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수원화성

창룡문

기독항해자 2012. 4. 19. 15:54

창룡문










창룡문(蒼龍門)은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에 위치한 수원 화성의 동문이다. 돌로 쌓은 홍예문 위에 단층문루를 세우고 밖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한쪽이 열려 있는 옹성을 쌓은 구조로 되어있다. 창룡문(蒼龍門)의 이름은 음양오행설에서 푸를 '창'자가 동쪽을 의미한다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1794년에 정조대왕의 명으로 성곽과 같이 착공했으며 1796년에 다른 시설물과 같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문루와 홍예가 소실되었으나 1975년에 복구하였다. 그리고 1997년 수원 화성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한국전쟁 때 동문은 인민군들의 무기창고였다. 유엔군 폭격기는 적의 창고로 쓰이는 창룡문을 표적으로 삼아 무차별 공격했다. 문루는 소실됐고 남은 것은 홍예문과 무사석 뿐이었다. 창룡문은 파괴되기 전까지 화서문과 함께 단아한 모습이었다. 우거진 노송과 어우러져 창얀함이 묻어났던 한 폭의 동양화였지만 1975년 복원되면서 옛 맛을 잃었다. 고색창연한 분위기는 이제 사진으로만 남았다.

홍예의 크기만을 놓고 볼 때는 장안문보다 더 크다. 서남으로 행궁과 1,040보 떨어져 있고, 안팎으로 홍예를 설치하였는데, 안쪽은 높이가 16척 너비가 14척, 바깥 쪽은 높이가 15척 너비가 12척, 전체 두께는 30척이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각각 아래 너비가 30척 높이 18척 5촌이며, 좌우의 와장대(臥長臺)는 길이가 각각 20척이고 돌계단은 각각 14층이며 너비는 9척이다. 바깥쪽 좌우 무사의 너비는 각각 25척 높이는 18척이며, 안팎 홍예 사이의 좌우 무사는 높이가 각각 17척, 양쪽 선문 안은 쇠로써 빗장을 설치하였다.

창룡문을 보호하는 옹성의 출입구는 장안문과 팔달문처럼 중앙에 내지 않았다. 화서문 옹성처럼 반달 형태로 축조했고 한쪽이 열려 있다. 축성 당시 창룡문은 용인과 광주로 가는 주요 통로였다. 하지만 그쪽 지역 사람들은 창룡문 보다는 팔달문을 많이 이용했다.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는 상권이 팔달문 인근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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