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과 삶/경건서적산책

광야를 지나는 법(도널드 맥컬로우)

기독항해자 2009. 7. 16. 16:42

제1장 ‘할 수 있다’ 맹신문화에 대하여


  좋은 이야기는 진솔하다. 실화건 꾸며낸 이야기건, 특정 상황을 세밀하게 묘사해서 인생의 단면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다. 우리가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인간의 “영원하고도 부단한 갈등”을 설명하기 때문이라고 윌리엄 포크너는 말했다.

1. 인생의 역풍

  살다보면 누구나 인생의 역풍에 고전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광풍이 연이어 불어 닥치기도 한다.

  매서운 역풍이 몰아칠 때 인간이 자기 방어의 기제로 제일 먼저 꺼내드는 화살이 의구심이다. 그러나 의구심의 화살은 멀리 가지 못하고 금세 떨어져 버린다. 두 번째 화살은 분노다. 분노를 쏟아 놓은 대상은 하나님 외에 누가 있겠는가? “제가 뭘 잘못했나요? 왜 제게 이런 벌을 내리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두 번째 화살도 아무 소용이 없다.

2. 초점이 바뀌다

  전에는 큰 회사의 사장이 되고 부를 쌓아야 성공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성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전 병이 나기 전에도 하나님을 믿었고 그렇게 나쁜 인간도 아니었습니다. 누구를 속이지도 않았고 마약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인생을 제가 바라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죠. 이제 제 인생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3. 끝나지 않는 고통

  우리는 광야 같은 척박한 삶을 지나고 있는 것이다. 결혼이 자신을 더 외롭게 만들기도 하고, 홀로 자식을 키우며 아등바등 살아가는 삶이 창살 없는 감옥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성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 좌절감만 깊어지기도 하고, 진급이 되지 않아 만년말단의 신세에 머물기도 하고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기도 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스러운 순간도 있다. 살다보면 다양한 방법으로 실망과 고민을 하기 마련이고 그 때문에 좌절의 구렁텅이에 빠지기도 한다.

4. 어둠 속에 숨겨둔 보물

  인생의 환상이 끝나는 시점은 어느 면에서 믿음에 바탕을 둔 새 삶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좌절을 통해 우리를 연단하신다. 승승장구하던 삶이 실망의 장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며, 비로소 우리는 좌절 속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보물을 어둠 속에 숨겨두신다. 아무리 찬란한 별도 밤이 되기 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보물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아름다움과 찬란함을 보면서 그런 하나님의 능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해질 것이다. 그 능력은 어두운 곳, 즉 예기치 않은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뜻이 드러나는 바로 그곳에서 나온다.”


제2장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은 세상


1. 불굴의 파란 기차

  열심히 노력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정신세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인 19세기 작가 호레이셔 앨저다.1) ‘미국이라는 기회의 땅에서는 누구든 수완과 능력만 뛰어나면 한몫을 단단히 챙긴다. 물론 어려움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가 승리의 트로피를 들어올린다. 난관에 부딪쳐도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그동안 희망찬 미래를 이야기할 때마다 긍정적 사고라는 개념은 수많은 선전 문구 속에 침투하여 우리 의식 속에 파고들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 “인생의 어두운 면만 보지 말고 밝은 면을 봐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다.” “꾸준히 노력하면 성공이 보인다.” “모든 문제에는 가능성이 있다.” 등등.

2. 긍정적 사고의 효력

  낙관주의를 키운 첫 번째 요인은 긍정적인 자세가 용기를 주고 인생의 장애물을 극복하는 데 요긴하다는 실용적인 필요성이다.

3. 언덕위의 도성

  낙관주의를 가져오는 두 번째 요소는 미국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난 할 수 있어’ 정신력이 미국의 국민정서로 자리 잡게 된 데는 어떤 이유가 있는 걸까? 그 이유는 한 마디로 요약해서 ‘선민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긍정적 사고는 미국의 개척 정신과 국가 건설의 근간이 되어 주었다. 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물론이고 교회, 학교, 사업체 등을 세울 때에도 미래지향적이고 근면성실한 정신이 강조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난 할 수 있어’ 정신이 미국 심장의 산소 같은 존재가 되어 국가 건설과 발전의 추진력이 되었던 것이다.

4. 기술력의 우상화

  미국의 낙관주의를 키운 세 번째 요소는 기술력에 대한 과신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격언이다. 이 격언을 지나치게 적용한 미국인들은 과학자를 우상화하는 지경까지 이르러 그들이 만든 반도체가 만능인 양 우쭐댔다.

  미국인상의 전형이라는 벤저민 프랭클린을 생각해보라. 그의 자서전을 보면 가난한 소년이 이를 악물고 공부하고 일해서 마침내 성공하는 전형적인 성공 스토리가 그려져 있다. 양초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프랭클린은 대학에 들어갈 형편도 못됐다. 하지만 독학을 해서 지식을 쌓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해서 대단한 업적을 이룩한 결과 ‘당대 최고의 의인이며 나라의 보배’라는 아낌없는 찬사까지 들었다. 프랭클린이 프랑스 사절로서 보여준 외교 수완은 혁명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역사가들은 그를 미국 역사상 최고의 외교관을 손꼽는다.

  프랭클린이 남긴 글에는 긍정적 사고의 틀을 마련한 수많은 명언들이 들어 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 건강하고 잘 살고 현명하다.”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 “잃어버린 시간은 절대 되찾을 수 없다.” “계속 찍으면 거대한 떡갈나무도 쓰러진다.” 프랭클린은 ‘난 할 수 있어’라는 미국인의 국민의식을 스스로의 삶 속에 실천하여 산 증인이다.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나라 발전에 기여했던 그는 ‘할 수 있다’ 정신으로 과학적 발명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프랭클린에게 긍정적 사고와 과학은 일체를 이루었다. 확고한 소신과 인내심만 있다면 무엇이든 불가능할 게 없다는 신념은 과학혁명의 시기에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준 것이다.

5. 기술력이 우상이 되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어주었다. 말을 타고 다니던 시절에서 초고속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시대까지, 전보를 치던 시절에서 인터넷 전화를 사용하는 시대까지, 달나라 토끼를 이야기하던 시절에서 달나라 탐험을 하던 시대까지, 홍역이 두려운 시절에서 인공 고관절을 삽입하는 시대까지 얼마나 큰 격변기를 보냈겠는가?

  수천년간 인간은 우주 만물의 경이로움에 감탄하며 그 신비와 능력에 압도되어 살았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우주 만물은 망원경과 현미경 속에서 신비를 벗었고 지식은 곧 능력이 되었다.

6. 나를 개척하는 시대

  과거 긍정적 사고에 일조했던 외부적 요인들이 점차 영향력을 잃어가면서 새로운 개척지가 생겨났다. 개척지가 인간의 내면으로 이동한 것이다. 인간의 가능성을 발견하자는 움직임은 자기계발, 심리치료, 감수성 훈련, 다이어트 열풍, 성기능 클리닉, 동양식 명상, 자존감 세미나, 조깅과 마사지, 채식 요법, 멀티 영양제 등등으로 발전했다. 사람들은 갈수록 나를 개선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매진한다.


제3장 불가능은 있다.

  기독교 신앙에는 당시의 시대상이 그대로 반영된다. 어린 아이가 주변 사람과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듯 우리의 믿음도 사회와 문화의 영향을 받는다. 믿음은 사회나 문화의 영향 아래 놓여 있지 않고 수정보다 맑고 깨끗하게 성경적 진리를 보존하며 사회의 퇴적물과 무관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긍정적 사고를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난 할 수 있어’ 정신을 성령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회들도 있다. 그러나 긍정적 사고와 기독교 신앙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긍정적 사고는 기독교 진리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 단적인 예로 긍정적 사고에는 죄라는 개념이 배제되어 있다.

