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수원화성

수원화성

기독항해자 2012. 5. 24. 14:38

수원화성








  수원화성은 우리나라에서 성곽의 꽃으로 불린다. 우리의 역사와 자연이 어우러진 성곽건축의 고졸한 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22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동서양의 군사시설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곽이다. 축성동기부터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 경제적 측면과 조선 왕조의 정신, 철학적 가치를 겸한 효심의 성곽으로 평가된다.

  왕이 나라를 통치하던 시대에 성곽은 세상의 중심이었다. 모든 권력은 성으로부터 나왔고 모든 재화도 성으로 모여들었다. 당대 권력과 문화의 총화였던 수원화성의 탄생에는 조선 22대 임금인 정조와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통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이다. 그가 세자로 책봉되자 정치의 주도권을 쥔 세력과 갈등이 깊어졌다. 반대세력들은 세자와 영조 사이를 갈라놓으라고 혈안이 됐다. 영조는 결국 당쟁에 휘말린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었다. 뒤주 감옥살이에 들어간 세자는 배고픔과 곡간의 열기로 8일만인 26세의 젊은 나이에 질식사했다.

  당시 11세에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정조는 임금이 된 후 절치부심의 한을 풀어냈다. 그리고 13년 후 양주 배봉산(동대문구 휘경동 서울시립대학 앞산)에 초라하게 묻혀 있는 아버지를 최고의 명당으로 꼽히던 화산(융건릉)으로 이장한다. 그와 동시에 화산아래 살던 백성들을 지금의 수원팔달산 아래로 이주시키고 성을 쌓은 것이 지금의 화성이다.

  화성은 정조 18년(1794)에 축성공사를 시작했다. 조선의 최고 실학자 정약용이 화성을 설계하고 영의정 출신 채제공이 감독을 맡아 2년만에 완성했다. 화성은 팔달산을 중심에 두고 수원시가지를 타고 넘으면 약5.8km에 달하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백성들의 통행을 위해 4대문울 세우고 유사시 비상구로 사용하기 위해 암문도 5곳에 두었다. 성안에는 임금이 머무는 행궁을 비롯해 장대 2곳을 세웠고, 망대역할을 했던 공심돈을 3곳에 쌓았다. 4개의 각루와 대포를 설치한 포루(砲樓) 5곳, 치성 위에 대를 세워 누각을 지은 포루(鋪樓) 5곳, 유사시 연기와 횃불로 신호를 알리던 본동 등 건축물마다 제각각 다른 모양으로 지어졌다.

  화성의 특징을 요약하면 첫번째 축조에 쓰인 재료는 돌과 납작한 벽돌을 병용했다. 둘째는 화살과 창검을 막고 총과 대포도 막을 수 있는 근대적 군사시설을 갖추었다. 셋째는 거중기, 녹로 등의 새로운 기계 장치를 활용해 성곽을 쌓은 것이다. 당대 학자들의 연구와 치밀한 계획으로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해 쌓았기 때문에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화성준공 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는 축성계획과 인적사항, 재료, 예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작성한 보고서로, 이미 200년 전에 정확한 공사보고서를 기록으로 남긴 나라는 지구상에 없었다.

  정조는 이곳에 조선의 문화가 숨쉬는 거대한 신도시를 꿈꿨다. 그리고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권으로 큰 정치구상을 위해 수원에 국방요새를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고 눈물과 효심만 남긴 채 역사의 정거장으로 남았다. 그 뒤 조선은 급격히 쇠토의 길로 들어섰고, 화성의 운명도 퇴락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은 무너지고 부서졌다. 48개의 시설물 중 7개 시설은 수해와 전란으로 멸실됐다.

  1970년대 중반 당시 국방유적 복원사업으로 성곽과 행궁은 이제 온전한 모습이 되었으며 1997년 인류전체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돼 국제사회의 보호와 감시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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