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사어
창공: 창공(蒼空, firmament)이란 하늘을 달리 부르는 말이다. 창천(蒼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종교적, 신화적 맥락에서는 하나의 단일한 돔으로서의 하늘을 일컬으며 한국어 성경에서는 "궁창"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출처: 위키백과)
‘궁창’은 영어KJV에서 ‘firmament’라는 독특한 단어로 성경에 쓰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궁창’ 그러면 사전적인 기본의미인 ‘푸른 하늘’로 대개 이해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시는 ‘궁창’은 푸른 하늘을 훨씬 더 초월하는 개념으로 쓰입니다.
먼저 궁창을 이해하려면, 성경에서 말하는 ‘세 하늘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 하늘’은 우리 눈에 보이는 지표면~대기권까지의 하늘을 통상 말합니다.
‘둘째 하늘’은 대기권~셋째 하늘의 경계인 궁창 위의 물들까지의 하늘을 말합니다. 이것을 세상사람들은 ‘우주’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궁창 위의 물들을 하나님의 왕좌 앞에 펼쳐져서 둘째 하늘과 셋째 하늘인 천국을 나누는 경계로서 성경에서는 “깊음”(창 1:2) 또는 “수정 같은 유리 바다”(계 4:6)라고 불립니다.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시니라.”(창 1:2)
“그 왕좌 앞에 수정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왕좌 한가운데와 왕좌 둘레에는 앞뒤에 눈이 가득한 네 짐승이 있더라.”(계 4:6)
더구나 이 유리 바다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때에 없어질 그 “바다”(Sea)입니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으니 이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졌고 바다도 다시는 있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더라.”(계 21:1)
‘셋째 하늘’은 우리가 소망하는 하나님께서 계시는 하늘나라를 말합니다.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알았는데 그 사람은 십사여 년 전에 셋째 하늘로 채여 올라갔느니라. (몸 안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며 몸 밖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낙원으로 채여 올라가서 말할 수 없는 말들을 들었는데 사람이 그것들을 말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느니라.”(고후 12:2,4)
이렇게 성경은 세 하늘들이 있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다시 결론을 말씀드리면, 성경에서의 ‘궁창’은 바로 ‘첫째 하늘+둘째 하늘’을 포괄하는 하늘로서의 개념입니다.
“6 ¶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물들의 한가운데 궁창이 있고 또 그것은 물들에서 물들을 나누라, 하시고
7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사 궁창 위의 물들에서 궁창 아래의 물들을 나누시니 그대로 되니라.
8 [하나님]께서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둘째 날이더라.”(창 1:6~8)
즉 '궁창 위의 물들'은 '수정 같은 (유리) 바다'='깊음'을 말하고, '궁창 아래의 물들'은 이 땅의 지표면 위에 있는 물들로서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다'를 의미합니다.
더구나 성경은 이 궁창이 둘째 하늘인 '우주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명백한 이유를 말씀합니다.
“14 ¶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체들이 있어서 밤에서 낮을 나누고 또 그것들은 표적들과 계절들과 날들과 해(年)들을 나타내라.
15 또 그것들은 하늘의 궁창에서 빛이 되어 땅 위에 빛을 주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 [하나님]께서 커다란 두 광체를 만드사 큰 광체는 낮을 다스리게 하시고 작은 광체는 밤을 다스리게 하시며 또 별들도 만드시고”(창 1:14~16)
분명히 성경은 하늘의 궁창에 광체들 즉 태양과 달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별들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소위 창조과학자들이 창조과학을 설명하면서 종종 말하는 '궁창 위의 물들'을 대기권 위의 '수증기층'이라 말하곤 하는데 이는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오 디모데야, 속되고 헛된 말장난과 또 거짓으로 과학이라 불리는 것의 반론들을 피하며 네게 맡긴 것들을 지키라.”(딤전 6:20)
물론 창조과학자들의 공이 기독교계에 기여한 것이 큰 것도 사실이고 그분들의 순수한 의도와 동기도 좋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너무 "과학이라 불리는 것"으로 영적인 책인 성경을 푼다는 것이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너무 창조과학을 100% 맹신하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출처:http://cafe.daum.net/ilovekjv)
첫째로, 궁창의 의미는 죄를 씻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생겼음을 의미합니다.(6절)
창세기 1장 6절“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먼저 궁창이라는 것은 위와 아래 물 사이에 있는 공기층을 의미합니다. 이는 히브리어로 ‘라키아’라고 하는데 이는 ‘금속판을 해머로 내려쳐서 판을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즉 금속을 넓게 펴서 그릇을 만들 때 ‘라키아’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물과 물 사이에 넓게 펴서 공기층을 만든 이유는 하늘의 물을 담아놓기 위해서 하늘에 그릇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백성이 물을 통해 깨끗게 되는 과정을 위해 하늘에 물이 담기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위의 물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노아의 시대 때 홍수로 쏟아져 내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가 있는 가운데 그냥 나오면 하나님께서 반응하시는데 이를 “진노”라고 합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아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것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는 조치가 바로 진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반드시 정결케 되는 과정을 가져야 합니다. 정결하지 않으면 죽게 되므로 하늘에 물을 담아다가 정결한 이후에 하나님을 만나야 함을 상징적인 그림처럼 보여 주신 것입니다.