1. 깨어진 연합

  죄란 무엇인가? 죄는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성경은 죄가 되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금한다. 그런 행동은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는 단지 행동의 차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라고 한 사도 바울의 말은 단순히 모든 인간들이 자기 삶의 이런저런 죄를 뉘우쳐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 즉 죄로 가득한 존재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 식물과 동물을 창조하셨다. 창조의 절정은 하나님의 모습과 형상을 따라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의미는, 다른 것을 몰라도 최소한 우리가 의지를 갖고 있는 존재임을 말해준다. 즉 무언가를 선택하고 만들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인간에게 있는 의지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거나 혹은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인류 최초의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의지를 부정적인 방법으로 사용했다. 죄는 불순종이라는 명백한 행위로 표출되었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해 더 높은 자리에 서겠다는 반역행위였다. 하나님의 자리란 무언가를 통제하고 다스리는 자리다. 내가 죄인이 된 이유는 죄인이 되고 싶어서다. 우주를 지배하고 나라들을 통치해야만 하나님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에서 자신이 중심이 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세상일이 돌아가기를 바라고, 자기 마음대로 되도록 조종하고, 마음대로 안 되면 불만을 표시한다.

  하나님은 왜 계명을 만드셨는가?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로 우리가 그것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아시기에 금지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금한 바로 그것을 하고 싶어 한다. 자기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인간은 치사해지고 야비하게 군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남이 갖고 있으면 시기심이 치솟는다.

  도널드 베일리는 죄를 이렇게 비유했다. 하나님이 자녀인 우리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둥글게 서서 게임을 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그 게임에서 우리는 서로 손을 붙잡고 중앙에 서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서 있어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밝은 빛이 비치고 손을 맞잡은 우리는 그 빛을 받으며 ‘사랑의 우주’라는 음악에 맞추어 즐겁게 춤을 추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서 있다고 해보자. 우리 얼굴에는 빛도 비추지 않고 등을 돌린 자세에서 사람들의 손도 잡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얼굴조차 볼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각자 자기만의 이기적인 게임에 열중해 있는 것이다. 즉 모두가 자신이 중심이 되기를 바라면서 완전한 혼돈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이 만족스러울 리 없다. 하나님의 빛은 계속해서 여전히 비치건만 그 빛은 오직 우리의 등만 비추고 있을 뿐이다. 우리 앞에서는 낯설고 비정한 세상의 그림자만 드리워져 있다. 우리는 행복해지려고 노력하고 미친 듯 열심히 춤을 추어보지만 눈앞에는 우리를 조롱하듯 그림자만이 춤을 추고 어느 때보다 더 불행하게 느껴진다. 스스로 착해지려고 갖은 애를 써봐도 그것마저 뜻대로 되지 않는다. 더 행복해지고 자신의 단점을 고쳐보려고 더 노력할수록 우리는 자신을 더욱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자기중심적인 모습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게에서 자신이

2. 내가 내 삶의 지배자일 때

  가장 교묘하고 그래서 더욱 위험한 죄 가운데 하나가 교회 다닌다는 신자들의 죄다. 그런 사람들은 겉으로 매우 독실한 신앙인같이 보이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죄스러운 삶의 전형적인 양상을 보여준다. 자기중심주의를 종교적 언어와 고상한 목표로 포장해도 결국은 자기중심주의일 뿐이다. 죄를 가장 효과적으로 숨길 수 있는 방법은 독실한 신앙인인 체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내 삶에 모셔도 우리는 여전히 자기중심적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즉 예수님이 내 생애의 중요한 일부분을 차지할지는 모르지만 여전히 나 자신이 삶의 지배자로 남아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즉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구원해준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고 원래 하나님의 자리였던 우리 삶의 중심자리에 그분이 앉으시도록 한다. 그런 변화가 없다면 하나님은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밖에 되지 못한다. 자기기 원하는 것을 만족시켜주는 실리적인 신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그런 식이 기독교 신앙이 만연해 있다.

  제임스 구스타프슨은 이렇게 말했다.

  “종교적 믿음과 의식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매우 유용한 수단이 되어준다. 개인과 사회를 괴롭히는 문제들을 해결하고, 나름대로의 윤리적 근거를 제시한다. 개인의 신앙과 사회전체의 신앙은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리거나 하나님을 높이거나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오직 그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부차적인, 아니 때로는 목적 달성의 걸림돌이 되기도 하는 존재일 뿐이다.”

3. 구하기만 하면 모두 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자기 자신이 삶의 중심에 앉아 있는 사람은 공허함을 느낀다. 그렇게 공허한 상태에 있을 때 인간은 주변 환경과 문화의 영향에 가장 취약하다. 미국인들은 이렇게 믿고 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성취감을 느끼게 된다고 게다가 필요할 때마다 전문가들이 달려가서 도와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영혼의 갈망을 ‘할 수 있다’ 정신으로 채우려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가? 하나님을 실용적인 전문가로 전락시키는 꼴이 되고 만다. 사실상 나아지거나 변화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예전에 불신자로서 저질렀던 죄가 이제 교회 다니면서 짓는 죄로 대체되겠지만 그래도 죄는 그대로 있다.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나’가 여전히 삶의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4. 더 많은 땀, 더 많은 노력

  우리가 숨 쉬는 문화의 공기는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의 성공은 자신이 하기 나름이라고 수많은 목소리들이 이야기한다. 그러다보니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신다고 믿게 되었다. 긍정적 사고라는 대중음악을 찬송가 가락으로 연주하는 것이다. 더 강한 믿음, 더 강도 높은 훈련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즉 당신의 영이 땀을 흘리고 노력하면, 당신이 하나님을 실용적인 전문가로 만들 수 있다면 하나님은 당신이 필요한 것을 주실 거라는 얘기다.


제4장 참을 수 없는 인생의 부족함


1. 비어 있는 잔

  모든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 최고의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도 언젠가는 그 사실을 깨닫고 말 것이다.

  반잔의 물을 볼 때 비어 있는 반이 아니라 물로 채워진 반을 보라는 유명한 얘기가 있다. 내가 앞 장에서 지적한 것처럼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삶의 난관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내적인 힘이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문제는 긍정적 사고의 제사장들에 의해 중요한 진리가 낙관주의라는 제단에서 희생된다는 점이다. 반잔의 물이 채워져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나머지 반이 비어 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영적으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반이 비어 있는 잔의 물을 어떻게 마셔야 하는지 배워야 한다.

  심리적인 고통도 그 강도와 종류에 차이가 있다.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이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 하는 마음과 남편과 사별한 여인이 남편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분명 다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개인적 고통의 범주를 너무 쉽게 혼동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즉 자신이 특정한 부분에서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과 심각한 문제를 만났을 때 느끼는 감정은 완전히 다르다.

  우리 주님을 제외하고 이 세상에 살았던 역사적 위인들 중에 “다 이루었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는 사람도 들어보지 못했다.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를 정복했지만 인도까지 가기엔 병사들이 너무 지쳤다며 눈물을 흘렸다. 근대 국제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휴고 그로티우스는 죽기 전에 “내 생애 가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미국의 제6대 대통령을 지낸 존 퀸시 애덤스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무익한 야망에 젖어 헛되이 인생을 낭비했다. 끊임없이 거절당한 간구 속에서도 그래도 내 존재가 인간 세상에 조금은 보탬이 되었기를 희망한다.”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자신의 묘비에 어떤 비문을 새겼는지 아는가? “여기에 선하게 살려 했지만 이룬 것은 별로 없고 실패만 잔뜩 한 남자가 잠들어 있다.”

2. 그제 전부인가?

  무언가를 간절히, 간절히 원했는데 막상 그 일을 이루어지자 허탈감에 빠져본 적이 있는가? 대학 진학이든, 결혼이든, 승진이든, 임신이든, 아무튼 당신은 ‘난 할 수 있어’ 정신으로 무장해서 힘껏 노력하고 하나님의 은혜까지 더해져 목표했던 것을 이루었다. 그런데? 삶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으므로 살다 보면 또다시 원하는 게 생긴다.

  사도 바울도 ‘인생의 고뇌를 짊어지고 사는 법’을 배워야 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위대한 신학적 고찰 중에도 바울은 현재의 고난이 있음을 시인했다. 바울이 말한 고난은 자잘한 골칫거리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뼈아픈 시련과 고뇌 등의 극한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 모든 것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고 말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8:22).

