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장에는 에덴동산이 잘 묘사돼 있다.
신은 세상을 창조한 다음에야 비로소 흙으로 아담을 빚었다. 아담은 ‘흙’을 의미하는 ‘아다마’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고는 에덴에 동산을 만들어 그곳에서 살도록 했다. ‘에덴’은 아카드어에서 ‘평원’을 뜻하는 ‘에디누’ 또는 ‘환희’나 ‘기쁨’을 뜻하는 히브리어 어근과 연관이 있다. 예로부터 이 말은 낙원이라는 관념을 나타냈다. 낙원이라는 말은 원래 페르시아어 ‘아피리다에자’가 히브리어 ‘파르데스’로 바뀌고 다시 그리스어 ‘파라데이소스’로 바뀌어 생겨난 단어다.
그러나 신은 사람이 짝이 없으면 바로 살아갈 수 없다며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뽑아 여자 이브를 만들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이끌리는 것은 이들이 원래 한 몸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 이브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 먹는 바람에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매우 슬픈 결말을 맞는다. 이뿐이 아니다. 이들은 신에 불복종한 일 때문에 죽음을 거역할 수 없는 존재가 됐다. 행복하게 누리던 낙원 생활이 더는 제공되지 않음은 물론 눈이 밝아져 벗은 것과 선악을 알게 됐다.
에덴동산은 어디에 있었을까? 구약성서는 에덴동산의 위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 구절을 보면 「창세기」에 나오는 지역은 실제로 4대 문명 발상지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임이 틀림없다. 메소포타미아란 그리스어로 ‘강 사이에 있는 땅’이란 뜻으로 아르메니아 산악 지대에서 흘러내려오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를 말한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에 물을 공급하는 것은 빙하다. 두 강의 원천은 아라라트 산이 있는 터키 동부 아르메니아 산지에 있다. 거기서 동쪽으로 흘러나온 티그리스 강은 이라크, 시리아, 터키 국경 가까이에 있는 산을 거쳐 이라크를 향해 흘러내린다. 지중해를 향해 서쪽으로 흐르는 유프라테스 강은 해안에서 150킬로미터 거리 지점에서 시리아 사막을 횡단해 이라크로 들어간다.
성경을 보면 나무가 풍성한 열매를 맺고 아담과 이브는 뱀에게 속아 선악과나무의 열매를 먹을 때까지 알몸으로 살았다고 기록돼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벌거벗고 살아도 좋을 만큼 기온이 매우 높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5만 3,000년 전부터 1만 년 전까지는 ‘뷔름빙기’라 불리는 빙하기로, 빙하가 현재보다 넓은 지역을 덮고 있었다. 그러다 약 1만 년 전부터 빙하가 녹으면서 기온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4000년부터 3000년 사이에 기온이 최고가 됐으며 그 뒤로 기온이 약간 내려가 현재와 같은 수준이 됐다. 현재보다도 기온이 높았던 이 시기를 일러 ‘고온기’ 또는 ‘기온 최적기’라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에덴동산은 인간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아도 살 수 있을 만큼 기온이 높았던 시기에 메소포타미아에 있었던 살기 좋은 지역을 의미한다.
사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문명이 번영했다. 이 일대에서는 기원전 8000년에 이미 보리와 같은 곡물을 재배했고, 염소나 양을 사육했을 뿐 아니라 기원전 5000년에는 본격적인 관개 기술이 정돈되기 시작했다.
에덴동산을 찾는 일은 뜻하지 않는 난관에 봉착한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은 현재도 존재하므로 문제가 없는데 나머지 두 강인 비손 강과 기혼 강을 찾을 수 없다는 게 난점이었다. 성경에 적힌 한마디 한마디를 사실로 믿는 몇몇 학자들은 나머지 두 강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에덴동산이 있던 곳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아닐지 모른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래서 에티오피아, 터키, 심지어는 인도까지 후보지로 거론됐다.
그 와중에 미국인 자린스는 에덴동산을 드디어 찾았다고 단언했다. 그는 에덴동산이 페르시아 만에 잠겨 있다고 주장했다. 빙하시대에 페르시아 만은 육지였다. 페르시아 만 지역에서 발견된 수많은 동물 유해는 이 지역이 사냥감이 풍부한 지역이었음을 말해주며 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된다는 것은 인간이 이 지역에 집단으로 거주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오늘날 ‘와디리마’와 ‘와디바틴’으로 알려져 있는 골짜기 두 곳이 고대에 있던 강줄기를 따라 형성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자린스는 이 골짜기가 비손 강의 흔적이고 기혼 강은 오늘날 페르시아 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기룬 강이라고 믿고 있다. 단지 바다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추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에 자리 잡은 셈족 중 일부가 고향을 떠나게 된 이유도 기후 변화 때문이다. 메소포타미아의 낮은 땅에 쌓이는 흙은 멀리 사막의 대지를 침식하면서 흘러오는 것으로, 탄산칼슘 등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 배수가 불충분한 상태에서 건조가 심해지면 탄산칼슘과 물이 반응해서 생성되는 수산화칼슘 등이 지표에 쌓인다. 이것을 염화 현상이라고 하는데 평소에는 염화 현상이 일어나도 강이 범람하거나 홍수가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씻겨 내려갔다.
그런데 기원전 3000년 이후 기후 변동으로 강수량이 줄고 홍수가 줄어들었다. 더욱이 관개용수를 정비해 강물도 범람하지 않게 되자 염화 현상은 점점 더 심해졌다. 결국 곡물 수확량이 감소하니 사람들은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이 바로 히브리인의 선조다. 학자들은 최전성기와 비교하면 수확량이 4분의 1 이하로 떨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염화 현상은 요즘도 골치 아픈 문젯거리다.
2003년 10월, 에덴동산이 메소포타미아에 존재했다는 데 고무된 이라크는 에덴동산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복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들이 복원하는 곳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만나는 쿠르나 시로, 현재도 이라크인들이 ‘아담의 선악과나무’라고 주장하는 나무가 존재하는 곳이다.
원래 이 지역은 갈대가 무성한 지역이었으나, 1991년 걸프전 이후 시아파 모슬렘들이 지형을 이용해 거세게 반후세인 저항을 벌이자 후세인이 대규모 댐과 운하를 건설해 건조 지역으로 바꿔버렸다. 이 때문에 한때 50만 명에 이르던 지역 주민이 현재 2만 명에서 4만 명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각국의 지원으로 사막이 된 옛 늪지대는 3분의 1 정도 복구된 상태다. 에덴동산은 조만간 우리 눈앞에 다시 나타날 것이 틀림없다.
출처: 미스터리와 진실, 전설편 북카라반
에덴 동산(Garden of Eden).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낙원(樂園).
에덴은 낙원을 가리키는 가장 유명한 말 중 하나가 되었으며, 종종 낙원의 은유적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다만 실제 가톨릭이나 개신교에선 보통 에덴이라고 따로 부르지 않고 에덴 '동산'이라고 부른다.
에덴이라는 단어 자체는 수메르어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기쁨'이라고 알려져 있다. 불가타 역시 "에덴 동산"을 '기쁨의 동산'(paradisus voluptatis)으로 번역했다.