구약에 성막에 보면 그 앞에 물두멍이라는 그릇이 있는데, 이는 금속을 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물로 씻음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게 한 것입니다. 또한 나중에 성막이 정착하여 이스라엘의 성전으로 만들어졌을 때는 작은 물두멍 정도가 아니라 “바다”라는 큰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열왕기상 7장 25절“그 바다를 소 열두 마리가 받쳤으니 셋은 북쪽을 향하였고 셋은 서쪽을 향하였고 셋은 남쪽을 향하였고 셋은 동쪽을 향하였으며 바다를 그 위에 놓았고 소의 뒤는 다 안으로 두었으며” 이 바다는 아주 큰 그릇이어서 12마리의 소를 조각하여 받치게 했는데, 하나님께서 이 바다를 만들 때 ‘놋을 펴서 만들어라’고 하셨고,라키아 - 궁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하면서 더러운 것을 씻고, 성전에 들어가 제사해야 함을 알려주셨습니다. 에스겔 36장 25절“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우리가 물을 통하여 정결하게 되면 우리가 섬겼던 모든 더러운 것과 우상숭배에서 정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우리가 더러운 곳에서 우상 숭배하는 삶에서 온전히 정결해지기 위해 이 땅에 보내신 분이 누구신가요?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통하여 일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첫 번째 일으킨 기적의 사건은 무엇인가요? 바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신 일입니다. 왜 예수님은 많은 기적 중에 첫 번째 기적으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먼저 일으켰을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떻게 회복시키시는 알려 주시고자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 6절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즉 유대인들은 물이 귀함에도 물로 정결함을 받고자 생활 속에 여섯 개나 되는 돌항아리를 두고 식사를 하기 전 음식물을 씻고, 입을 씻고, 손을 씻어 정결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통이 다 비었다고 합니다. 즉 이 땅의 물로는 계속 항아리에 물을 넣어야 씻을 수 있고, 그 씻는 것도 한계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사건을 통해 7개의 정결 항아리가 채워지는 것을 상징하며, 예수님께서 물로도 안 되는 정결을 보혈로 채우심을 보여 준 기적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사에서 ‘성찬식’을 제정하신 것입니다.
포도주를 건네며 이 포도주가 바로 자신의 피임을 말씀하셨고, 이를 지켜 행하라고 해서 우리가 성찬을 진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피로서 깨끗하게 됩니다. 이 땅에서는 연약하여, 죄를 짓기도 하지만 나중에 완전하게 모든 죄가 사라지고 놀라운 은혜와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씻김을 받아 나아가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큰 복입니다. 우리가 이런 소식을 전하는 것을 복이 있는 소식이라 하여‘복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믿음으로 삶 속에 감격하십니까? 하늘의 구름을 바라볼 때마다 예수님의 피로서 내가 정결케 되고, 구원받았음을 깨달으시고, 확신하심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복음에 감격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궁창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생명의 공간을 허락하신 것을 의미합니다.(7절)
창세기 1장 7절“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데 물은 없어서는 안 되지만, 넘치면 홍수가 되어 큰 재앙으로 변하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물 없이도 2~3일은 버티나 공기 없이는 몇 분도 버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위아래 물을 나누셔서 사람이 살 수 있도록 공기층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가 분명히 나타난 곳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 앞에 서는 과정입니다. 아시겠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군대에 쫓겨 물속으로 들어가야 했고, 물에 들어가면 죽음을 맞는 게 뻔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밤새 바람을 불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 가운데 걸어가는 공간을 만드시고 그 사이로 들어감으로 생명을 얻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의 궁창을 설명해 놓은 것이고, 이렇게 홍해를 걸어간 사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0장 2절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세례란 물에 들어가 죽는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게 됨을 예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모세에게 속하여’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모세가 예수님을 예표함으로 예수님께 속하면 생명을 얻고 구원받을 것을 그림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즉 세례는 나의 육이 죽고 영이 살아남을 기억하는 예식입니다.
세례요한이 세례를 주었을 때 이를 회개의 세례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3장 3절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이 세례는 당시 명백히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자들인 창기, 세리, 군인들이 주로 받았습니다. 그것은 세례를 받으면 회개를 했다는 증명이 되고, 구원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들은 구원에 이르게 되었지만,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세례를 받지 않았고, 구원에 이르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죄인들이 받는 세례를 예수님께서 받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3장 16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여기서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는 침례로서 물에 완전히 들어가시는 것인데, 이는 죽음을 의미하며, 물에 올라오실 때 성령이 임하신 것은 장차 십자가 구속으로 인하여 성령이 임하실 것을 예표한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과 연합되어 물에서 죽고, 주님과 함께 살아나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물로 가득 차있는 세상에 궁창을 만드사 생명을 살리는 그림입니다.