  바울이 말하는 고통은 건강이나 부나 행복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생기는 불만족과 거리가 멀다. 바울은 말하는 고통은 죄로부터 나오는 비탄이다. 전염병처럼 우리 삶을 갉아먹고 약회시켜 결국은 죽음으로 몰아가는 죄에 대한 고통이다. 세상이 그 모양이니 우리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이들이 기형으로 태어나고, 음주 운전자 때문에 친구를 잃고, 더 좋은 이성이 생겼다며 배우자를 버리는 등 헤아릴 수 없는 비참한 일들이 일어난다. 우리는 수도 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상처를 받으며 살아간다.

3. 억울하게 고난 받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생의 고통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비정상적으로 생각한다. 어려움이 생기면 뭔가 자신의 신앙에 큰 문제가 있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믿는다. 그와 같은 근거 없는 죄책감이 고통을 더 심화시킨다. 물론 우리 자신이 뭔가 잘못해서 문제를 자초할 때가 있다. 인간의 연약한 면 때문이기도 하고 때로는 명백하게 하나님을 거역해서 생기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 고난을 당할 때도 많다. 불의가 득세할 때에는 불가피하게 고통을 당해야 한다.

  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오는 고난이 있다고 한다. 사도바울이 당하지 않은 일을 꼽으라면 코끼리 떼에 밟히는 것이랄까? 대체 사도 바울의 믿음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가 믿음으로 어려운 시간을 견뎌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바울처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왜 그런 고난으로부터 보호 받지 못했단 말인가? 그는 언제나 ㅎ나님과 동행했다. 그랬기에 고난의 물결에 휩쓸려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때에는 몹시도 당황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이 겪은 고난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정한 제자의 표시로 여겼다. 축구 선수가 부상을 당해도 그 부상을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라 그만큼 경기에 몰입했다는 증거로 떳떳이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바울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었고 예수님은 장미가 깔린 꽃길로만 다닌 분이 아니셨다. 예수님은 믿음을 지키셨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완벽하게 순종하셨으며 결국은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셨다.

  예수님도 고난을 당하셨다. 바울도 고난을 당하셨다. 우리도 살면서 어려움을 당한다.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할 때 느끼는 좌절감은 우리 내면의 갈망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반응이다.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신뢰해도 그런 감정은 우리 마음속에 침입한다. 불순종한 세상에서 순종의 삶을 살아가도 그런 감정은 여전히 우리를 강타한다.

4. 우울증의 광야에서

  기분 좋은 꿈은 깨어나고 싶지가 않다. 각박한 현실은 자꾸만 달콤한 꿈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다. 어차피 직면해야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불만스런 현실을 탈피하기 위해 더욱더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이를 악물고 성공을 향해 달려간다. 그러다 기운이 빠져 탈진하면 헉헉대다가 고꾸라진다.

  자, 그런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보통 우울해지고 좌절감이 찾아온다. 그런 상황에 처하면 사람은 자신감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내적 상실감으로 인한 우울증이 생긴다. 반면에 좌절감은 자신의 세계를 잃어버리는 외적 상실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믿음이 있으니 이런 문제에서 제외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렇지 못하다. 믿음이 다 해결해준다고 말하는 책과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사람들은 성경을 좀 더 주의 깊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엘리야 선지자를 생각해보라. 그는 참으로 대단한 공적을 남겼다. 3년간의 가뭄을 정확히 예언했고, 죽었던 과부의 아들을 살렸고,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들이 물어오는 음식을 먹었고, 신앙의 슈퍼볼이라고 할 수 있는 영적 대항에서 950명의 바알 선지자에게 대승을 거두었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랬던 그가 이런 푸념을 늘어놓았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히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19:10).

  엘리야의 푸념에 하나님은 어떻게 대응하셨는가? 선지자 무리에서 내쫓으셨는가? 그를 포기하셨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낙담하고 있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지진이나 불길 속에서 극적인 방법으로 말씀하신 게 아니라 고요한 가운데 낙담한 그의 영혼이 겨우 알아들을까 말까한 조용한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도 우울증에 걸리고 실의에 빠진다. 위대한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주기적으로 우울증을 앓았다고 한다. 당시 최고의 설교가로 극찬 받았던 찰스 스펄젼은 몇 주간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우울증과 불안감에 시달릴 때가 많았다. 성경을 의역하여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필립스도 심각한 우울증으로 고생했다. 사는 게 쉽지 않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5. 좌절감의 벽 앞에서

  역경이 처했을 때 인간이 보이는 또 다른 반응은 우울증의 사촌이라고 할 수 있는 좌절감이다. 우울증에 걸리면 기분이 가라앉고 공허함이 찾아온다. 한마디로 맥이 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좌절감의 경우에는 장래가 어두워 보이고 희망이 사라지는 외적 상실감이 찾아온다. 좌절감은 보통 목표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내적인 추진력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모든 노력이 허사라고 느껴진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여전히 우리의 내면에서는 갈망의 물결이 일렁인다. 희망이 사라지고 미래가 암담하게 느껴져도 우리는 분명히 더 나은 무언가를 원하고 있다


제5장 허상에서 깨어나다.


  인생에 한계가 있음을 부인하지 못하는 시점에 이르면 누구나 한계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우울증도 좌절감도, 심지어 가벼운 실망도 모두 그런 몸무림의 일환이다. 어딘가에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어려움을 피할 수 있는 길이 반드시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쉽게 걸려드는 유혹이 세 가지 있다. 고통을 경감시키고 쉬운 길을 보장할 것처럼 보이는 세 가지 유혹이란 물질주의와 권력과 종교다. 모두 우상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매력적이고 군침 돌게 하는 유혹들이다.

1. 물질주의와 허상

  우리의 충성심을 갈취하려고 제일 먼저 달려드는 우상이 물질주의다.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굴복했고 많은 사람들이 물질의 힘으로 생의 만족을 얻을 것이라 믿고 있다. 물질주의는 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인간은 물질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의식주가 필요하다. 그래서 자신은 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의식주를 공급하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며 수고한다. 많은 것을 가져야 안심하고 살아간다. 물질주의가 가져오는 안도감과 기쁨은 즉각적이고도 구체적이기 때문에 인간은 물질주의가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

2. 욕망을 채울수록

  현대 서구사회라는 엔진은 탐욕이라는 연료로 가동되고 있다. 미국의 국가경제는 소비지출이 늘어나는 것에 의존한다. 한 조사 자료에 의하면 미국인 한 가정이 하루에 접하는 광고가 1,600개라고 한다. 소비력의 증대에 거는 신뢰는 미국이 갖고 있는 신화 중 하나다. 미국인들은 삶의 질을 높이겠다고 약속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 국회로 보내지 않는다.

  톨스토이가 지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땅을 공짜로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하루 종일 걸어 다니며 밟은 지역 전부를 주겠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가능한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부지런히 걷고 또 걸었지만 너무 무리한 나머지 출발점에 도착했을 때에는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죽고 말았다. 결국 그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 바로 이것이 물질에 대한 욕망의 최후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욕망은 만족시킬수록 더 커지고 나중에는 욕망 자체만 남는다. 록펠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억만장자가 되었지만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존 제이콥 아소르트는 5백만 달러는 유산으로 남겼으나 죽기 전에 “나는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다”라고 탄식했다. 헨리 포드는 기계공으로 일했던 때가 더 행복했다고 말했고, 앤드류 카네기는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말을 남겼다. “백만장자는 웃을 일이 없다.”

  물론 부자들이 혜택을 누린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고 가난이 그 자체로 고통스럽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은 물질 이상의 존재다. 오직 물질적인 차원에만 머물러 물질주의를 생의 목표로 삼는다면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뿐이다. 떡은 굶주림을 해결해주기는 하지만 인간은 굶주림만 해결되었다고 행복한 게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주의가 무기력한 우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적절한 선을 벗어나 물질주의가 우상화의 차원에 이르면 인간은 절대로 물질주의에서 만족을 찾지 못한다.

3. 권력이라는 우상

  만족스런 삶을 제공하겠다고 나서는 두 번째 우상은 권력이다. 인생의 조각들로 의미 있는 문양을 만들고 싶은 사람에게 권력은 가장 그럴 듯한 수단처럼 보인다.