셋째 날에 물과 뭍을 갈랐으나 아직 초목과 채소를 내게 하지 않은 시점에서 만들어졌으며, 동쪽에 위치했다고 서술된다. 피손, 기혼, 힛데겔(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네 개의 강이 흐르고 있으며, 탐스럽고 먹기 좋은 열매가 열리는 나무들이 자라나있다.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자라나 있다.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의 각종 나무의 열매는 먹어도 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와 영생을 얻게 하는 나무는 먹지 마라"고 하였다. 그러나 뱀이 유혹하여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아담에게도 나눠주고 말았다. 그 후 하느님이 동산을 거닐 때,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나무 뒤에 숨었다. 하느님이 그들을 찾자 그들은 자신이 벗었기 때문에 두려워하여 숨었다고 대답하였고, 하느님은 그들에게 누가 너의 벗었음을 알렸느냐고 묻고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대답했고, 그렇게 해서 그들이 선악과를 먹었음이 들켰다.[1] 진노한 하느님은 에덴에서 그들을 영영 추방하고, 다시는 에덴에 들어올 수 없도록 불의 검을 든 케루빔에게 영원히 에덴의 문을 지키게 하였다.
이상의 내용은 성경 창세기 3장에서 등장한다.
다만 여기서 생명나무 열매를 금했는지 여부는 애매하게 서술된다. 2장에서는 선악과를 금했다고 서술되지만 3장에서는 중앙에 있는 나무를 금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생명나무와 선악과 모두 중앙에 위치한다. 창세기 3장 22절을 보면 지혜를 얻었으니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을 수 있으니 추방한다고 쓰여 있는데, 이는 이미 배신한 놈들이 지혜뿐만 아니라 생명까지 얻게 되면 대책이 없다는 뉘앙스에 가깝다.
성경에서 말하는 에덴의 그 지리적 소재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설이 분분한데, 성경 내에서 제시된 근거들을 토대로 봤을때 대표적으로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하구에 있는 옛 바빌로니아 평원의 일부인 딜문섬으로 추정한다. 이는 에덴동산을 흐른다고 성경에 명시된 강 중에서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의 이름이 직접 등장하기 때문이다. 물론 같이 언급되는 강들은 알수 없으며, 다만 이 두 강들의 지류나 개천 정도가 아닐까 하는 추측만 할 뿐이다. 딜문은 수메르 신화에 나오는 낙원 이름이기도 한다. 그 외에도 아르메니아 일대를 그 후보지로 보는 견해도 있다. (출처: 위키백과)
창 2:8-14 (에덴동산에서 나오는 네 강물의 뜻은) 우리가 성경을 창세기부터 읽어 가면 창세기 2장에 에덴동산의 네 가지의 강물이 나오는 것을 읽어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여기에 나오는 비손 강, 기혼 강, 힛데겔강, 유브라데 강은 무엇인지 뜻이 있을 것 같으면서도 그냥 우리가 늘상 접하는 어떤 강물이라고 생각하고는 그냥 지나가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중요한 시절에 에덴동산에서 물이 솟구쳐 나오며 그 물이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 갈라져 네 강물의 근원이 되는 것을 우연히 그렇게 그냥 만들어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뭔가 굉장히 뜻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이 네 강물을 이렇게 에덴동산에서 부터 퍼져 나오도록 만드시지 않았는가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네 강물, 에덴동산에서 흘러 넘쳐 온 땅을 적시는 네 강물에 대해서 우리가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월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림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세째 강의 이림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네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 2:10~14) 1. 비손강 11절에 보면 "비손이라" 비손 강이 생겼습니다. 비손이라는 뜻은 값없이 풍부하게 흐른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입니다. 값없이 풍부하게 흐르는 강물이 에덴동산, 하나님이 계신 에덴동산 한복판에서부터 솟구쳐 나옵니다. 이사야 55장 1절에도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값없이, 풍성하게, 무료로, 공짜로 이 은혜의 물들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계시록 22장 17절에도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돈주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비손이라는 강이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라고 했습니다. 하윌라는 히브리어를 찾아보니까 그 뜻이 "자라게 한다"는 것입니다. 값없이 흘려지는 은혜의 강물로 인하여 무언가 자라게 됩니다 그 비손 강 주위에는 금이 있습니다.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더라" 이 강물이 흘러가 금이 됩니다. 또 베델리엄이 됩니다. 베델리엄은 진주입니다. 민수기 11장 7절에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고 했는데 모양은 베델리엄과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베델리엄을 민수기에서는 진주라고 번역해놨는데 같은 성경인데 왜 여기서는 그냥 베델리엄이라고 �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쨋든 진주가 생깁니다. 그리고 호마노 역시 보석의 일종입니다. 그래서 이 비손 강은 값없이 풍성하게 흘러나와 주위 모든 것들을 자라게 하며 그래서 결국 아름다운 금과 진주와 보석이 되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2. 기혼강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이 뜻들도 참 재미있습니다. 기혼이라는 것은 넘쳐난다는 것입니다. 풍성하고 엄청난 양의 강물입니다. 그리고 구스라는 이 히브리어는 뜻이 "검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구스인면 피부색이 검은 사람을 성경에서는 구스인이라고 했습니다. 이 검은 얼굴은 곧 죄인의 본성을 가리키는말입니다. 예레미야 13장 23절에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구스인이 그 얼굴 검은 피부를 하얗게 변하게 할 수 있다면 너희 스스로도 악에서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즉 그러니까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검은 얼굴을 변하여 흰 얼굴로 되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구스인이라는 뜻의 단어는 종종 죄에 사용됩니다. 우리도 구원받기 전에는 구스인이었습니다. 우리의 죄도 다 검었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다 악했습니다. 옛날에는 검은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은혜의 강물로 인하여 우리 검은 죄인이 변하여 양털처럼, 흰눈처럼 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큰 은혜 때문에 죄인이 변하여 구원받는 의인이 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아들의 보혈을 흘려서 우리의 검은 구스를 하얗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넘치는 풍성한 강물, 기혼 강입니다. 3. 힛데겔강 세 번째 힛데겔이라는 뜻은 신속하게 흐르는 문자 그대로 하면 "화살같이 빨리 나는 힘"이라는 뜻입니다. 힘있는 능력의 강물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 힛데겔 강은 앗수르 강 동편으로 흐른다고 했습니다. 앗수르의 뜻은 "죽었다" "죽음"이라는 뜻입니다. 이 권능의 은혜가 죽음의 땅에 흘러서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부활의 권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빌립보서3장 10절에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여기서 부활의 권능이라는 말을 합니다. 힛데겔 강은 죽은 자를 소생시키고 영생하게 만드는 권능의 강물입니다. 4. 유브라데강 네 번째는 유브라데 강입니다. 유브라데라는 말은 참 좋은 말입니다. "좋다"라는 뜻이고, "비옥하다"라는 뜻이고, 그래서 풍부하고 결실, 열매가 많다라는 뜻입니다. "다산"이라는 말로도 해석이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보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젤제니" 성령 충만히 받고 성령이 계속 역사하면 그 사람의속에 이런 자비, 양선, 온유, 충성, 절제와 같은 좋은 성품들이 열매로 맺혀진다는 것입니다. 유브라데 강물이 흘러가서 많은 열매와 결실이 맺어짐을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이 네 강들은 이처럼 참 좋은 강들입니다. 비손강 - 값없이 흘러서 자라게 해서 결국은 금, 보석, 진주가 되게 합니다. 