 몰라합니다.
그때 일격을 가합니다.
죄가 선을 행하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당사자가 죄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죄는 다만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고 삼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인아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 그렇지만 그 죄가 너를 삼켜 버린다.”
죄는 가지고 놀아서는 안 됩니다.
죄는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죄가 우리를 삼켜 버립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경고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가인아 너는 더 이상 가서는 안 된다. 너는 거기에서 멈추어서 돌이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끔찍한 일이 일어나게 된다.” 그
런데 가인은 끔찍한 결과를 범하게 됩니다.
2. 아벨의 길
①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가인이 그의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아벨을 쳐죽였습니다.
범죄한 인류에게 찾아온 부정적인 성품 중에 하나가 시기심입니다.
시기심은 시기심의 대상을 살인하는 곳까지 이끕니다.
요셉의 형들의 시기심이 요셉을 구덩이에 던지게 하였고 요셉을 노예로 팔게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7:9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유대인들의 시기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7: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그런데 우리의 질문은 왜 이럴 경우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신가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께 질문하고 있습니다.
악인이 득세하고 의인이 핍박을 받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물음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불신자들이 신자보다 더 잘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신자들이 신자들을 핍박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때 우리들은 하박국과 같은 물음을 갖게 됩니다.
아벨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아벨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벨이 가인으로부터 살해를 당했을 때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이런 생각을 갖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이 죽는 순간에 개입하셔서 살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마땅히 하나님은 아벨을 살리셔야만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죽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공허하게 죽었습니다.
그의 이름대로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아벨의 죽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아벨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한다고 성경기자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한다는 말은 살아 있는 것을 말합니다.
죽은 사람은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산 사람만이 말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벨은 죽었지만 살아있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