  권력의 힘은 막강하다. 살다보면 누구나 그 마력에 걸려든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돌아가면서 줄반장을 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권력이 주는 맛을 알아차린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핵심 권력에 속하기를 바라고 결혼을 하면 상대의 기를 제압해서 결혼생활의 주도권을 쥐겠다고 싸운다. 직장이야말로 권력의 힘을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는 곳이다. 사무실에서 어느 자리에 앉아 있는지. 어떤 사무실에서 근무하는지, 회사 차는 어떤 것을 타고 다니는지, 모두가 권력의 표상이다.

  왜 그토록 인간은 그토록 권력에 집착하는가? 그 이유는 권력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높여 주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높은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에서 권력은 자신의 맘대로 할 수 있는 힘을 가져다준다.

4. 권력이라는 무상하다.

  1923년 시카고의 에지워커비치 호텔에서 세계 최고의 거부이며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는 유명 인사들이 만나 회합을 가졌다. 그들의 재산을 전부 합치면 미국 재무부 예산보다 더 많다고 했고 수년간 대중매체는 그들을 성공한 사람의 본보기로 치켜세웠다. 미국 최대의 철강회사 사장이었던 찰스 스왑, 미국 내 최대 밀 중개상이었던 아더 커튼, 뉴욕은행 총재였던 리처드 위트니, 하딩 내각의 재무장관이었던 알버트 폴, 월스트리트의 큰손이었던 제시 리버모어, 국제결제은행의 은행장이었던 레온 프레이저, 세계 최대 전매회사 사장이었던 아이버 드루거였다. 그런데 이들의 말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가? 찰스 스왑과 아더 커튼은 도산하여 빈털터리로 죽었고 리처드 위트니는 교도소에서 수년을 복였했으며, 알버트 폴은 수년간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임종 시 풀려나 집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제시 리버모어와 레온 프레이저와 아이버 드루거는 자살했다.

  권력은 절대 만족을 모른다. 권력을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은 피맛을 본 상어처럼 더 광포하게 달려든다. 헨리 필딩은 돈을 신으로 숭배하는 사람에게 돈은 악마처럼 달려든다고 말했다. 이 말은 권력에도 해당한다. 권력은 계속적으로 영혼의 희생을 강요해서 인격을 말살하고 결국 잿더미만 남게 만든다.

  예수님도 막강한 권력에 대한 유혹을 받으셨다. 그것은 예수님에게 가한 사단의 두 번째 시험이다. 누가복음에 보면 사단은 예수님에게 천하 만국의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넘겨주겠다고 했다. 얼마나 어마어마한 권세인가! 예수님이라면 분명 지혜롭게 은혜롭게 그 권력을 사용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라도 그런 제안은 받아들여야 하지 않았을까? 그냥 세상이 가는 대로 따라가며 세상의 규칙을 억지로 변경하려 하지 말고 세상이 하는 대로 장단을 맞추어주면 좋지 않았을까? 왜 그런 성공을 마다하고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길을 택하셨을까?

  예수님은 그런 식의 권력이 어떤 식으로 끝난다는 것을 잘 아셨다. 권력은 무상하고 권력의 끝은 또 다른 권력일 뿐이다. 권력은 절대로 구원으로 이끌지 못한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절대로 세상을 통치하지 않으신다는 얘기가 아니다. 분명히 통치하실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방법대로 통치하실 것이다. 권력의 그분의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 말하는 그런 식의 권력은 아니다.

5. 종교라는 우상

  세 번째로 왕좌를 노리는 우상은 종교다. 종교는 신에 대한 갈망이고 신과의 관계를 통해 삶의 한계를 넘어보려는 인간의 노력이다.

  종교는 분명 매력적인 유혹이다. 사탄이 가장 효과적으로 인간을 유혹할 때는 인간이 찬송가를 부르고 분향단의 냄새를 맡을 때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광야 시험의 순서가 다분히 의도된 것을 보았을 때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사탄은 뻔히 드러나는 악한 짓을 제의하는 대신 아주 영적으로 보이는 일을 제안해서 시험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는 것이다.

  사탄은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갔다. 그곳은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이자 가장 높은 지점이었다. 그곳에서 사탄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사탄은 성경 말씀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사탄이 하는 말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 “예수여, 당신의 믿음을 증명하라.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보호 천사 부대를 파견해서 당신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도 막아준다고 하지 않으셨는가?”

  사탄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을 해보라고 요구한 것이다. 즉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이 믿을 만한 분인지를 증명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순식간에 스타가 되어 국회 조찬기도회 주빈은 물론 예루살렘 성전의 부흥성회 강사로 초빙되었을 것이다. 왜 예수님은 후미진 곳에서 무명의 어부들하고 시간을 낭비하고 계셨을까?

  하나님을 위해 믿음을 과시하려고 했던 행동은 결국 예수님을 자신을 위한 행동으로 변질되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종교적 자아희생을 통해 자신의 최고 상태에 도달하며 그러한 희생은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가장 완벽한 수단이다. 종교적 자아희생에서는 신이 가장 크게 부각되지만 가장 완벽하게 하나님을 인정하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실제로는 가장 완벽하게 하나님이 부인된다.

  완벽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보호를 강요하라는 시험은 곧 종교라는 우상에게 절하는 것이다. 그러나 긍정적 사고의 술에 만취한 사회에서는 이러한 행태가 얼마든지 받아들여진다. 소란을 떨며 어떻게든 하나님의 축복을 챙기려는 ‘난 할 수 있어’ 신앙인이야말로 성전 꼭대기에서 제일 먼저 뛰어내릴 것이고, 제일 먼저 자신의 독실함을 증명하려 할 것이고, 제일 먼저 하나님께 좋은 점수를 따내려 할 것이고, 제일 먼저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나설 것이다.

6. 모조 신앙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믿음과 하나님을 조정하려는 믿음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우상은 인간에게 마음대로 살아갈 재량을 주는 반면,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라고 하신다. 우상은 인간의 미래를 허위로 보장하면서 언제나 스스로의 욕구에 따라 행동하도록 조장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인간을 위해 올바른 결정을 내려주겠다고 약속하시고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을 보이신다. 가장 큰 문제는 성경의 하나님을 종교적 신으로 대체하는 위험이 증가한다는 사실이다.

7. 황홀경을 넘어서

  모든 시험과 유혹은 예수님이 받으셨던 세 가지 시험의 변형과 합성에 불과하다. 왜 성적인 유혹이 그토록 강한 걸까? 세 가지 근본적인 유혹을 절묘하게 합성한 형태의 유혹이기 때문이다. 물질주의, 권력, 종교의 유혹이 한 지붕 세 가족으로 살아가는 게 성적인 유혹이다. 성교는 육신적 쾌락을 준다. 섹스는 권력과도 통한다. 상대와의 밀접한 접촉과 유대감이 곧 권력이다. 물질주의와 권력이 합해지면 종교적 흥분상태인 황홀경을 낳게 된다. 황홀경이란 마치 자기 자신 밖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며 인간의 한계성을 초월하는 한순간의 경험을 말한다. 섹스의 기쁨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이지만 섹스를 우상화하여 그것에서 삶의 만족을 찾으려 하면 도를 벗어나게 된다.

  우리의 반 잔을 가득 채워주겠다고 약속하는 우상들에게 구원을 받으려는 사람, 물질주의와 권력과 종교의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은 이내 그런 우상들이 얼마나 무능력하고 자신의 요구를 채워줄 수 없는지 알게 된다. 인간의 욕망이 그런 우상들을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우상들은 결코 인간의 상상력 이상을 넘어설 수 없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거룩하시며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제6장 연단의 시간은 사랑받는 시간


  물질주의, 권력, 종교라는 우상으로 인생의 반 잔을 채우려는 사람은 인생에서 실패하고 만다. 너무 많이 바라서가 아니라 너무 적게 바라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바라는 것 이상의 것들이 필요하다.

  하찮은 욕구는 하찮은 우상을 만들어낸다. 물질주의, 권력, 종교라는 우상이 인간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고 심지어 그런 우상들을 위해 희생까지도 각오하게 만든다. 그러나 결국은 그렇게 헌신했던 우상들이 자신이 원하는 행복을 완벽하게 이루어주지 못한다는 현실에 눈뜰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인간은 다시 새로운 욕구를 충족시켜 줄 새로운 우상을 찾아 나선다. 어쨌든 근본적인 굶주림은 결코 해결하지 못한다.