기혼강 - 엄청난 은혜의 강물이 흘러서 검은 얼굴의 죄인이 하얗게 됩니다. 힛데겔강 - 권능의 강이 흘러서 죽은 자를 소생하게 합니다. 유브라데강 - 열매 없던 자들에게 이 유브라데 강이 흘러서 많은 열매 맺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이것이 에덴동산, 하나님 계신 곳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생명수의 강물의 효능입니다. 5. 강물의 또 다른 의미 - 성령 그런데 성경에서 강하면 주로 또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 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영생하게 만드는 솟아나는 샘물입니다. 에덴에서 발원한 이 강물처럼 솟아나는 샘물을 예수님이 주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물은 어떤 물입니까? 요한복음 7장 37절부터 보면 이 물이 무엇인가가 나옵니다.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다시 말하면 예수를 믿으면 생수의 근원 되시는 예수님께서 그 사람 속에서 자꾸 성령의 은혜를 강물 흐르듯이 베풀어주십니다. 그는 에덴동산처럼 그 성령의 강물에 전체가 적셔집니다. 흘러 넘치는 네 강물이 계속 솟아 나오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죽은 자가 살아나게 되고(힛데겔강), 죄인이 의인이 되고(기혼강), 열매 없던 자가 열매가 되고(유브라데강), 흙으로 지어진 보잘것 없는 자가 금과 보석과 진주처럼 변해 가는 것(비손강)입니다. 이 강물은 흘려주시는 은혜의 성령을 말합니다. 에덴 동산은 천국의 예표입니다. 처음에 에덴 동산을 우리 인간들은 상실했으나 창세기 2장 부터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방법으로 에덴 동산 곧 천국을 이루어 가실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드시고, 여기에 성령을 불어넣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흙으로 된 우리들에게 계속해서 은혜의 강물을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영 - 정신을 우리에게 쏟아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다 쏟아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에 감화를 받아서 우리의 본성이 차츰 차츰 변화되어 집니다. 금과 은과 진주와 보석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이것을 오늘 성경이 보여주고 있습니다.(출처: http://blog.naver.com/PostList.nhn?blogId=21cocobol) 에덴은 동산보다 더 넓고 큰 개념이며, 동산은 에덴 안에 들어 있는, 에덴의 일부분이라는 의미가 된다. 즉 에덴과 동산은 동일함이 아니라 동산이 에덴 가운데 들어있는, 에덴의 부분집합이 동산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동산은 전부 에덴이지만, 에덴 전체가 동산인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에덴 동산」이란 말은 '에덴의 동산' 혹은 '에덴 가운데 있는 동산'이라는 의미가 된다. 에덴과 동산은 동일한 내용의 서로 다른 이름이 아니다. 에덴은 에덴이고, 동산은 동산이다. 다만 그 에덴 '안에' 동산이 있었다는 점이며, 따라서 동산은 온전히 에덴과 하나이지만, 에덴은 동산보다 훨씬 더 넓고 크며, 풍요로운 세계라는 점이다. 하지만 인간 세상에서 바라보는 에덴은 동산에 국한되며, 동산을 통하여서만 에덴을 느끼고 에덴으로 접근할 수 있다. 하나님이 아담을 에덴의 동산에 두시고 그것을 경작하고 지키라고 명하는 것은, 아담이 동산에서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았을 때 주어질 에덴의 부요 때문이다. 아담에게 있어 동산은 자신이 에덴으로 나아가는 길임과 동시에, 에덴에서 발원한 생명수의 강을 사방의 땅으로 내어보내는 출구였던 셈이다. 이 말의 의미는 지금 모두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강의 구조에 대하여 살펴보고 나면 에덴과 동산의 관계가 보다 분명해질 것이다. 다시한번 창세기 기록을 보자.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에덴에서 발원할 때의 강은 분명히 한줄기였다. 그러나 이 강이 동산을 적시고 난 다음에는 '넷'으로 갈라져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나뉘어 흐르게 된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우리가 배운 지리 교과서의 강은 거의 전부가 여러 곳에서 발원하여 한곳으로 모이는 형태의 강이기 때문이다. 막상 우리 주변에 있는 한강만 하더라도, 그 지류와 근원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서울 시내를 흘러가는 한강이야 한 줄기이지만, 팔당으로만 올라가도 한강은 북한강과 남한강, 두 갈래로 나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만나게 되는 강은 그 발원지는 여러 곳이지만 결국에는 하나로 모이는 형태의 강인 것이다. 그러나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흘러가는 강은 하류로 가면서 갈라져 네 가닥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강의 발원지와 상류는 하나인데 하류로 가면서 네 가닥으로 나뉘어 흐른다? 그러나 창세기는 분명히 그렇게 언급한다.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다고. 성경에는 이처럼 하류로 갈수록 모이는 형태의 강이 아니라, 하류로 갈수록 나뉘고 흩어지는 형태의 강이 가끔 등장한다. 이것은 성경의 강이 인간 세상의 강과는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즉 에덴 동산을 적시고 네 가닥의 흐름으로 나타나는 비손이나 기혼, 힛데겔이나 유브라데 같은 강들은 인간세상의 지리적인 강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성경이 말하는 강의 모습에 대하여 몇군데 찾아보고 지나가기로 하자.
"한 시내(강)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시 46:4-5)
저자는 여기서 하나의 강이 여러 흐름으로 나뉘어 흐르면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을 기쁘게 한다고 노래하고 있다. 분명히 하나의 강이니 동일한 물이고 동일한 생명이지만 어떤 필요에 의하여 몇 가닥 흐름으로 나뉘고, 그 흐름은 모두 하나님의 성에 생명을 공급하고 양식을 제공하므로 그 성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 물론 여기는 강의 발원에 대한 언급도 없고, 나뉘어 흘러가는 방향에 대한 언급도 없지만, 하나의 강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에 기쁨을 공급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러면 그 강의 발원은 어디일까.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 22:1-2)
여기는 마치 창세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생명 나무와 생명수의 강에 대한 언급이 동시에 나온다. 요한이 계시 가운데 본 생명수의 강은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발원하여 길 가운데로 흐른다. 물론 강이 흐르는 이유는 강 좌우에 늘어선 생명 나무가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일 요한이 본 이 계시가 창세기 2장의 생명 나무나 동산을 적시는 생명수의 강과 동일한 것이라면, 우리는 여기서 그 강의 발원지였던 '에덴'이란 말의 의미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생명수 강의 발원이라는 의미에서 '에덴'과 '하나님'은 같은 뜻이다. 또한 에덴이란 말의 히브리어 문자적인 의미는 기쁨이나 즐거움이며, 동사로 쓰일 경우는 스스로 즐겁게 하다는 의미를 지니는데, 이런 관점에서도 하나님과 에덴의 의미는 일치한다. 하나님은 모든 대상들에게 기쁨의 원천이면서 동시에 그 스스로도 언제나 즐거운 분이시다. 아담이 에덴의 동산을 잘 경작하게 되면 그는 동산보다 더 넓고 큰 세계인 에덴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아담은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며 동산 각종 나무에 생명을 주는 생명강의 흐름을 외면하고, 즉 에덴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흐름이 그의 기쁨이 되지 않고, 자기 갈비뼈에서 나온 '여자'가 그의 기쁨이 되고 만다. 이러므로 에덴은 아담 속에서 먼저 의미의 상실이 일어나고(즉 여자가 아담의 에덴이 되었다), 결국은 에덴의 동산으로부터도 추방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번에는 예수께서 직접 언급하셨던 생수의 강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 7:37-39)
이 말씀은 신학자들 사이에 상당히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 이들의 고민을 요약하면, 하나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솟아날 수 있느냐 하는 것과, 또 하나는 구약 성경 어디에도 그런 내용을 직접 언급하는 부분이 없는데 예수는 어찌하여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씀하시는가에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헬라어 원문의 끊어 읽기를 바꾸어서 다음과 같이 읽는 사람도 있다.