바라건대, 모든 성도님이 앞으로 공기로 숨을 쉴 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죽지 않고 새 생명으로 살아나 성령님과 함께함을 궁창을 통해 삶 속에 깨달으시고, 성령 충만으로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궁창의 의미는 죄악된 자들이 하늘의 심판을 당할 것을 보여줍니다.(8절)
우리가 광야 같은 사막에 있으면 물은 생명을 살리는 물이며, 그러한 물과 함께 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한편 바다의 많은 물은 엄청난 공포의 대상이어서 늘 바다에서 일하는 선원들은 공포심으로 거의 미신을 믿게 됩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파도조차 해결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땅은 어느 정도 예측하여, 비가 부족하면 저수지를 만들고 땅이 나쁘면 비료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만큼 물은 공포의 대상이며, 하나님께서는 죄지은 인간을 물로 심판하셨습니다. 창세기 7장 10~12절“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노아가 육백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달 열이렛날이라 그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하나님은 하늘의 창문들이 열리게 했다고 합니다. 하늘의 창문은 언제 만들어졌을까요? 창세기 1장 8절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나님은 궁창을 하늘이라 하면서 이때 물을 하늘에 담아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물로 사람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사실 노아의 홍수 전에는 인간의 수명이 길어 평균 700~800살까지 오래 살았습니다. 그것은 궁창 때문에 지구가 수증기로 덮여 있어서 마치 따뜻한 온실 안에서 태양의 나쁜 자외선 등이 통과하지 않고, 좋은 환경이 되었기에 그 안에서 장수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궁창의 일부가 뚫려 하늘의 물이 쏟아져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의 가족들은 살 수 있었습니다. 고페르 나무로 만든 방주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6장 14절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혹시‘고페르 나무’라고 들어보시고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아십니까? 그 나무는 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단어로 이전에 개혁판 성경에서는 잣나무라고 했으나 잘못 번역한 것이며, 이는 지금 시대에는 없는 나무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은 고페르 나무로 방주를 만들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본 절에 나오는 단어들과 비슷한 발음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역청이라는 히브리어는‘코페르’이며, 역청을 바르다는‘카파르’입니다. 이렇게 비슷한 발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늘의 심판으로부터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특히 여기 역청을 바르다의 카파르라는 동사는 죄가 있으면 덮어 버리다, 속죄하다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교회에서 성도끼리 서로를 거룩한 무리라고 부르는 이유는 비록 죄를 짓지만 예수의 피가 덮여 우리가 의롭게 여김을 받는 뜻입니다.(출처:http://cafe.daum.net/misosarangstory)
사40:22의 <궁창>을 KJV은 the circle of the earth라고 번역을 하였는데,
circle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쿠크(khug)>를 번역한 것으로,
정확한 의미는 <구상(球狀)> 또는 <원형(圓形)>이라는 뜻입니다.
잠8:27에 보면,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을 두르실 때에..."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의 궁창도 같은 <쿠크(khug)>로서 KJV은 이를 <compass>로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바다를 창조하실 때
해수<면>을 <원형>으로 만드셨다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지구 평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다는 평평하게 창조되었다 주장하지만,
하나님은 해수면을 둥글게 창조하셨다라고 기록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쿠크(khug)>가 면이 볼록한 원형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을 볼 때,
하늘의 궁창도 면이 볼록한 원형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ircle이라는 영어 단어의 일반적인 개념인 <원>을 제한적으로 사용하여
<원반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틀린 적용입니다.
왜냐하면 circle의 개념을 차원에 따라 적용하면 다음과 같은 변화가 수반되기 때문입니다.
1차원 평면 : 점(dot)
2차원 평면 : 원, 동그라미
3차원 입체 : 구, 볼, 원형, 원반
그러면 하나님이 3차원 세계를 창조하실 때,
지구를 구(球)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출처:http://cafe.daum.net/aspire7)
창세기 1장 6절에서 언급되는 궁창을 7절에서는 하늘이라 이름하시며 이 궁창을 사이에 두고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나누신다. 둘째 날의 구심점은 물에 관한 분별함이다.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의 나뉨, 곧 구별이요 분별이다. 궁창 아래의 물은 바다라 칭하시고 윗 물은 하늘이라고 말이다. 바다는 물이라 해도 당연히 이해가 되지만 하늘을 물이라고 하니 이 무슨 뜻인가. 물은 생명을 산출해내는 질료이다. 바다는 세상의 생명을 산출해내고 하늘은 하늘의 생명을 창조한다. 물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생각, 사상, 흐름을 상징한다. 사상이 생명을 산출해낸다는 말이다. 그런데 세상의 생명은 유한체인 반면 하늘의 생명은 영원이다. 이것은 수명의 짧고 무한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패하고 썩어 소멸되고 말 세상인가 아니면 영원 블변과 결코 썩지 않는 하늘인가 하는 존재상태의 다름인 것이다.
궁창의 현상적 의미는 금속을 두드릴수록 넓게 펴지는 것과 같이 널리퍼지는 데 있으며 이를 비유로 궁창의 사역은 떨림, 즉 울림이 있다. 이 울림은 굽은 것을 곧게 펴게도 하며 그 진동은 다함이 없는데 특징이 있다.