  파스칼이 인간이 굶주림을 느끼는 이유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물건이나 사람은 결코 그 공간을 채워줄 수가 없다. 어리석게도 인간은 그 공간을 채워 보겠다고 시도한다.

1. 하나님은 허물없는 친구가 아니다.

  하나님을 허물없는 친구의 이미지로만 인식시킨다면 그분의 경이로움은 하품의 대상이 되고 복음은 따분한 이야기로 전락해버린다.

  왜 우리는 하나님이 두렵고 무서운가? 정당한 이유에서다!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이라면 그분을 우습고 가볍게 대하는 태도는 처벌받아야 한다. 그분의 전능하심이 인간의 의표를 정확하게 찌를 것이고 인간의 절대적인 취약성을 무참하게 드러낼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은 인간의 약함을 폭로한다. 하나님의 영원성은 인간의 유한성을 두드러지게 한다. 그분 앞에서 모든 것이 발가벗겨지고 드러나기에 우리는 그 앞에서 엎드릴 수밖에 없다.

2. 가장 필요한 분

  ‘거룩하다’라는 단어는 ‘구분하다, 분리하다, 특별한 용도로 사용하다’라는 뜻이다. 한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거룩함은 인간 세상에서 가장 낯설고 독특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에는 거룩함과 동격으로 비유할 만한 개념이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식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우리와 완전히 다른 분이며, 피조물에서 파생한 분이 아니라 피조물을 손 안에 넣고 계신 분이며, 인간이 필요한 분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 숨 쉬는 매순간 필요한 분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신에게 걸 수 있는 모든 기대와 요구와 상상을 훨씬 능가하는 분이기에 그분이야말로 정말로 인간에게 필요한 분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해도 바로 그점이 복음의 진리이며 좋은 소식이다.

3. 새로운 관점

  행복하지 못한 현실이 절망과 좌절을 안겨줄 때 우리는 넓은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무능한 우상들 앞으로 달려가게 된다. 어떻게든 현실의 고통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현실을 보는 자가 자기중심적인 시각에서 탈출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분명 새로운 평화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반 잔의 물을 불평 없이 감사하며 마실 수 있을 것이다. 우상은 절대로 인간을 돕지 못한다. 우상에게는 인간을 욕망에서 끌어올릴 힘이 없다. 우상이 바로 인간의 욕망에서 파상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욕망을 초월하신 분이기에 인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주실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높고 더 넓은 곳으로 인도해주신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게 되고 현실에 대한 큰 그림도 볼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옹졸하고 편협한 시각을 바로 잡아주시고 하나님의 맹렬한 불길은 우리의 자기연민을 태워 잿더미로 만드신다.

4. 하나님을 예배하였더니

  혼동과 절망의 구덩이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어느 날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비로소 그는 진실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순간에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된 것이다. 예배 가운데 그는 거룩한 하나님을 만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출하여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 하나님 앞에서 전혀 다른 시각으로 현실을 보게 된 것이다. 성전에서 그는 자신의 눈을 가렸던 상처와 억울함을 떼어내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모든 것이 달라보였다.

  이 시편기자를 절망에서 소망으로 옮겨놓은 결정적 요인이 무엇이었는가? 예배였다. 그는 자신의 문제에서 눈을 돌려 자신보다 훨씬 크고 위대하신 존재를 보았고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이기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알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히 그의 힘이고 유업이 되실 분이었다.

5. 해안을 떠나라

  예배하는 가운데 우리는 해안을 떠나게 된다. 즉 이기적인 욕망, 실망의 모래톱, 괴로움의 바위들로 위태로운 해안을 지나 하나님의 광활한 은혜의 바다를 항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익숙한 해안에만 안주해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안일함을 꾸짖으실 것이다.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떼어놓고 지도에도 없는 생소한 것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데려가실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누구보다 해안을 떠나고 싶은 사람들이고 반드시 떠나야 할 사람들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좌절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6. 예배는 위험하다.

  예배는 한 마디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데서 시작한다. 영적 황홀경을 체험하거나 낙천적 성격을 계발하거나 좌절감을 묵과하는 게 예배가 아니다. 예배란 평소 자기 자신에게만 향했던 눈을 돌려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예배 중에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셔드린다. 예배라는 단어에는 원래 가치를 인정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누가 알아주건 말건 명화는 언제나 명화이지만, 만일 당신이 미술관에 들어가서 그 그림을 쳐다보며 가치를 인정해준다면 그림이 갖고 있는 진가가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된다. 그 그림은 당신을 당신 자신으로부터 나오게 해서 당신의 상상력을 확대시키고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준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인정하건 안 하건 언제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찬양과 기도의 제사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이 그분의 권능을 우리에게 행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예배는 위험하다. 불을 갖고 노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나님과 자기 자신에 대한 주관적 이미지가 예배 중에 잿더미가 된다. 자기 삶을 주관하려 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서려 했던 모든 노력이 예배 중에 연기로 바뀐다. 그 불은 정련하는 불이고 우리 안의 불순물을 제거해서 확신과 기쁨과 평강을 갖게 하는 불이다. 그 불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다.


제7장 무자비한 자비를 맛보다


  하나님은 안전하지 않다. 그분은 왕이시고 거룩하며 무시무시한 분이다. 하지만 그분은 좋은 분이다. .

1. 계시된 하나님

  인간의 이해력은 언제나 인간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지식은 오직 받은 지식에 불과하다. 주어진 지식일 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그분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인간과 구별 짓는 요소가 바로 거룩함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거룩함으로 인간과 분리되기를 원치 않으시고 사랑으로 인간을 감싸주기로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사랑하시기 때문에 거룩하시고 거룩하시기 때문에 사랑하신다. 거룩함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사랑이다.

2. 가장 특별한 사랑, 아가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이타적인 사랑인지를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희생하는 사랑이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의미는 값진 대가를 치르고 우리의 가장 큰 유익을 위해 자기 자신을 주신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불로서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고 깨끗하게 정련시켰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키셨다. 죄의 특징 중 하나는 교만이다. 교만이란 자기의 삶을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는 자아 중심적 태도다. 자기 삶의 중심에 서려는 교만으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거력하고 돌아섰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교만과 불순종이다. 그로 인해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졌고 인간은 생명의 근원되시는 분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결국 최종의 대가는 죽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그런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교만에 찬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셨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 했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 인간의 자리를 차지하셨다. 임마누엘이 되신 예수님은 타락한 인류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고 죄의 결과로 인간이 당해야 할 죽음을 대신 당해주셨다. 그분의 겸손이 우리의 교만을 상쇄하신 것이다.

  불순종한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 인간 대신 순종하게 하셨다. 예수님의 순종은 인간의 불순종을 상쇄했다.

  예수님의 죽음은 완벽한 겸손과 순종을 보여주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리키는 것은 사랑이다. 타락한 인간을 찾아 나서고 타락한 인간을 위해 희생하고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는 사랑이다.

3. 지울 수 없는 존재의 초라함  

  우리가 갈등하고 애쓰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 보이기 위함이다. 재산이 많거나 직장에서 승진을 하거나 특이한 종교적 체험을 하면 아무래도 스스로에 대해 더 자신감이 생긴다.

4. 그래도 당신은 나의 숙녀라오!

  우리는 영원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재능이 뛰어나거나 성공을 해서가 아니라 왕중의 왕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입양해서 공주와 왕자로 삼아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불가능한 꿈을 꾸시고, 우리의 죄를 위해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시고, 우리를 위해 죄책감이라는 참을 수 없는 슬픔을 감당하시고, 하늘나라를 위해 지옥에도 가신 분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5. 무자비한 자비

  거룩함의 불길은 구원의 확신이라는 따뜻함만 주는 것이 아니다. 심판으로 정련시키기도 한다. 항상 최고를 선사하는 거룩한 사랑은 감상에 젖어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위대한 회복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계시다. 바로 우리의 삶을 재건하기 위함이다. 죄의 쓰레기들을 치우고 우리 삶에 새로운 기반을 내려서 사랑의 용광로에서 달구어진 철근으로 골격을 세운다.