"만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오라. 나를 믿는 자는 마시라.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그리스도)에게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시들로우 백스터, Sidlow Baxter, 성경 난제 해설 Studies in Problem Texts, 생명의 말씀사, 15쪽 참조) 즉 생수의 강이 흘러나는 곳은 오직 그리스도 뿐이라는 얘기이다. 그러고 나면 그리스도에게서 생수가 흘러나리라는 구약성경의 기록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고, 따라서 본문은 쉽게 이해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견해에 찬성하지 않는다. 요한복음 7장 본문의 끊어 읽기는 아무리 양보하고 보더라도 우리 개역성경이나 영어의 킹 제임스 버전 등이 옳다. 그렇다면 문제는 예수를 믿는 신자들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과연 흘러날 수 있느냐 하는 점과 또한 그러리라고 예언한 구약 성경의 기록이 어디 있느냐 하는 점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서 생수의 강이 흘러난다는 말에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그를 믿는 우리에게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말에는 상당히 거부감을 느끼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를 우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예수가 한 일은 예수만 할 수 있고 우리는 다만 그가 하신 일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그럴듯한 논리는,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신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라(요14:12)"는 말씀을 면전에서 부인하는 행동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분명히 그가 하신 일을 할 수 있으며 나아가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만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왔다면 그를 믿는 우리의 배에서도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야 하며, 그가 십자가를 지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면 우리 역시 십자가로 대속의 죽음을 죽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어렵게 따지지 않더라도 강이란 것의 속성을 생각해 보면 이치는 간단하다. 강의 가장 대표적인 속성이 무엇인가. 그것은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흐름이다. 아무리 물이 많더라도 흐름이 없는 물은 강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강은 인위적으로 막을 수 없으며 - 이 강을 인위적으로 막으면 반드시 부작용이 생기며 머지않아 강으로서의 생명이 사라진다 - 만일 이렇게 인위적인 힘이 강의 흐름을 막으려들면 강은 힘을 비축하여 자신의 흐름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터치고서라도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생수의 강이 흘러가는 곳은 어디인가. 계시록에서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 생명수의 강이 어디로 흘러갔던가를 생각해 보면 간단하다. 그 강은 결국 우리 목마른 자들에게로 흘러 오며, 가뭄에 갈라진 대지를 적시고 나면 또 다시 아래로 흘러가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이 두 뼘 남짓한 땅뙈기를 적시는 것으로 양이 다했다면 그 다음으로 흘러갈 수 없겠지만, 어디 하나님이 그렇게 빈약하신 분이던가. 예수께서 주시는 물은 그 마시는 자로 하여금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할 뿐더러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생수의 강'은,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를 통하여 그를 믿는 자들에게까지 끊임없이 흘러가는 거대한 흐름인 것이다. 이 흐름의 영향권 아래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그 강으로부터 생명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다시 그 다음으로 생명의 강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일컬으면서, 동시에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받지' 않은 것이 흘러나온다면 그는 스스로 있는 하나님일 것이고, 받기만 하고 '흘러나오지' 않는다면 그는 썩은 물이며, 죽은 땅일 것이다. 사탄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람이면서 '받지' 않은 것을 내어보내는 존재나, 또한 사람으로서는 하나님께 받기만 할 뿐 생수의 강이'흘러날' 수는 없다고 말하는 존재, 둘 다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0장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믿음과 시인을 구원의 두 단계로 설명하는 것도 이런 차원의 얘기다. 즉 '마음으로 믿는다'는 말의 의미는 성령이 우리 속에 생수의 원천으로 거하신다는 뜻이며(나의 동의나 의지적인 신뢰가 아니다), 또한 '입으로 시인한다'는 말의 의미는 이러한 생수가 우리의 배에서 입으로 흘러넘치는 사건을 뜻한다. 이것은 아주 자연적인 흐름이지 결코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시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강이란 결코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없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이러한 사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말씀이 구약성경의 어디에 나오는지 찾아보기로 하자. 물론 예수께서 인용하신 문자 그대로는 구약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언제나 문제는 문자나 자구에 매이는 것이다. 예수께서 율법의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 문자의 일점 일획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주장이 일견 그럴 듯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성경의 문자에 붙잡혀 오도가도 못하는 사람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훨씬 높다. 뿐만 아니라 성경 말씀은 어느 것 하나 계시 아닌 것이 없으며, 이런 모든 묵시는 이사야가 말한 대로 전부 '봉한 책'의 말과 같아서 유식한 자도 무식한 자도 읽어낼 수 없다(사29:11-12)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읽을 수도 없는' 글자를 애지중지 받들어 모신다고 그 의미가 전달되겠는가. 문제는 문자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마음이다. 예수는 구약 성경을 서기관들처럼 외우고 다닌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예수는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옛사람에게 말한 바'를'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로 바꾸어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예수의 말씀이 구약 성경에 없는 내용이며, 전혀 새로운 사상이었던가. 그렇지 않다. 여호와라는 단어가 신약에서 발견되지 않는다고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 신약 시대에는 활동을 중지하셨겠는가. 말이나 글은 언제나 생각이나 내용을 담는 그릇일 뿐 더 이상의 의미는 없다. 이런 전제를 가지고 다음 말씀을 생각해 보자.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그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슥 14:7-8)
밤도 아닌, 여호와께서 아시는 그날에 솟아나는 생수의 발원지는 어디인가. 스가랴가 바라본 그 생수의 발원은 예루살렘 즉 하나님의 거룩한 성이요,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거처였다. 앞에서 본 시편 저자는 이 강이 하나님의 성, 지존자의 거처를 흘러간다고 노래한 바 있다. 그러나 스가랴에게 오면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 자체가 이제 생수가 솟아나는 원천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예루살렘은 사도 바울이 말한 바,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며 모든 자유자들의 어머니로서(갈4:26), 오늘 우리에게는 '교회'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예루살렘 즉 '교회'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것하고 '나를 믿는 자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우리가 문자의 모양에 매이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여기서 예루살렘과 교회, '나를 믿는 자'와 '우리 어머니'라는 말이 모두 동일한 개념의 서로 다른 표현임을 알 수 있다. 동일한 내용을 서로 다른 문자로 표현하는 것은 그것을 말할 때의 사회 문화적 환경 때문이기도 하고, 또는 말하는 사람이 그 중의 어떤 면을 특히 강조하거나 전체적인 흐름에서 그런 용어가 보다 적절한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 또 하나 쉽게 이해가지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어떻게 모든 신자들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예루살렘 성과 하나님의 교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서로 동일한 개념이라는 것은 이해가 간다고 하더라도 거기다 '어머니' 라는 단어를 포함시키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아니겠는가. 이런 점이 우리 인간 세상의 언어가 가지는 한계이다. 그러나 하여튼 사도 바울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과 우리의 어머니를 동일시하고 있으며, 예수께서도 자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문 밖에 세워두고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적이 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마 12:48-50)