그런데 이 궁창은 떨림으로 말미암아 구별이 있기 시작한다.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 안에서 이 궁창은 존재가 가지고 있는 물, 곧 세상의 물인 바다라는 물을 파동시킨다. 이러한 파동을 감지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의 마음이다. 이 인간의 마음이 궁창 위의 물, 곧 하늘의 물로 인해 떨림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구원의 사역은 시작된다고 할 것이다. 역으로는 궁창위의 물에 대한 반응이 생기지 않는다면 이는 그 마음이 굳어져 있는 상태인 것이어서 그 마음의 경직됨, 곧 굳어진 그 마음이 하늘의 물을 흡수할 수 있도록 경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길로 언급되는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며 물은 바로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을 상징하는 것이다. 세상의 말은 그저 로 하나님의 말은 말씀으로 격을 달리 취급하고 있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말은 그저 말일 뿐이다. 다만 그 말에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에 따라 세상의 말인지 하늘의 말인지가 구별되는 것이다.
궁창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키아’의 명사형은 ‘울림’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울림은 어그러져 평탄치 못한 것을 평탄하게 만들며 그 평평한 면을 끊임없이 확장하고자 하는 지향성을 갖고 있다. 금의 연성, 곧 확장성이 1그램 당 약 3킬로미터, 은은 1그램당 약 2킬로미터 정도로 그 확장성이 대단하다면 궁창, 라키아의 연성은 한계가 없다.
이 궁창의 울림이 물로부터 물을 구별하게 하는 주체인 것이다. 다만 존재의 간구가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 그만큼 준비가 되었음, 곧 존재 자신의 하나님을 지향하는 마음이 굴곡져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궁창의 울림을 있게 할 그 어떤 능력도 없음을 알기에 오직 기도할 뿐인 것이다. 이때의 기도가 일반적으로 행하고 있는 형태의 기도가 아니다. 오직 자신의 모든 것을 투신하여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도인 것이다.
라키아의 주체는 하늘이지만 그 울림을 수용해야 할 대상은 바로 인간이다. 울림은 있는데 대상인 인간은 자기 의도대로 울림을 변개할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이 바로 인간의 마음이다. 인간의 소욕대로만 움직임을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마음이 더욱 더 깊은 종교심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변개시킨 울림으로선 존재의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릇된 것의 고착화만 강화되게 된다는 말이다. 전혀 앞, 즉 하나님의 나라를 볼 눈이 감겨 있는 것이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야 비로소 눈이 떠져 더 이상 자신이 변개시킨 것이 아닌 본래의 라키아의 울림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창 1:8절의 말씀도 그러하다.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이 구별, 곧 분별되어야 함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말이다. 도무지 세상과는 섞일 수 없는, 그러나 세상을 품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시발점이며 현재진행형의 미완료 상태이다. 존재에게는 말이다.
단어해설
라키아(h 7549)는 '탕탕 치다, 두ㄷ리다, 넓게 만들다. 판판하게 펴다'를 뜻하는 동사 라카(h 7554)에서 유래. ‘넓게 펴진 것, 하늘의 반원형’등을 뜻함(출처: http://blog.daum.net/innovator-bay/12980379)
(창1:6‐8)
6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물 한가운데 창공(궁창)이 생겨, 물과 물 사이가 갈라져라" 하셨다.
7 하나님이 이처럼 창공(궁창)을 만드시고서, 물을 창공 아래에 있는 물과 창공 위에 있는 물로 나누시니, 그대로 되었다.
8 하나님이 창공(궁창)을 하늘이라고 하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튿날이 지났다.
오늘은 창세기의 둘째 날, 궁창의 창조와 궁창 위의 물, 궁창 아래의 물에 대해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궁창에 대해 공부를 하지요.
아주 쉽게 접근을 해서 설명을 해 드릴 테니까 잘 들어주세요. 8절을 보시면 궁창은 ‘하늘’입니다. 그러니까 궁창은 ‘솨마임‘’하늘 들‘ 중에 1층 천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대기권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서부터를 하늘이라고 할까요? 지상 몇 미터 위부터가 하늘입니까? 공기를 담고 있는, 땅과 바다 바로 위부터 우리 눈에 보이는 저 파란 하늘까지를 ’궁창’ ‘하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델리취 성경학자는 궁창을 ’대기권으로써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의 확장‘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궁창을 ’만드셨다‘라고 굳이 표현을 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이 ’궁창’을 지으심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늘과 땅을 분리시키셨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 ‘분리’와 ‘구별’은 종말론 적 관점으로 보면 참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가 언급을 하도록 하고 먼저 그 궁창의 창조를 실존적이며 현상론적인 관점에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생물을 만드시기 전에 그 생물들이 호흡하며 살 수 있는 공기의 비율과 그 비율을 잘 유지할 수 있는 자연의 법칙을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생물을 창조하시기 전에 생물들이 존재할 수 있는 틀을 정성스럽게 만들고 계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공기를 사서 마셔야 한다면 그 값이 얼마나 될까요? 예를 들어 사람이 호흡을 하는데 필요한 하루치 공기가 10,000불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 공기를 사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호흡은 하루 이틀 걸러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소중한 공기를 거저 허락하셨습니다. 궁창이 지어질 때 이 지구의 대기가 형성이 된 것입니다.