  우리가 정한 때가 하나님이 정한 때에 맞추어 우리를 인도하시면서 우리에게 인내와 통찰력을 가르치신다. 이 모든 일은 그분의 사랑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다. 세상만사를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서 언젠가는 우리가 완벽하게 겸손하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곧 우리를 향한 그분의 계획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는 말씀은 언제나 좋은 일만 일어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모든 일을 사용하셔서 그분의 의도하신 목적, 즉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든다는 목적을 이루실 것이라는 의미다.

6. 끊어지지 않는 사랑

  하나님의 섭리의 불가사의한 뒷면까지 볼 수 있는 재주가 인간에게는 없다. 하나님의 섭리 중 상당 부분이 우리에게는 수수께끼다. 다만 우리가 아는 한 가지는 하나님이 선하신 목적을 가지고 섭리하시며 우리들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아픔과 역경이 많이 찾아오지만 그 어떤 역경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놓지 못한다.

제8장 물 한 방울 없어도 소망은 있다.


1. 은혜의 법칙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받아주셨다.

  예수님의 이름 다음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단어가 있다. 의심의 폭풍에서 우리를 지켜주고 죽음의 강에서 우리를 건져주고, 우리가 정말로 귀담아 들어서 우리 삶 깊숙이 새겨지게 해야 할 한마디, 바로 ‘은혜’라는 말이다. 은혜란 하나님이 우리 편이기 때문에 우리가 경기를 어떻게 하든지 상관없이 우리가 승리자라는 뜻이다.

2. 은혜, 마음껏 마셔라

  인생이 비참하고 참기 힘들 정도로 끔찍하고 완전히 파탄에 이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은혜의 비밀은 이런 것이다. 인생의 끝자락은 잘못되어도 인생의 중심은 괜찮다는 것이다. 인생의 중심은 창조주이며 구제주이신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기에 그곳에서 우리는 사랑받고, 보호받고, 인도받으며, 그분의 자녀로 선택된 모든 자들의 보장받은 미래로 나아가게 된다.

3.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연습

  거룩하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예수님이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셨다.

  믿음이 무엇인가? 첫 번째로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돕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구원의 역사에 일조하는 협력자가 아니다. 우리의 믿음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믿음이란 말 그대로 신뢰하는 것을 말한다.

4. 받아들여졌음을 받아들여라

  낑낑대며 암벽을 올라 어느 정도 업적도 이루었는데 정상에 이르지 못한 상황에서 우리의 기대를 충족해 줄 밑받침이 무너져 버렸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이 던져주시는 밧줄을 잡아야만 한다. 그 밧줄은 사랑과 은혜라는 강한 재질로 만들어졌고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이 붙잡고 계신 밧줄이다. 당연히 믿고 잡아야 한다. 믿음에 대한 정의 중 최고의 정의는 ‘우리를 받아들여주신 것을 받아들임’이라고 생각한다.

  큰 슬픔과 고통에 직면했을 때일수록 은혜가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공허하고 의미 없는 삶의 어두운 계곡을 걷고 있을 때 은혜가 절실하게 다가온다.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자신이 원하는 완벽한 삶을 살아갈 수 없을 때 오랫동안 억눌렀던 못된 충동이 다시 꿈틀거릴 때, 좌절이 기쁨과 용기를 꺾어버릴 때 은혜가 절실하게 다가온다. 그 순간에는 빛줄기가 어둠을 환하게 비추면서 한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너를 받아주겠다, 너를 받아주겠다. 너보다 위대한 자, 너는 이름조처 알지 못하는 자가 너를 받아주겠다. 지금 기 이름을 물어 보지 말라.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지금은 아무 것도 하려고 하지 말라. 언제가는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아무 것도 구하지 말고, 아무 것도 애써 보여주려 하지 말고, 아무것도 각오하지 말라. 그저 네가 받아들여졌다는 사실만 받아들여라.’ 이런 일이 일어나는 순간에 우리는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폴 틸리히).




제9장 결코 혼자가 아니다


1. 하나님께 버림받은 하나님

  성금요일의 의미를 우리는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때로는 하나님 없이 온 우주에 홀로 남겨진 듯한 느낌을 받더라도 우리는 절대 혼자가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셨다. 모순된 이야기지만 바로 그것이 십자가가 던지는 메시지다.   예수님의 고통은 육신적인 고통이 아니었다. 물론 육신의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은 사살이다. 그러나 육신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영적인 아픔이었다. 예수님은 갈보리 산 위에 칠흑처럼 캄캄하고 어두운 영혼의 밤을 맞이하였다.

2. 공정한 게임

  때로 우리는 인생이라는 천장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히기도 하고, 희망의 문이 쾅하고 닫히는 통에 손가락을 다치기도 하고, 상처로 얼룩진 길을 발이 부르트도록 걷기고 하도, 실패의 아픔이 질식할 정도로 가슴을 짓누르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은 못한다.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이 온 몸과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을 몸소 당하셨으니 말이다.

3. 부배 중의 임재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고통 때문에 고통스러워하신다. 십자가 죽음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모든 고통의 장소에 기꺼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십자가의 사건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의 부재에 침범 당했다. “하나님의 전존재가 고통 속에 계셨고 모든 고통은 하나님의 존재 속에 있었다.” 하나님은 힘들고 괴로울 때마다 찾아와서 우리의 의문에 대답해 주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날파리 떼를 쫓아버리지 않으시는 대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가까이, 매우 가까이 다가오셔서 우리의 손을 잡으시고 우리와 함께 인생길을 통행해 주신다. 그 길이 험난한 계속과 가파른 바위산을 지나는 길이라 해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고 절대로 떠나지 않으신다. 그렇기 때문에 어찌하든 우리는 인생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4.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다.

  예수님이 지옥까지 내려갔다 오셨기에 이제 하나님의 흔적인 지옥에도 남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매우 반가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 어떤 장소에서도, 어떤 시련에서도, 어떤 절망 가운데서도, 어떤 어둠 속에서도, 어떤 의혹이 생겨도, 어떤 고통이 찾아와도, 어떤 비참함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독생자를 지옥의 나락까지 보내셨다면 하나님은 인생의 어떤 역경 속에서도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5. 허황된 낙천주의를 십자가에 못 박다.

  열심히 일하고, 기도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모든 일이 이루어질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칠 때 예수님을 기억하라. 좌절하고 실망했을 때,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낙담될 때 예수님을 기억하라.


제10장 고통이 만들어내는 작품


  조지 맥도널드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아들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맛보았다. 인간이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과 같아지게 하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냉혹한 현실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왕관으로 곧장 넘어가는 일은 없다. 우리는 토요일이라는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야만 한다. 그러나 그 하루 동안 온갖 문제와 역경을 만나다보면 과연 내일의 해가 뜰지 암담하다. 그래도 우리는 토요일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의 고통을 대신 지고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고통은 어제와 다르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그분의 고통과 같게 만들었다. 즉 무의마한 고통이 아니라 의미와 목적이 있는 고통으로, 유해한 고통이 아니라 구원을 이루는 고통으로, 죽음을 부르는 고통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고통으로 변화시켜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의 고통을 피해야 할 재앙으로 보지 않고 상급을 받을 기회라고 이야기한다(약1:2-4).

1. 석탄이 다이아몬드가 되려면

  경험을 통해 볼 때, 고통은 확실히 인격을 연단하는 효과가 있다. 연은 바람을 타고 더 높이 올라간다. 인간도 삶의 광풍이 휘몰아칠 때 더 높은 곳으로 비상한다.

  위대한 업적은 주로 그런 힘겨운 분투에서 탄생한다.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문제가 있는 중에 위대한 업적을 이루게 된다는 얘기다. 플라톤은 곱사등이였다. 그리스의 유명한 웅변가 데모스테네스는 말더듬이였다. 그의 첫 공식연설을 들었던 사람들은 그를 비웃으며 야유했다. 호머는 장님이었고 베토벤은 귀머거리가 되었을 때 불후의 명작을 작곡했다.

2. 고통을 통한 치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이 기독교 신앙의 기반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성금요일에서 부활절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우리를 옮겨주었다. 진정한 기독교는 현실적 고통을 부인하거나 고통에서 즉각적인 해방을 약속하고 무조건적인 승리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고통의 한가운데서 구원을 약속하고 비극이 승리로 끝날 것을 보장한다.