이것은 비밀이다. 어떻게 형제와 자매에 모친이 동일 항렬로 끼어 들 수 있는가. 인간 세상의 족보 개념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에 비추어 보더라도 예수의 말씀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문제를 삼고 이해를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예수의 말씀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어찌하랴. 하지만 여기서는 이 점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예수께서도 제자와 어머니를 동일시하셨다는 점만 짚고 넘어간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스가랴가 말한 '예루살렘'에서 생수가 솟아난다는 말이나, '나를 믿는 자'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예수의 말씀이나 동일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스가랴는 그 당시의 사회 문화적인 배경이나 아니면 글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그 생수의 근원을'예루살렘'이라고 설명할 필요가 있었으며, 예수는 그 근원을 '나를 믿는 자의 배'라고 말할 이유가 있었을 뿐이다. 얘기가 좀 장황해진 감이 없지 않으나, 핵심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믿는 자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점이다. 에덴 동산의 생명 나무는 이 생명수의 강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 그 자신이 자랄 뿐 아니라, 다른 존재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는 열매를 제공하기도 한다.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셨다는 개념은 그 생명이 하나님에게서 나와 하나님의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풍요롭게 했다는 말과 통하며, 또한 동산을 적신 강이 동산에서 갈라져 사방으로 흐르는 네 강의 근원이 되었다는 말은,스가랴가 말한 대로 예루살렘에서 솟아난 강이 동해와 서해로 나뉘어 흐르는 의미와 상통한다. 결국 '생수의 강'은 에덴 즉 하나님의 기쁨으로부터 솟아나서, 동산 즉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성 예루살렘을 적시고, 몇 가닥의 흐름으로 나뉘어 아래로 흘러간다. 예수 그리스도가 수가성 우물가 여인에게 주었던 생수 역시 이러한 강의 흐름이며, 이 강에 몸을 적신 사람은 다시 생수를 솟아내는 영원한 새암이 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침례는 이 생명수 강에 자신을 잠금이다. 이것이 우리가 잃었던 에덴의 동산을 회복하는 사건이요,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첩경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생명강에 우리를 맡길 수 있는가.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는 강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동산을 적시고 사방으로 흘러가는 강의 이름들에 대하여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타락 이후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지금 그들의 주소가 에덴 동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에덴 동산을 잃어버렸으며 따라서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는 강을 직접 만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실락원의 인간들은 오직 동산을 적시고 사방으로 흘러가는 강만을 만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강을 만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창세기 기록을 다시 보자.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본문에서 또 하나 생각해야 할 점은 에덴에서 동산까지 흐르는 강에는 '이름'이 없었다는 점이다.강은 동산을 지나 그 아래 지방을 통과할 때 비로소 이름을 얻게 된다. 그 실체에는 변함이 없을지라도(즉 에덴 동산의 강과 비손이나 유브라데 등은 동일한 강이다), 나타나는 이름에는 차이가 있는 것이 인간 세상이다. 그러나 에덴의 동산을 흐르는 한줄기 강에는 이름이 없다. 다만 '생명의 흐름'이 있을 뿐이다. 즉 에덴의 동산은 '이름(名)' 의 세계가 아닌 '무명(無名)'의 세계이며, 동산을 벗어나면 '유명(有名)'의 세계가 전개된다는 점이다.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싸움의 본질은 어떤 면에서 이 '이름'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름이 다르면 본질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야말로 모든 싸움의 발단이며, 그처럼 드러난 이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한 아직도 그의 삶이 에덴의 동산을 회복하지 못하고 그 아래 동네에서 살고 있다는 반증이다. 실체를 꿰뚫어 보는 사람에게 있어 이름이란 하나의 상징이며 기호일 뿐 그 이름이 무슨 마력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예수 이름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은 예수라는 두 글자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그 실체와 그 삶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말이다.
노자 첫머리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道可道 非常道....길을 길이라 말하면 늘 그러한 길이 아니다. 名可名 非常名....이름을 이름지우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無名 天地之始....이름이 없는 것을 하늘과 땅의 처음이라 하고有名 萬物之母....이름이 있는 것을 온갖 것의 어미라 한다. (김용옥 譯)
<참고> 이 경숙 譯 도(는 그 이름을 )를 도라고 해도 좋겠지만(그 이름이) 꼭(항상) 도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어떤)이름으로 (어떤 것의)이름을 삼을 수는 있지만꼭(항상) 그 이름이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천지의 시작이니 따질 수 없고(우리가)이름을 붙이면 만물의 모태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니...
에덴의 동산을 노자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그것은 무명의 천지(無名 天地)이며, 동산을 벗어나 강이 흘러가는 세상은 유명의 만물(有名 萬物)이다. 그러나 우리가 에덴 동산의 강에서도 보듯이 유명의 세계는 무명의 세계가 어느 지점을 통과했을 때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유명은 틀린 것이라거나 무명이라야 옳은 것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나타난 세계는 감추어진 세계로 말미암은 것(히11:3)이며, 따라서 감추어진 세계를 모르고 나타난 세계에만 집착하는 것은 그 나타난 세계가 변화하고 없어질 때 따라서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에덴의 동산을 흐르던 생명수의 강이 동산을 지나고부터는 동일한 강이면서도 네 개의 서로 다른 이름으로 흘러갔다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와 생명에 접근하는 자세를 가르쳐준다. 즉 비손이라는 강도 에덴으로부터 나온 생명의 흐름이며, 기혼이나 힛데겔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생명의 흐름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에덴의 동산에 살지 않고 하윌라 땅에 사는 사람은 비손 만이 유일한 생명 강이며, 앗수르 땅에 사는 사람은 힛데겔 만이 또한 유일한 생명 강이다. 그런데 만일 하윌라 사람과 앗수르 사람이 우연히 만났다가 자기네 강 자랑을 시작했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겠는가. 십중팔구 자기네 강이 더 괜찮은 강, 아니면 유일한 강이라고 입에 침을 튀기다가 성질 급한 사람은 기어코 멱살잡이까지 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그러한 싸움을 지켜보던 사람 중에 에덴 동산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있어 그들의 싸움을 말리면서, 비손이나 힛데겔이나 모두 같은 생명 강이니 그만 싸우고 화해하라고 하였다면 그들이 무어라고 할 것인가. 모르긴 해도 아마 그들 양쪽으로부터 모두 별 미친 놈 다 보겠다는 핀잔을 들을 것이다. 그러면 이 사람은 정말 미친 사람인가. 그리고 비손이나 힛데겔, 기혼이나 유브라데 등은 정말 한 강이 아닌가. 그 강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강을 오염시키지만 않았다면 비손이나 힛데겔 모두 생명의 강이며 생명수이다. 