대기권의 공기는 산소 20% 질소 80%의 비율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비율이 깨지면 생물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일 질소의 비율이 높아지고 산소의 비율이 낮아지게 되면 생명체가 파괴되고 인간의 삶에 소중한 불을 지필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산소의 비율이 높아지고 질소의 비율이 낮아지게 되면 삽시간에 지구는 불바다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그의 서신 서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마지막 날에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는 일은 하나님께서 이 대기권의 산소의 비율만 조금 높여 버리시면 바로 모든 것들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산소와 질소의 비율이 안정되게 유지되는지 아십니까? 동물들이 호흡을 하면서 매일 매일 산소를 마시고 탄산가스를 배출하고 있는데도 어떻게 그 산소의 비율이 20%로 정확하게 유지가 될까요?
동물들이 호흡을 할 때 식물은 광합성을 하지요. 동물들이 끊임없이 산소를 소모할 때 식물들이 광합성을 통해 끊임없이 산소를 방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비율이 20 대 80으로 정확하게 유지가 됩니다. 바로 그러한 만물이 존재하고 유지될 수 있는 공기와 공기에 관한 자연의 법칙이 둘째 날 궁창 속에 만들어 진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받는 공기의 압력이 14톤에서 16톤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을 공기가 14톤의 압력으로 누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찌그러지지 않고 멀쩡하게 살아있습니까? 이 14톤의 압력이 수직으로만 누르는 것이 아니라 상하 좌우에서 골고루 누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상하좌우의 공기 압력의 평형이 조금만 깨져도 이 지구 위의 만물은 일순간에 찌그러져서 몰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연의 법칙을 조금만 흔들어 버리셔도 우리는 존재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그 하나님 앞에 두 손 들고 항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저는 이 창세기를 공부하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이라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우리는 호흡을 할 때마다 저 푸르른 하늘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은혜로우심에 감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쉽게 그 분을 잊고 삽니다. 그러니까 감사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인간들을 보시며 얼마나 가슴이 아프실까요?
(사1:2‐3) 2 하늘아, 들어라! 땅아, 귀를 기울여라! 주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자식이라고 기르고 키웠는데,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다.
3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저를 어떻게 먹여 키우는지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
우리는 이 우주 만물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관(觀)하고 청(聽)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궁창이라는 단어 ‘라키아’는 원래 ‘두들겨서 넓게 펼친 판’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이 ‘하늘‘을 그렇게 표현을 하는 이유는 구속사적인 중요한 의미가 그 ’궁창‘속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욥26:7) 7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
여기에서 ‘펴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나타’는 ‘연장을 사용하여 펴거나 구부리다’라는 뜻입니다. 하늘을 표현하는데 이렇게 ‘라키아’나 ‘나타’라는 단어가 동원되는 이유는 그 궁창과 어떤 것이 연관이 되어 있음을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뭘까요? 여러분 ‘연장을 사용하여 펴거나 구부려 만든 것‘ 하면 성경에서 어떤 것이 먼저 떠오르십니까? 성막의 물두멍이 떠오르시지요?
(출30:18) 18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 그것을 회막과 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
놋을 펴서 물두멍을 만들고 그 물 두멍 위에 물을 담아 제사장들의 몸을 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궁창‘을 펴시고 그 위에 궁창 위의 물을 두신 창세기의 둘째 날이 성막의 물두멍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이 창세기의 창조가 그 성막의 구조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요한복음과 요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머릿속에 성 막의 구조를 한 번 떠올려보세요. 성 막의 입구를 들어서면 바로 등장하는 것이 번제 단이지요? 번제 단은 죄인들의 속죄를 위해 무죄한 어린양이 도살을 당하는 곳입니다. 바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이 번제 단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번제 단에서 창세기의 첫째 날 ’빛‘의 창조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번제 단을 지나면 바로 나오는 것이 물두멍입니다. 그 물 두멍은 궁창 위에 물을 담고 있는 창세기의 둘째 날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두멍을 지나면 성소가 나오지요?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건빵 두 개 두께의 휘장이 있습니다. 그 휘장이 바로 두 번째 하늘 ‘이층 천’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때로는 하나님께서 하늘을 ‘차일처럼, 커튼처럼 치셨다‘라는 표현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유년 부 성경공부 수준으로 단어들을 선택해서 설명해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내용을 머릿속에 그림으로 잘 그려 넣어 보세요.
(사40:22) 땅 위의 저 푸른 하늘에 계신 분께서 세상을 만드셨다. 땅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메뚜기와 같을 뿐이다. 그는 하늘을, 마치 엷은 휘장처럼 펴셔서, 사람이 사는 장막처럼 쳐 놓으셨다.