  고통이 성숙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분명 좋은 소식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하나님은 최소한 세 가지 목적을 위해 고통을 사용하신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필요한 분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둘째는 하나님이 우리의 공허한 삶에 들어오시기 위해서이고, 마지막 세 번째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다.

3. 고통의 효과

  하나님은 어려움과 고통으로 우리의 주의를 먼저 끌고 우리를 잠잠케 하신 뒤, 우리를 고쳐주신다. 만일 열심히 노력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어떤 장애물도 넘을 수 있고 이 세상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면, 그래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 없다. 언제나 자기중심적이 되어서 자기 능력만 의지할 것이고 하나님은 주변적 존재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심각한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에게 강하게 저항하는 바보가 될 것이다.

  찰스 커밍스는 이런 글을 남겼다. “고통이 우리의 영성에 미치는 즉각적인 효과는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힘없고 보잘것 없는 존재인지를 제대로 일깨워준다는 점이다. 나는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만약 내게 어려움과 고통의 순간이 없었다면 노련하게 일처리하고 남보다 더 열심히 준비해서 내가 최고라는 자기만족의 착각 속에 살았을 것이다. 인간의 착각을 깨뜨리는 그러한 고통이야말로 참으로 유용하다. 그러한 고통이 있기에 내 자존심이 피땀 흘려 세우고 조심스레 유지하고 있는 ‘자아’의 모래성이 와르르 무너진다. 고통의 정도가 심각할수록 모래성은 완전히 무너져 내려 나를 태양과 비와 바람에 노출시킨다.”

  고통은 우리에게 뭔가 잘못되었다고 알리는 신호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신호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정신을 차리도록 만드는 것이다.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즐거움은 양심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속삭임이고 고통은 하나님의 외침이다. 고통은 귀머거리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확성기인 셈이다.”

  혼자 힘으로는 영혼의 깊은 갈망을 충족시킬 수 없다. 그 사실을 마침내 깨달았을 때 진정한 치유가 시작된다. 그때에야 자기중심적 꿈나라를 떠나서 집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4. 연약함 속의 능력

  죽어버린 꿈과 고통의 상황이 우리의 꽉 쥔 주먹을 펴줄 것이다. 자기만족의 허상에 빠지게 만드는 온갖 잡동사니를 쥐고 있던 손을 펴서 하나님의 임재라는 선물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 삶에 거하시는 것은 성령의 역사다. 성금요일의 십자가와 부활주일의 최종성취 사이의 험난한 길을 우리가 제대로 걸어갈 수 있도록 성령은 도우신다. 고통과 허무함은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영역이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믿음으로 살고 성령의 충만을 받아도 무력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우리가 약한 존재라서 그렇다. 하지만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주신다.

5.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충분하다.

  고통을 받는 중에, 아니 어쩌면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발견할 수 있었던 그 한 자기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하다는 사실이었다. 하나님이 우리가 요청한 그대로 허락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응답받는 기도의 대부분은 바울의 말처럼 충분한 하나님의 은혜다. 바울의 신학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비롯되었다. 십자가만큼 연약함이 두드러지게 나탄 곳이 없고 십자가만큼 패배가 명백한 곳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연약함 속에 계셨고 이 세상을 위한 구원의 능력을 보여주셨다.

6. 걸작으로 빚다.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이용해서 선한 결과를 맺게 할 수 있는 분이다. 우리를 정신 차리게 하시고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 그분의 능력이 나타나는 기회로 이용하신다. 토요일의 고통스런 나날에도, 아니 오히려 그 고통 때문에 하나님의 성량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하나님을 위대한 조각가에 비유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의 다윗 상마저 울고 갈 정도로 하나님은 우리를 언젠가 대단한 걸작으로 만드실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할 일이 산더미다.

  역사적으로 조각가들은 두 가지 기술을 기본적으로 사용해왔다. 재료를 붙여나가는 소조기법과 재료를 깎고 다듬는 조각 기법이다. 조각 기법에서는 조각가가 나무나 돌덩이를 놓고 머릿속에 완성된 모습을 그려가며 깎고 다듬어서 자신이 원하는 형태를 만들어나간다. 반면에서 소조 기법은 조각가가 진흙이나 밀랍이나 그 밖의 재료를 갖고 조금씩 붙여가면서 자신이 원하는 형태를 만들어 간다. 하나님은 그 두 가지 기법을 모두 사용하셔서 죄를 깎아버리고 진흙을 덧붙이며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들어 가신다.

  조각 기법은 우리를 아프게 한다. 조각칼의 날카로운 칼끝이 우리의 잘못된 욕망과 완고한 고집을 사정없이 깎아버린다. 우리 삶에서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이기심 때문에 조각가 하나님이 이기심을 깎기 위해 사용하시는 연장이 좌절이다. 그리스도를 닮도록 만들기 위해 우리 뜻대로 되지 않게 하실 때가 있다. 하나님의 망치가 우리의 존재 깊숙한 곳에 절망이라는 쐐기를 박아버리면 자기중심적 이기심이 부러지면서 우리는 좀 더 걸작에 가까워진다.

  그런 후에 하나님은 빈틈을 메우시고 거친 면을 부드럽게 하시고 부러진 조각들을 이어서 그리스도를 닮은 새로운 형상으로 만들어주신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어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키신다.

  

제11장 하나님의 손을 잡는 훈련


  살다보면 일하기 싫을 때도 있고,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맡겨진 일을 끝낼 수 있을지 절망할 때도 있고, 지치고 힘들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상황이 좋든 나쁘든 간에 우리는 그것을 절대로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다. 인생에는 피하지 못할 것이 있다. 좌절의 고통을 이겨내고 인생을 잘 살기 위한 방법 중의 한 가지를 하기 싫어도 자신을 단련하고 절제하는 법이다. 어느 분야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단련해야 한다. 자기단련 없이 운동선수는 승리할 수 없고, 실업가는 기업을 운영할 수 없고, 학자는 좋은 책을 쓸 수 없고, 예술가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없다.

1. 신앙의 센터보드

  우리 삶에도 센터보드(배가 옆으로 밀리는 것을 막아주는 관)가 있어야 흔들리지 않는다. 신앙 훈련은 그런 면에서 더욱 필수적이다. 욕망의 바람에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지 않는 안전장치일 뿐 아니라 오히려 그 바람을 이용해서 최선의 결과를 낳게 만들어준다.

  신앙훈련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매주 드리는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날마다 드리는 기도생활이다.

2. 왜 기도해야 할까?

  우리는 세 가지 이유에서 기도해야 한다. 첫째로는 하나님이 기도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주목하시며 도와주기 원하시기 때문에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선하신 뜻을 이루게 된다. 마지막으로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기도가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3. 듣는 훈련

  신앙생활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훈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역사가 일어난다. 인간이 하는 말들은 과녁을 맞히지 못하고 부러진 화살마냥 땅에 떨어질 때가 많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로 그냥 떨어지는 법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의도한 바를 성취하고 그분이 보낸 일을 형통하게 만든다(사55:11).

  어디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가? 하나님은 전능한 분이므로 특정한 영역에 제한을 둘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성경말씀, 설교, 세례와 성찬을 통해 말씀하신다. 창조의 역사를 일으키고 생명의 원천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처럼 성경, 설교, 세례와 성찬을 통해 접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귀담아 듣는 훈련을 해야 한다.

4. 무조건 따라가는 훈련

  신앙훈련을 통해 우리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따라오라”고 하시는 것을 듣게 된다. 그런 경우 우리는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순종할 것인가, 순종하지 않을 것인가. 따른다는 것은 같은 길을 걸어간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나님과 함께 오래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다. 하나님이 걷고 계시는 길을 따라간다면 그것이 곧 순종이고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걸어가면 그것이 곧 불순종이다. 우리가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분의 사랑을 증명하셨고 신뢰받은 만한 분임을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왜 그런 길로 인도하시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을 것이고, 다음 발걸음을 떼면 무엇이 있을지 불안할 때도 있을 것이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항상 쉽고 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벽한 지혜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기에 항상 최선의 길로 인도하시리라고 믿어야 한다. 가장 순종하기 힘든 길이 가장 좋은 성숙의 기회를 제공해 줄 때가 많다.

