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야기보따리

나는 어디 갔을까

기독항해자 2013. 3. 11. 15:57

어느 건망증 심한 사람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스님 한 분이 그 옆을 지나갔습니다.

"여보시오, 스님."

"부르셨습니까?"

"우리 심심한데 말동무나 하면서 가면 어떻겠소?"

"그러시지요."

건망증 심한 사람이 말을 붙여서 두 사람은 길동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건망증 심한 사람이 먼저 말을 건넵니다.

"그런데 스님은 어디로 가시는 길이신지요."

"예, 초파일이 머지 않아 건넛마을에 시주를 하러 가는 길입니다."

"예, 그러시군요. 그런데 스님은 이런 날 어디를 가십니까?"

건망증 심한 사람은 자신이 말을 해놓고도 무엇을 물어봤는지 금방 잊어버리고는 똑같은 질문을 다시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 초파일이 머지 않아 건넛마을에 시주를 하러 가는 길입니다."

"예, 그렇군요. 그런데 스님은 지금 날 어디를 가십니까?"

"건,넛,마,을,에,시,주,를,청,하,러,가,는,길,입,니,다."

그러자 양반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허참, 초파일이 좋은 날이긴 한가 봅니다. 여러 명의 스님들이 시주를 청하러 가네요. 그런 그렇고 스님은 이런 날 어디를 가시는 길이십니까?"

스님은 그만 머리가 돌 지경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마침 주막에 당도해서 같은 방을 쓰게 되었습니다.

건망증 심한 사람이 깊이 잠이 들자 낮의 일 때문에 화가 난 스님이 칼을 꺼내서 양반의 머리카락을 싹 밀어버리고는 줄행랑을 쳤습니다.

다음 날 양반이 갓을 쓰려고 하는데 머리를 만져보니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보, 주인 양반, 나 좀 봅시다."

"왜 그러십니까, 손님."

건망증 심한 사람이 자기 머리를 만지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제 스님하고 둘이서 잤는데 지금 여기 스님만 남아 있으니 도대체 나는 어디로 간 거지요?"

"예?"

"아, 내가 어디로 갔는지 좀 알아봐달란 말이요."

"이 양반이 엉뚱한 소리 하려거든 얼른 나가시오."

주막집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온 건망증 심한 사람은 계속 머리를 만지면서 중얼거렸습니다.

"중은 여기 있는데 도대체 나는 어디로 간 거지?"

"나는 어디 있을까?"

(책력, 안상헌, 북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