(시104:2) 2 빛으로 휘감으셨습니다. 옷감을 펼치듯이 하늘을 펼치시고,
그리고 그 휘장을 지나면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지성소인 것입니다. 그 지성소는 ‘삼층 천‘’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인들이 하나님을 뵙기 위해서는 물두멍과 휘장을 지나야 하지요? 성 막에서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물두멍에서 몸을 씻어야 한다는 것은 죄인들이 물에 빠져서 죽고 새로운 사람으로 탄생이 되지 못하면 하나님을 뵐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에 ’그룹들’ ‘천사들’이 그려져 있는 것은 죄인들은 하나님을 둘러싸고 있는 그 그룹들을 통과하지 않고는 절대 하나님을 알현할 수 없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생명나무가 그룹들로 둘러싸여 있던 것을 기억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을 수시로 뵐 수 있게 되었습니까? 아니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습니까?
우리가 지금 공부한 이 창세기의 그림과 성막의 그림에다가 출애굽기의 그림을 포개보겠습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구원‘이라는 한 가지 주제를 설명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래서 그 두 책은 그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제 속에서 정확하게 포개집니다.
(출1:7)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자녀를 많이 낳고 번성하여, 그 수가 불어나고 세력도 커졌으며, 마침내 그 땅에 가득 퍼졌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말 온 땅에 가득했었습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요? 모세는 지금 창세기 1장 28절의 단어들을 동원해서 이스라엘의 구원, 새 창조와 창세기의 첫 창조가 정확하게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관점을 가지고 창세기와 성막에다가 출애굽기를 포개보세요.
출애굽은 무죄한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림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창세기의 첫째 날 ‘빛’과 성막의 ‘번제 단’이 포개지지요?
그리고 유월절을 거쳐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다른 말로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언약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건너야 할 바다가 있었습니다. 그 바다가 바로 홍해입니다. 그런데 그 바다가 은혜로 갈라졌습니다.
창세기의 둘째 날 궁창과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갈라진 사건과 성막의 물두멍과 홍해가 갈라진 사건이 정확하게 포개지지요?
그러면 이제 그 세 그림 위에 요한복음의 그림을 포개볼까요? 요한복음1장과 2장 11절까지의 일곱 날은 정확하게 창세기의 구조를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일곱 날에 쓰여진 단어는 ‘어린 양‘이라든지 ‘세례‘같은 출애굽기의 언어가 쓰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창세기와 출애굽기와 요한복음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빛이 오셨다’로 시작을 하지요? 창세기의 첫째 날이며 성막의 번제단이며 출애굽기의 유월절과 포개집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그 빛이신 분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고전10:1‐2) 1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사실을 알고 지내기를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구름의 보호 아래에 있었고, 바다 가운데를 지나갔습니다.
2 이렇게 그들은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을 그들이 ‘세례를 받았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창세기의 둘째 날 궁창과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 그리고 성막의 물두멍과 출애굽기의 홍해 사건과 요한복음의 예수님의 세례가 정확하게 포개집니다.
그러니까 창세기와 출애굽기와 성막의 이야기는 정확하게 요한복음의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분의 백성들을 구원하셔서 안전하게 하나님이 거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실 것인가를 설명하시기 위해 창조부터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예수께서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라는 것은 옛 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탄생이 되는 사건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우리 죄인들과 연합되셨고, 두 번째 십자가의 세례로 우리 성도들의 옛 사람을 완전히 죽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막의 번제단을 부수어 버리시고 물두멍을 쪼개 버리신 것입니다. 그 물 두멍이 쪼개지지 않고 여전히 존재하는 한 인간들은 절대 그 물 두멍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게 율법입니다. 율법은 지키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율법은 항상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물 두멍에서 몸을 씻는 예식을 하지 않으면 그 물 두멍의 저주의 물이 그를 덮쳐서 죽여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더러운 죄인이 그냥 물두멍을 지나쳐서 지성소로 들어가게 되면 그가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것이 죄인들의 실존입니다. 실제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모두 쏟아져서 더러운 죄인들을 모두 몰살시킨 사건이 있었지요? 노아의 홍수 사건이 바로 율법 아래에서 물두멍을 그냥 지나친 자들에게 쏟아지게 될 하나님의 저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그 물 두멍을 쪼개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성소를 막고 있던 둘째 하늘인 휘장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버린 것입니다.
(마27:50‐51) 50 예수께서는 다시 큰소리로 외치시고 나서, 숨을 거두셨다.
51 ○그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그리고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지고,
이렇게 해서 3층천을 가로막고 있던 궁창과 2층천이 제거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둘째 날의 창조기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궁창과 저주의 물이 제거되고 천지 만물과 하나님이 화목하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성된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더 이상 궁창과 바다가 없어지게 되고 어둠도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첫째 날과 둘째 날의 창조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계21:1) 1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22:1‐5) 천사는 또, 수정과 같이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 나와서,
2 도시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를 흘렀습니다. 강 양쪽에는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는 생명 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열매를 내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 쓰입니다.