비록 서로 다른 지역과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이름으로 전해진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모두 생명을 전하는 흐름이다. 강 이름이 다른 이유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지역에서 서로 다른 문화를 배경으로 살기 때문이요,서로 같아야 할 물맛까지 다른 이유는 그 동네 사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일시적인 편의나 유익을 위하여 그 강을 오염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지혜가 있어 이러한 외부적인 요인들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에덴의 동산으로부터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사방으로 흘러가는 생명 강의 모습을 분명히 볼 것이고, 따라서 싸우고 따져야 할 것과 감싸고 관용해야 할 것의 내용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름 때문에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하지만 싸울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비손이나 기혼, 힛데겔이나 유브라데 등을 통하여 흐르는 에덴의 생명을 흡수하려는 생각은 아니하고, 그 강가에 유원지를 만들거나, 문명의 이기랍시고 공장 따위를 건설하여 각종 쓰레기를 쏟아부어 강으로 하여금 질식하게 하는 인간들과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이런 인간들에게는 부드러운 말이 통하지 않는다. '독사의 자식'은 오히려 부드러운 말이며, '화 있을진저' 는 오히려 가벼운 매이다. 한가지만 더 언급하고 이 글을 맺기로 한다. 성경이 말하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이라는 얘기도 에덴 동산을 흐르는 이 강과 관련해서 설명할 수 있다. 사실 물과 성령은 서로 다른 두개의 실체가 아니라 서로 동일한 하나이다(요일 5:8). 그런데 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가. 이 둘이 서로 하나라면 물이나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할 일이 왜 '물과 성령'이라고 표현하는가.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이 둘이 서로 하나이면서 둘이고, 서로 다르면서 같기 때문이다. 즉 에덴에서 동산을 흐르는 강과 거기서 갈라져 네 방향으로 흐르는 강은 동일한 생명이라는 면에서는 같지만, 에덴 동산을 벗어난 강은 비손이나 기혼같은 이름을 지닌다는 점과 에덴 동산의 강은 이름 없이 다만 그 흐름만 있었다는 점이 다르다. 물과 성령이란 이런 관계이다. 즉 '물'은 성령의 상징이며 이름이다. 성령은 보이는 세계(하윌라나 앗수르 같은 인간 세상)에서는 '물'이라는 기호로 나타나지만, 감추어진 세계에서는 자신을 기호(말, 이름)로 설명하지 않는다.즉 동일한 실체가 이름이 필요한 세계에서는 물이 되고, 이름이 필요 없는 세계에서는 성령이 된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이 말을 설명하면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설명한 그'말'은 예수 그리스도 속에 있는 '성령'이 나타나고 드러나는 한 형식이라는 말이다. 예수는 자신 속에 살고 있는 하나님을 언제나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지만, 그러나 니고데모로서는 예수 속에 살고 있는 하나님을 예수처럼 알 수는 없는 법이다. 니고데모는 예수가 그의 하나님을'말'이라는 상징을 통하여 설명하여야만 비로소 그 내용에 접할 수 있다. 그래봤댔자 니고데모에게는 구두 신고 발등 긁는 정도겠지만, 그러나 예수에게는 당신의 말이 곧 성령이요 생명이었다(요 6:63). 여기 이 두 사람 즉 예수와 니고데모는 에덴 동산에서 사는 사람과 에덴 동산을 쫓겨난 사람의 대명사로 볼 수 있는 바,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의 강'을 받아 세상으로 내어보내는 생명의 통로였으며, 니고데모는 예수로부터 솟아나는 생수의 강에 그의 목을 적시는 사람이었다. 니고데모가 예수의 생수를 제대로 받아 마셨다면 그는 '물'로 거듭난 것이다. 그러나 아직'성령'으로 거듭난 것은 아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삶의 거처를 하윌라 같은 '땅'으로부터 에덴 동산으로 옮겨야 한다.니고데모가 예수의 말씀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단지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물로만 아니라, 자신이 에덴 동산에서 이름 없는 물 즉 성령으로 살아야 하고, 나아가 스스로의 입에서도 예수의 그것과 같은 동질의 물이 흘러나와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던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은 바울에게서는 바울의 언어로, 요한에게서는 요한의 상징으로, 그리고 베드로에게서는 베드로의 물로 나오는 것이다. 나타난 세계에 연연하는 눈을 가지고서는 여전히 말이나 글, 상징이나 기호에 사로잡혀 본질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할 것이다. 성령과 물, 아버지와 아들, 에덴과 동산, 그리스도와 예수, 도(道)와 명(名), 무명(無名)과 유명(有名), 천지(天地)와 만물(萬物). 이들 둘은 서로 동일한 것이다. 다만 인간 세상으로 나오면서 그 이름이 달라지는 것 뿐이다. 이처럼 분명히 서로 다른 둘이 서로 같다고 하니 이 어찌 묘하지 않을소냐. 묘하고 또 묘하다, 하나님의 세계여! [출처] 에덴 동산의 강 이야기|작성자 해품달 에덴 동산은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조덕영 박사) 에덴 동산은 분명한 실재의 장소였다. 성경은 그곳의 위치가 ‘동방’이라고 하였다(창 2: 8, 10, 15). 창세기 기자가 모세라고 볼 때, 에덴은 팔레스틴을 중심으로 동쪽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나님은 그곳에 자기가 지은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을 두셨다. 이 동방의 에덴이 지금의 어디인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에덴은 히브리어로 ‘기쁨’이라는 뜻을 가진다. 그래서 칠십인역은 종종 ‘에덴의 동산’, ‘기쁨의 동산’으로 번역한다(참조 창 2:15; 느 9:25; 시 36:8). 간혹 ‘광야’(개방된 들판)를 나타내는 아카드어 ‘에디누’(edinu)나 수메르어 에딘(edin)이 에덴의 어원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하지만 에덴은 분명 풍요로운 낙원이었다(겔 38:13, 31:9, 36:35, 욜 2:3).
성경 창세기 2장 8-14절에 보면 에덴에서는 강이 발원(發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비손 강과 기혼 강과 힛데겔 강과 유브라데 강을 이루었다고 했다. 힛데겔 강은 지금의 이라크 땅을 흐르는 티그리스 강을 말한다. 유브라데 강도 중동 땅을 흐르는 유명한 강이다. 비손강과 기혼강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지 그 위치가 분명하지 않다. 기원 1세기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비손 강을 오늘날 인도의 인더스 강으로 추정했다. 이 강은 하윌라 온 땅을 둘렀는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라는 보석도 난다고 했다. 하윌라를 아라비아 지경으로 보고 기혼 강은 이집트의 나일 강이라는 주장이 있다. 아라비아 반도에는 ‘금의 발상지’라는 뜻을 가진, 중동 최대의 금광산인 마드 에드다하브가 있다. 지금도 이곳에서는 연간 수 톤의 금이 생산되고 있다. 구스는 전통적으로 애굽과 이디오피아의 지경이었다. 오늘날 수단의 남부쯤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 모든 지명이 과거 에덴 동산이 존재하던 당시에도 여전히 지금의 바로 그 지역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에덴 동산이 있을 당시에도 힛데겔 강이나 유브라데 강이 지금과 동일한 지역을 흘렀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성경에 보면 노아의 홍수로 인하여 에덴 동산과 세상의 모든 지형은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동의 여러 국가들은 나라마다 자기네 땅이 과거 에덴 동산이 있던 곳이라는 주장들을 펴고 있다. 그런 나라들에는 이란과 이라크, 터키, 아르메니아,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에티오피아, 카타르, 바레인, 이집트 등이 있다. 이라크나 쿠웨이트 등은 오늘날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성경의 힛데겔) 강이 만나는 하류 지역을 과거 에덴 동산이 있던 곳으로 보고 있다. 고대 수메르 왕국의 수도였던 우르의 남쪽 640Km 거리에 있는 바레인 섬이 에덴 동산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아마도 중동 사람들은 주로 자기들이 살고 있는 나라나 지역, 가까운 곳에 에덴 동산이 있다고 믿고 싶은 듯하다. 하지만 심지어는 호주나 북극에 에덴이 있었다는 파격적인 주장도 있다.
성경에 보면 대홍수 당시 노아의 가족이 탄 방주는 아라랏 산으로 갔다. 이 방주는 노 젓는 배가 아니었다. 단순히 물에 뜨는 배였다. 대홍수에 견디기 용이하도록 지금의 바지선과 유사한 배였을 것이다. 노아 가족은 분명 에덴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정착하여 방주를 만들었다고 본다. 그리고 바지선 모양의 방주는 에덴 근처에서 그리 멀리 이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글쓴이의 생각으로는 지금의 아라랏산이 성경이 말하는 그 아라랏산이 분명하다면, 오늘날의 터키나 구러시아 지역(특히 아르메니아나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아 지역)이나 이란 지방 어딘가에 에덴 동산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긴다. 최근 터키 남동부(반호나 우르미아호수가 인접한 구 아르메니아 지역) 지역이 분명한 에덴 동산 지역이었다고 영국 출신 중동고고학자 데이빗 롤(David M. Rohl)이 강력하게 주장한 적이 있다. 과거 학자들의 주장보다는 상당히 성경적 근거에 가깝다고 보인다.