5. 감사하는 훈련

  불평과 원망이 쌓일 때 가장 효과적인 치료약은 감사하는 것이다. 감사하는 태도는 우리의 세계를 뒤바꾸어 놓을 수 있다. 갖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기보다 가진 것에 감사할 때 관점의 변화가 일어난다. 당장 가진 것이 보잘 것 없고 미미해보여도 감사의 자세를 잊지 말아야 한다.

6. 하나님의 반전을 기대하는 훈련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은 뜻밖의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이다. 원했던 문이 열리지 않으면 창조의 하나님이 새로운 문을 여셔서 상상도 못했던 미래로 인도해주실 것을 신뢰하라. 그러나 그 문이 열리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성금요일의 비극을 승리의 부활주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가능하시다는 기대와 믿음이 필요하다.


제12장 더는 내리막길이 슬프지 않다.


  토요일의 삶은 부활주일이 다가온다는 희망에 부푼 한편 여전히 죄의 상처를 절뚝거리는 삶이다.

1. 불완전함을 껴안으라

  우리가 당하는 일이 최종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만 알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일도 견딜 만하고 살아갈 용기를 낼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다. 토요일 시대를 사는 우리는 불완전한 세계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타락한 세상에 사는 타락한 우리는 언제나 인생의 모서리에 찢기고 상처를 받을 것이란 사실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주지시켜야 한다.

2. 실패는 통해 나아가는 법

  삶은 모험이다. 인생길은 지뢰밭은 걷는 것과 다름이 없다. 다음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자신의 세계가 산산조각 날 수도 있다. 살다보면 누구나 실패한다. 실패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두 가지 선택이 있다. 위축되거나 아니면 실수에서 교훈을 얻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인생에는 모험이 필요하고 모험에는 실패의 위험이 따른다. 그러므로 제대로 실패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토마스 왓슨은 아이비엠사가 컴퓨터 산업의 선두를 달리고 있는 성공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실패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웠거든요!” 그것이 바로 실패에 성공하는 비결이다.

3. 마법의 겨자씨

  불만과 원망이 쌓일 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 중 하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헤롤드 쿠시너는 중국의 옛날이야기 하나를 소개했다. 한 어머니에게 외동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죽고 나서 어머니는 성자를 찾아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어떤 마법의 부적을 사용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성자는 그 여인의 말을 무시하거나 얼토당토 않는 소리라고 반박하지 않고 대시 이렇게 이야기해주었다. “한 번도 슬픈 일을 당해보지 않은 집에 가서 겨자씨 한 알을 얻어오시오. 그 씨앗이 당신의 슬픔을 없애 줄 것이오.” 그래서 여인은 그 마법의 겨자씨를 얻기 위해 길을 떠났다. 제일 먼저 발길을 멈춘 곳은 웅장한 대저택이었다. 여인은 문을 두드린 후에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한 번도 슬픈 일을 당해보지 않은 집을 찾고 있어요. 여기가 그런 집 아닌가요? 이건 저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랍니다.” 그러나 그 집 사람들은 집을 잘못 찾아왔다고 하면서 최근에 당한 가슴 아픈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여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도 어려운 일을 당해보았으니 상심한 이 집 사람들을 도와주어야겠군.’ 그래서 그 집에 머물면서 집안사람들을 위로해준 후에 다시 슬픔을 당하지 않는 집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초가집이든 궁궐이든 어디를 가나 슬픔을 당해보지 않은 집을 한 곳도 찾을 수 없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위로해주던 그 여인은 마법의 겨자씨를 까맣게 잊어버렸고 그러는 사이에 여인은 자신의 슬픔마저 잊어버렸다.

  자신의 갈망이 채워지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슬픔에 무관심하지 않기 바란다. 어쩌면 그들의 고통이야말로 당신을 자기 연민의 구덩이에서 헤어 나오게 하는 사다리일 수도 있다. 불만과 원망이 쌓이고 자기 자신에게 실망했을 때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을 섬기고 봉사할 방법을 찾아보라. 아픈 사람을 방문한다든지, 주일학교에서 가르친다든지, 지역 봉사단체에 가서 자원봉사를 한다든지 무엇이든 당신이 아닌 남을 위한 일을 해 보라.

4. 석탄을 캐내고 있었소!

  이루지 못한 소원이 있으면 그것이 이루어질 미래를 바라보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칫 현재에 소홀해지기 쉽다. 소원성취의 아득한 지형선만 쳐다보고 있으면 자신이 딛고 있는 발 아래 땅을 망각하게 된다. 예수님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눈앞에 직면한 일을 집중하셨다. 그 점이 주님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리는 눈앞에 놓인 평범한 삶보다 더 극적이고 흥미진진한 삶을 원한다. 그러나 오늘 주어진 일은 내일의 승리를 위해 필수적이다.

5. 기다려라!

  하나님은 시간의 주인이시다. 그것은 참으로 좋은 소식이다. 단 나쁜 소식은 하나님의 스케줄이 우리의 스케줄과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받고 싶은데 하나님은 내일 주고 싶어 하신다. 반대로 우리는 내일로 미루고 싶은데 하나님은 오늘 당장 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이 가장 좋은지를 알고 계신다. 우리는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는 가장 적절한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인도 선교사 윌리엄 캐리는 인도로 간 지 7년 만에 최초의 개종자에게 세례를 주었고 헨리 리차즈 역사 콩고로 간 지 7년 후에야 첫 개종자를 보게 되었다. 운동의 기본기를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몸에 익히듯 우리도 인내의 훈련에 부단히 매진해야 한다.


제13장 어두울수록 더 빛나는 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에 오시고 우리의 죄와 슬픔을 대신 담당해주셨다는 것이 성금요일 사건의 의의다. 고통은 끝나지 않았지만 이제는 주님의 임재가 그 고통을 완화시켜 주고 있다. 성금요일의 시간이 지나고 토요일을 맞이한 우리는 성령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다는 복된 소식을 알고 있다. 성령께 마음을 열기만 하면 고통의 시간을 이용해서 우리를 더 나은 인간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1. 하나님의 영원한 웃음

  부활절의 빛 속에서 우리는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영원의 새벽이 금요일의 어둠을 몰아내고 토요일의 혼란을 거두어가는 장면이다. 그때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은 우리를 위해 버림받으신 분의 영광이다.

2. 갈망의 고통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의 굶주림을 온전히 채워주지 못한다. 가끔 일시적 만족을 얻기는 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말하는 소망은 흔히 말하는 소원성취와 차원이 다르다. 진정한 소망은 정상적인 인과관계를 뛰어넘는 무언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 무언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3. 그림의 떡

  현재의 고난은 영원한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며 오히려 우리를 그 영광을 향해 준비시켜준다.

  아픈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 말은 그저 ‘그림의 떡’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C. S. 루이스는 이렇게 반박했다. “그림의 떡은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다. 만일 없다면 기독교는 허구다. 만일 그림의 떡이 있다면 기독교는 진리다.”

  영원한 천국일 지향하는 것이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이용되지 않기 위해서는 천국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부터 따져봐야 한다. 그 개념이 자신의 주관적 갈망에서 비롯되었다면 결국은 삶의 도피수단으로 이용될 것이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객관적 사실에서 비롯되었다면 절대로 현실도피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4. 주를 위해 세상을 사랑하라

  기독교의 소망은 내세지향적이 아니라 현세지향적이다. 성경은 세상이라는 단어를 두 가지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다. 하나는 죄에 물든 삶의 방식, 즉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진 멸망 받을 삶의 방식을 일컫는다. 우리 역시 최종 승리를 확신하는 사람들이기에 비록 현실의 고통과 난관에 둘러싸여 있더라도 승리를 향한 전략을 짜고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

5. 산 정상에서 바라보라

  예수님을 위해 이 세상을 사랑하라는 말은 천국을 바라보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서도 이 세상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서 겪는 모든 일들은 언젠가 구원의 차원으로 승화될 것이기에 소중히 여겨야 하고, 이 세상에서 겪는 모든 일들은 언젠가 구원의 차원으로 승화될 것이기에 집착을 버려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기쁨으로 이 세상을 마음껏 섬길 수 있다.

6. 죽음의 그림자에서 생명의 빛으로

  이생의 차원에서 보았을 때 죽음은 완전히 부정적인 개념이고 불완전의 극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죽음은 요단강이고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