3 다시 저주를 받을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그 도시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도시 안에 있고,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예배하며,
4 하나님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고,
5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주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추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릴 것입니다.
이렇게 창세기는 요한 계시록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세요? 창 세기의 둘째 날은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셔서 하나님이 계신 하늘과 땅을 나누시고 구별시키셔서 하늘과 땅이 다른 말로 하나님과 죄인들이 그들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분리가 되었는지를 보여주시고 그 나눔 벽인 궁창을 예수를 통해 거두심으로 하나님이 계신 하늘과 땅이 합일될 것임을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연유로 하나님의 언약이 세워질 때마다 ‘분리’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분리를 합일로 만드시겠다는 것이 바로 언약의 내용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 때마다 분리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서 하와를 분리시키시고 혼인을 시키셔서 다시 하나로 만드시는 것도 죄로 말미암아 분리되었던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로 ‘재통일‘’애나케 팔라이오‘될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 혼인을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하실 때 짐승들을 쪼개시고 그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시지요? 하나님은 그 쪼개진 제물을 통해 분리를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로 그 분리가 하나로 합일 될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쪼갠 고기 사이를 홀로 지나가셨다는 것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그 언약은 하나님 홀로 이루실 것이라는 암시이고요.
그리고 제사 때마다 항상 제물은 둘로 쪼개지고 살과 피로 분리가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들어 있는 지성소와 성소도 휘장으로 분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늘과 땅의 엄격한 분리를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 휘장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찢겨지고 하늘과 땅이 하나로 화해가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은혜 언약이 그 속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의 관점 안에서 창세기 둘째 날의 ‘궁창으로 인한 하늘과 땅의 분리’를 이해하시면 조금 더 이해가 쉬우실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창세기 속에서도 eschatology (종말론)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그 궁창 위의 물이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 이런 것을 궁금해 하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가 요한 계시록의 유리바다를 설명할 때는 궁창 위의 물을 하늘의 유리 바다와 연결시켜 설명을 해 드렸지요? 그리고 요한복음의 첫 번째 설교와 오늘 설교에서는 그 궁창 위의 물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둘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게 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었습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성경을 통해 어떤 역사적 사실이나 우주에 관한 정보를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읽어내면 되는 것입니다.
그 리고 혹자들이 왜 창세기의 둘째 날에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이 빠졌는가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데 그 것은 창세기의 둘째 날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물들이 기식하는 데에 필요한 이 세상의 틀이 구조적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창세기의 셋째 날까지는 틀이 완성되고 넷째 날부터 그 틀에 만물이 채워지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둘 째 날 하늘이 만들어진 것만으로 생물이 존재할 수 없지요? 셋 째 날 땅이 드러나고 바다가 한 쪽으로 몰려가야 비로소 물고기와 식물과 동물과 인간이 살 수 있는 하늘과 땅과 바다라는 터가 완성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셋째 날 땅과 바다까지 완성이 된 다음에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셨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거기서 ’칭하다‘라는 단어 ’카라‘는 ’선언하다, 공포하다, 이름을 주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고대 셈족의 문화권에서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의 의미는 단순히 이름을 지어주는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고대 셈족의 문화권에서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은 소유권과 지배권과 통치권의 행사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시고 거기에 이름을 직접 붙이셨다는 것은 이 천지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그 분이 통치하고 계시며 지금도 그 천지 만물의 운행과 유지에 친히 간섭하고 계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은 ‘보시기에 좋았더라’에서 ‘보다’ ‘라아’라는 단어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보다‘’라아‘라는 단어는 단순한 시각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단어는 ’감찰하다, 보호하다, 염려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 단어가 담고 있는 것은 이슬람교도 같은 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그냥 절대 타자로 저 하늘에 머물러 계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16:11‐14) 1 주의 천사가 그에게 또 일렀다. "너는 임신한 몸이다. 아들을 낳게 될 터이니,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여라. 네가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는 소리를 주께서 들으셨기 때문이다.
12 너의 아들은 들나귀처럼 될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과 싸울 것이고, 모든 사람 또한 그와 싸울 것이다. 그는 자기의 모든 친척을 떠나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13 하갈은 "내가 여기에서 나를 보시는 하나님을 뵙고도, 이렇게 살아서, 겪은 일을 말할 수 있다니!" 하면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주를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이름지어서 불렀다.
14 그래서 그 샘 이름도 브엘라해로이라고 지어서 부르게 되었다. 그 샘은 지금도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그대로 있다.
하갈이 사래의 학대를 피해 도망가는 길에 여호와의 사자를 만납니다. 그런데 그 여호와의 사자가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하갈의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하갈이 감격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으로 부릅니다. 거기서 ‘감찰하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보시기에 좋았더라‘에 쓰인 ’라아‘라는 같은 단어입니다.
(창22:11‐14) 11 그 때에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예, 여기 있습니다."
12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
13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고 살펴보니, 수풀 속에 숫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다. 가서 그 숫양을 잡아다가, 아들 대신에 그것으로 번제를 드렸다.