하지만 홍수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신 이후인 지금, 그 장소를 찾기란 그리 쉽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방주가 도착하였다는 아라랏산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도 주장이 다양하다. 터키와 아르메니아 국경 지대에 있는 지금의 아라랏산의 아그리 다(Agri Dagh)에서부터 이슬람교도들의 경전인 꾸란이 주장하는 주디산(Jabal Judi, 아라랏 주변에 있는 주디산이 아닌 아라비아의 주디산을 말함), 터키 중서부 지역(Celaenae in Phrygia), 구러시아의 바리스(Baris), 이란의 아디아벤(adiabene), 후에 주디산으로 이름이 바뀐 아라랏산에서 약 100리 떨어진 콰르드산(Mount Qardu) 지역의 고르디안 언덕(Gordyaean Hills) 등이 바로 예부터 알려진 후보 지역들이다. 이 모두가 대홍수 이후 지형이 천지개벽해버린 때문이라 여긴다. 그래도 탐험가들이나 학자들의 호기심은 끝이 없으니 언젠가 새로운 소식이 전해질지도 모른다. 그것을 기대하자. 출처: 크리스천투데이 에덴의 위치에 관한 소고(김성근) 1. 서론
에덴은 지금 이 땅위에는 없다. 앞으로 도래할 하나님의 도성 새 예루살렘은 에덴과는 다른 곳이다. 그곳에서는 옷을 벗지 않고 흰옷을 입고서 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는 지금 이 땅위에서 없어지기 전의 그 에덴의 위치를 찾아보고자 한다. 에덴의 위치에 관한 문제에 관한 결론적인 답은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에덴의 위치를 거론하는 것도 하나의 가설을 두고자 하는 것이다. 과학적이라는 것이 진화론적 전제를 두고서 가설을 검증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작업은 아니다. 그러므로, 창조를 전제로 두고서 가설을 검증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것도 과학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전제하에 에덴동산의 위치를 알아보기로 한다.
2. 에덴의 위치에 대한 기존 견해들
우선, 톰슨 II 주석성경에서 '에덴동산'에 대한 사항을 보면, 그 지리적 위치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에덴이 동쪽에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을 취하는 자들은 비손강(11절)을 인도의 인더스 강 또는 갠지스 강으로, 기혼강(13절)을 이집트의 나일강으로 본다. (2) 에덴이 남바벨론의 에리두(Eridu) 부근에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E. 그레이의 탐사를 근거로 한다. 그는 비손강, 기혼강, 힛데겔강을 북아라비아의 다와진, 시르한, 룸마의 강줄기였다고 한다. (3) 에덴이 북바벨론 지역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학설은 1881년 독일의 앗시리아 연구 학자 델리취에 의해 주장되었다. 그는 에덴을 바벨론 평야 전체를 의미한다고 본다. 그는 비손과 기혼을 바벨론에 있는 두 운하 곧 팔라코파스 운하와 샤트-엔-닐 운하로 보았다. 이처럼 에덴 동산의 위치에 대한 지리적 재구성은 여러 갈래로 시도되었으나 만족할 만한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성경 지명이 단일 지역만을 의미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 지구상의 지형 변화가 계속되었다는 난점 때문이다.
위의 내용 중 첫번째 주장은 요세푸스의 주장이다. 요세푸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모세는 연이어 말한다. 하나님이 동방에 온갖 종류의 나무들이 무성한 낙원을 창설하셨다. 그 가운데는 생명나무와 그것으로 선과 악을 알 수 있는 지식의 나무도 있었다.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이 동산 안으로 이끌어들이시고 나무들을 돌보라고 명령하셨다. 동산을 적시는 강이 하나 있었는데 온 땅 곳곳을 흐르는 이 강은 네 지류로 갈라졌다. 군중이라는 뜻의 피손(Phison) 강은 인도로 흘러 들어가 바다로 흘러가는데 헬라인들은 갠지즈(Ganges) 강이라고 부른다. 티그리스 강 뿐 아니라 유프라테스 강은 홍해(the Red Sea)로 흘러 들어간다. 유프라테스 혹은 프리트란 이름은 분산 혹은 꽃이라는 뜻이고 티그리스 혹은 디글라트란 이름은 좁고 빠른 것이란 뜻이며 이집트를 관통하는 게온 강은 동방에서 발원한 것이라는 뜻으로 헬라인들은 나일 강이라고 부른다.'
성경 창세기 2장에서 나타나는 강의 이름은 비손(2:11), 기혼(2:13), 힛데겔(2:14) 그리고 유브라데(2:14)이다. 원어에서는 각각 삐쉬온, ?흐온, 쑁펨데웉, 페?라트로 나온다. 비손은 '분산하는', 기혼은 '강줄기'라는 뜻이며, 힛데겔은 '소리'라는 뜻으로 다니엘 10:4에서도 나타나는 지명이며 원어사전에서 보면 티그리스라고 보며, '페라트'의 경우 원어사전을 찾아보면 유브라데을 지칭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최근의 고고학적 일부 견해는 에덴동산의 위치를 바레인 섬으로 보기도 한다. 바레인 섬에는 아직 발굴이 안된 분묘들이 많이 있으며, 뱀숭배 흔적들이 발견되는 것이 그 이유로 제시되고 있다.
3. 에덴 위치에 대한 새로운 가설
이러한 에덴 위치에 대한 여러 견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고에서는 또 하나의 가설을 적어보고자 한다. 이 견해는 판구조론(Plate Techtonics)을 원용(援用)하는 것이다. 하나의 대륙으로 되어져 있던 대륙은 진화론상의 연대기인 중생대(약 230만년전)에 갈라지기 시작하여 남쪽의 곤드와날랜드(Gondwanaland)와 북쪽의 라우라시아(Laurasia)로 나뉘어지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제 진화론적 견해를 주장하고 있는 인터넷 웹사이트에서 판구조론을 설명하고 있는 다음의 그림을 참조하면서 이 견해를 전개하기로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음의 그림에 있어서의 아프리카 대륙의 동북부와 아라비아 반도의 대륙판이 붙어있던 부근에 에덴동산이 있었고, 그것이 홍수라는 판구조의 변화 내지 격판구조의 변화를 겪음으로써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 그림에서 주목할 부분은 지금의 예멘과 이디오피아 부근이다. 예멘과 이디오피아 부근은 성경의 지명에 의하면 구스 땅이라고 나타난다. 특히 이디오피아가 그러하다. 예멘은 가끔 스바라는 지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성경 창세기 2장 13절에서 보면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렀고'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다음의 <그림 2>를 보기로 한다. 여기서는 홍수의 격판구조 변화이전의 구스지역을 확대한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기혼강의 위치는 바로 균열되기 전의 홍해이다. 즉, 기혼강은 홍해-아카바 만-사해-요단강-갈릴리호-헬몬산 화산분화이전의 그 북부까지의 지류로 형성된 강으로 보는 것이다. '둘렀고'라는 표현은 '핫소베브'라고 하여 '두루 흐른다'는 의미이다. 이 경우, 최소한 세 강의 발원을 추측해낼 수 있다. 즉, 기혼, 힛데겔(그림2의 a), 유브라데(그림2의 b) 세 강이 발원하였을 곳을 추정하는 것이다. 그곳은 메소포타미아의 한 지역이 된다(왕하 19:12, 사 37:12, 겔 27:23). 이제 비손강의 위치만 알아내면 되는데, 소아시아 반도의 판구조 쪽으로 흘렀던 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만약 <그림 1>에서 보이는 라우라시아 대륙판이 좀 더 아프리카 북부나 아라비아 판 북동부에 근접하여 있었다면 라우라시아 판 쪽으로 흘렀을 가능성도 있다. 라우라시아 대륙판은 홍수 때에 격판구조 변화가 일어난 이후 또다시 벨렉(창세기 10:25) 때에 온 지면으로 바벨탑 건설에 대한 심판으로 흩어지면서(창 11:8-9) 변화가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 프란시스 쉐퍼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재변의 존재를 반대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문제가 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사건들의 질서에 맞지 않는 사건은 어떤 것이든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과학은 약 B.C. 10,000년경에 발생한 기이한 사건을 가지고 씨름하고 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동사(凍死)한 맘모스와 기타 동물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과거 12,000년간 이 지역은 일률적으로 추운 지역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발견된 큰 맘모스와 기타 동물들을 연구해 본 결과 이 동물들이 죽을 때는 날씨가 따뜻했다는 것이다. 동물들은 갑작스럽게 죽었기 때문에 온대 기후에서 자라났던 식물들을 토하지도 못하고 넘기지도 못한 채 입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과학의 문제로서 성경 사건과는 무관하다. 나는 이것을 홍수에 관련시키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나는 이 사건이 홍수 후에 생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대재변 관념은 미련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거대한 짐승들이 갑자기 얼어 죽어 그것들을 발견했을 때 먹어도 좋은 정도의 고기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동사에 대해 익숙히 알고 있는 과학자들은 이 거대한 동물들의 떼죽음을 근거로 기온이 수시간 내에 갑자기 화씨 -150°(섭씨 -101°)로 떨어졌을 것이라고 계산해 내고 있다.'