14 이런 일이 있었으므로, 아브라함이 그 곳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주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는 말을 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할 때 하나님께서 칼을 거두라 명하십니다. 그리고 양 한 마리를 준비해 주시고 그 양으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게 하십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부릅니다. ‘지켜보시고 감찰하시며 자녀의 필요를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거기서 ’이레’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보시기에 좋았더라’에 쓰인 ‘라아’라는 단어입니다.
(출4:29‐31) 29모세와 아론이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모으고 30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31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보시고 그 고난을 감찰하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
31절의 ‘감찰하셨다’에 쓰인 단어도 ‘라아’입니다. 이렇게 ‘보시기에 좋았더라’에 쓰인 ‘라아’라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감찰하심과 지키심과 도우심을 나타내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도우심을 구할 때 이 ‘라아‘라는 단어를 기도의 시작으로 삼았습니다.
(사63:15) 15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의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긍휼이 내게 그쳤나이다
그 러니까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하면서 이 ‘라아’라는 단어를 둘째 날을 제외한 모든 날들에 마치 후렴구처럼 붙여 놓은 것은 하나님은 역동적으로 천지만물과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며 그 분의 계획대로 끌고 가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역동적으로 만물의 존재와 역사에 깊이 관여하고 계시고 그 역동적인 하나님의 계획과 일하심 속에 너희의 구원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희는 그 하나님께 항복하고 순종하라‘라는 내용을 그 ’라아‘라는 단어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잉태되기 전부터 여러분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결국을 결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시고 여러분을 ’라아‘’감찰하시며, 지켜보시며, 보호하시며, 여러분의 필요를 준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왜요? 여러분을 ’좋았더라‘’토브‘의 상태로 완성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여러분을 ’라아‘’감찰하시고 지켜보시며 보호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좋았더라‘’토브‘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여러 번 설명을 해 드렸으니까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 ‘선한 상태’ ‘토브’의 상태로 지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하나님의 창조가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듯이 이토록 확실한 것처럼 우리 안에 시작 된 그 하나님의 새 창조도 반드시 ‘토브’ ‘좋은 상태, 선한 상태’로 완성이 될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지키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득 문득 우리의 처지나 환경이나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면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나보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요?
(욥7:15‐21) 15 차라리 숨이라도 막혀 버리면 좋겠습니다. 뼈만 앙상하게 살아 있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16 나는 이제 사는 것이 지겹습니다. 영원히 살 것도 아닌데, 제발, 나를 혼자 있게 내버려 두십시오. 내 나날이 허무할 따름입니다.
17 사람이 무엇이라고, 주께서 그를 대단하게 여기십니까? 어찌하여 사람에게 마음을 두십니까?
18 어찌하여 아침마다 그를 찾아오셔서 순간순간 그를 시험하십니까?
19 언제까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렵니까? 침 꼴깍 삼키는 동안만이라도, 나를 좀 내버려 두실 수 없습니까?
20 사람을 살피시는 주님,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하여 주께서 무슨 해라도 입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의 과녁으로 삼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의 짐으로 생각하십니까?
21 어찌하여 주께서는 내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내 죄악을 용서해 주지 않으십니까? 이제 내가 숨져 흙 속에 누우면, 주께서 아무리 저를 찾으신다 해도, 나는 이미 없는 몸이 아닙니까?
우리는 때로 욥처럼 이러한 원망을 늘어놓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토브’ ‘좋은 자’좋은 상태’로 만드시기 위한
‘감찰‘’라아‘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 복음의 내용을 올바로 인식하고 깨닫게 되면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감찰 앞에서 욥과 같은 투정이 아닌 다윗과 같은 찬송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시23:1‐6)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신데.). 2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 도다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동일하게 둘 다 하나님의 지키심을 고백하는데 한 사람은 고통 속에서 그 지키심을 바라보고 한 사람은 만족과 기대 속에서 그 지키심을 바라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우리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쫓아다니시며 지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지키심에는, 그 분의 감찰하심에는 지팡이와 막대기가 동시에 사용됩니다. 그 말은 회초리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그렇게 회초리를 맞을 때도 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도 그게 하나님의 지키심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기 위한 하나님의 감찰하심이요 보호하심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러한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지키십니다. 여러분을 ‘토브’로 이끄시기 위해 지금도 지키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 땅을 떠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신신당부를 하고 가셨습니다.
(요17:11‐12) 11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보전) 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12 내가 그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서 보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서는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멸망의 자식만 잃은 것은 성경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전하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테레오‘가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히브리어 ’라아‘와 같은 단어입니다.’지키다, 보호하다‘ 이렇게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키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이 겪고 있는 모든 상황과 사건과 여건들은 다 하나님의 지키심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견뎌내십시오. 잘 이겨내세요.
이미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를 가르고 있던 영적인 궁창은 사라졌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지키심과 감찰하심을 기쁘게 감당해 냅시다.
[출처] 창세기 [ 4 ] 궁창, 궁창 위에 물, 궁창 아래의 물|작성자 봉한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