이들 맘모스의 갑작스러운 대규모 동사(凍死)에 대한 기록은 최근의 월간 과학동아 99년 6월호, 시공사에서 나온 '코끼리 - 세계의 기둥' (로베르 플로르 저, 이한헌 역, 1997), 그리고 D-couvertes Gallimard Sciences 사에서 나온 'Les fossiles empreinte des mondes disparus' (Yvette Gayrard-Valy, 1987) 등에서 보면 그 언급이 나오며, 영화로는 '에덴의 동쪽'의 대사 내용에서도 이 이야기는 언급된다. 맘모스 5만구의 냉동화석에 대한 견해들을 종합해보면 라우라시아 대륙 판구조가 홍수 이후에 또다시 급작히 움직였다는 것을 생각게 해준다. 이로써 라우라시아 판구조에 있었을 만한 비손강의 위치를 찾아보면, 그 강은 금과 베델리엄과 호마노 등 보석이 나오는 곳으로 되어 있는 바, 그리이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투스가 스키타이 인들이 부자라고 했다는 견해를 덧붙여 이해해보자면 스키타이 문명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스키타이 인들은 금으로 빗을 만들 정도로 풍부한 금 자원을 지니고 살았음을 알 수 있는데, 이로써 비손 강은 스키타이 터전의 홍수 이전 해당지역에 흐르던 강이 아니었을까 하고 그 위치를 찾아볼 수도 있다.
비손강이 그 강이 소아시아로 흘렀든 라우라시아로 흘렀든 어쨌든 그 발원은 에덴동산이므로 이로써 에덴의 위치를 추정해본다면 지금의 이라크 북부 산지에 해당하는 노아홍수 전의 장소였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림 1>에서 그것을 확인해보면 결코 에덴의 위치가 동북부에 섬으로 나타난 한국이나 일본이 아니요, 인도도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부분이 메소포타미아의 한 지역이었다는 앞에서 결론지은 바대로의 견해로 그냥 두게 되면 자칫 오경편집설과 관련되어지게 된다. 더더구나, 에덴의 위치에 대하여 두로라고 보고 있는 견해(에스겔 28:11-19)를 보게 되면 JEDP 문서설에 의해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놀라운 발견이 있게 되는데, 그것은 <그림 1>을 참조할 때에 그러하다. <그림 1>을 보면, 모든 땅은 하나로 뭉쳐져 있고, 앞의 논의에서 잠정적으로 결론지은 메소포타미아의 에덴 위치 부근은 곤드와날 대륙과 라우라시아 대륙의 뭉쳐진 전 대륙의 동편에 위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동편에 에덴을 창설하시고' 라는 성경 창세기 2:8의 기록을 입증해준다. 왜 그런가. 그것은 성경 창세기 2:8에서 에덴의 위치는 그 기준점이 따로 없이 기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JEDP 문서설로 하게 되면, 창세기 2장은 J문서이다. 야웨문서기자는 이스라엘 왕정시대에 살았던 자들로 전제하게 된다. 이들의 세계에서 볼 때, 이들은 가나안 지역에 거주했으므로 메소포타미아의 에덴(왕하 19:12, 사 37:12, 겔 27:23 등) 위치는 북쪽이 된다. 그런데, 문서설에서 야웨문서기자의 작품이라고 보게 되는 성경 창세기 2장에서 에덴은 그 위치가 동쪽으로 기록되어져 있다. 이 기록에 대하여 각 성경 역본들은 다음과 같은 차이를 지니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한글개역)
'And the LORD God planted a garden in Eden, in the east;...' (NRSV)
'Now the LORD God had planted a garden in the east, in Eden;...' (NIV)
'And the LORD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KJV)
위에 나열된 역본들에서 보듯이 차이가 좀 있다. 한글개역 성경은 '드러난 뭍'(창 1:9)의 동방의에덴에 동산이 창설된 것으로 되어 있다. NRSV에서는 '에덴 곧 동방에', NIV는 '동편 곧 에덴에', 그리고 KJV는 '에덴에서의 동편에' 동산이 창설되었다고 되어 있어서 뉘앙스에 차이가 있다. NRSV와 NIV 에 있어서 '드러난 뭍'의 동편은 에덴이다. KJV에서는 '드러난 뭍'이 곧 에덴일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기준점이 없다는 것이며, 그 기준점을 오경문서설에 입각하여 찾다보면 야웨기자건 엘로힘기자건 그 기준점을 가나안에서 찾게 되므로 그 자체로서 북쪽에 해당하는 메소포타미아 에덴을 언급하고 있는 기록들과 모순이 된다.
4. 결론
이상에서 에덴동산의 위치에 관한 견해들을 소개하고 새로운 각도로 그 위치를 생각해보는 시도를 해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전제로 두고서 견해를 전개하는 '과학'이기 때문에 다각도의 검증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이 소고에서 전개한 새로운 각도의 시도를 가설이라고 하였다. 18세기에 들어와서 진화론적 견해들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찰스 다아윈이 '종의 기원'으로 진화론을 거론하기 전까지에 있어서 모든 과학들은 창조의 전제 하에 일반 계시로서 나타내주신 하나님의 뜻을 자연에서 찾기 위하여 전개되어져 왔다. 그런데, 이제 20세기말에 창조과학의 여러 각도에서의 접근이 있어온 관계로 이렇게 에덴의 위치에 대한 가설을 제기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발제에 대하여 많은 논평과 비판과 연구가 있게 되었으면 한다. 파스퇴르가 밀봉한 유리관에서는 아직도 이렇다할 변화가 없으니까. 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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