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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함의 영성(어니스크 커처·캐서린 케첨, 정윤철·장혜영, 살림, 2009)

기독항해자 2012. 9. 28. 11:15

불완전함의 영성(어니스크 커처·캐서린 케첨, 정윤철·장혜영, 살림, 2009), 2012년 9월에 읽음


이 책은 AA의 경험을 풀어놓은 책이다. 알코올 중독자들은 불완전한 사람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다 중독자들이다. 그말은 곧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로 영원을 소망한다. 아니 우리는 영원한 존재로 유한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우리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거기에서 영성이 시작된다. 이 불완전함의 영성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내가 노력해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생도 선물이다. 우리의 인생도 영성도 선물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거기에서 감사가 흘러나오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이 용서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이 용서도 선선물이다. 우리가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용서다. 우리가 용서를 선물로 인식할 때 자기를 용서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을 통해 보다 너그러운 사람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각박한 세상에서 이 책을 통해 너그러운 사람, 넓은 마음의 소유자로 각자를 키워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한다. 


서문 영성의 이야기

영성은 우리에게 실패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실패가 일반적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실수는 경기의 일부, 즉 준엄한 진리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전부’가 아니지만 물론 ‘전무’도 아니다. 영성은 역설의 두 극단 사이에 놓여 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우리의 절망과 무력함 그리고 상처 입음을 직면할 수 있다. 우리의 한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통해 우리는 고통을 줄이는 방법을 발견하고, 상처와 치유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애를 쓴다. 영성은 우리가 깨어지고 불완전한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의 실수를 가지고 남을 탓할 필요가 없다. 우리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이나 다른 대상도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 영성은 먼저 우리로 하여금 인간 존재의 가장 중심에 자리 잡은 불완전함을 보도록 하고, 종국에는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돕는다. 영성은 ‘할 캄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면, 서투르게라도 해야 한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한다.

불완전함의 영성은 부조리와 혼돈, 어둠, 고통이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부조리 속에서 의미를 찾고, 혼돈 속에서 평화를 구하며, 어둠과 고통 가운데서 빛과 기쁨을 찾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불완전함의 영성은 고통의 불가피성을 말하면서도 그 고통 속에서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함께 말하는 영성에 관한 계속되는 이야기이다.

불완전함의 영성은 정답보다는 질문에, 완벽해지려는 분투보다는 겸손을 향한 여정에 더욱 관심이 있다.

불완전함의 영성은 완전하고자 했던 시도가 인간의 가장 비극적인 실수라고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불완전함의 영성은 인간의 한계와 무력함을 실제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기초를 두고 있다.

제1부 지혜의 뿌리

제1장 장미의 향기

영성은 건강과 매우 유사하다. 우리 모두는 건강을 가지고 있다. 건강이 좋든 나쁘든, 중요한 것은 누구도 건강과 무관할 수 없다는 게 사실이다. 영성도 마찬가지다. 모든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영성이 있느냐 없느냐는 우문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성이 우리를 고립과 파괴로 이끄는 나쁜 영성인지, 긍정과 생명으로 이끄는 좋은 영성인지를 물어야 한다.

영성의 가장 핵심적인 역설은 완성되지 못한 존재로서 느끼는 부족함이다. 인간이 이 땅의 현실에 속해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넘어서기도 하는 이중적 존재라는 점에서, 이러한 부족함은 당연히 따라오는 역설이기도 하다. 인간은 부족하지만 완성을 추구하며, 불확실함 속에서 확실함을 구하며, 미완의 존재로 완전을 꿈꾸고, 깨어졌지만 온전하기를 원한다. 그런 바람들은 물로 충족되지 못한다. 인간에게 완벽과 확실함, 완전, 온전함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불완전함의 영성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는 것이 영성의 첫걸음이라고 제안한다. 그것은 혼돈스럽고, 역설적이고 불완전한, 완벽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자아를 똑바로 대면하는 것이다. 흠이 없는 인간은 없다. 그리고 그 불완전한 기초를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절망이 아니라 기쁨을 얻는다. 이 또한 역설이지만 우리가 그토록 찾던 평화와 고요가 우리의 불완전한 실재 안에 있는 까닭이다.

영성은 종교가 아니다

영성은 종교와 무엇이 다를까? 먼저 영성에는 경계가 없다. 물질은 한정되지만 영혼은 한정될 수 없다.

영성은 치료가 아니다

심리치료는 어느 정도 인간이 ‘완전히 악하다’ 또는 ‘완전히 선하다’라고 주장한다. 불완전함의 영성은 나와 당신과 세상에 무언가 문제가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우리 존재의 본질이기 때문에 별 문제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제2장 일상을 넘어

영성은 늘 저 너머를 가리킨다. 일상을 넘어, 소유를 넘어, 자아의 좁은 한계를 넘어, 그리고 무엇보다 영성은 우리의 기대를 넘어선다. 영성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존재하고, 따라서 우리의 기대대로 이루어지는 법이 없다.

영성은 순간적인 지각을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영성은 언제나 “그래, 여기에 무엇인가가 있지.”라는 긍정과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 그 이상의 무엇이 분명 또 있을 거야”라는 부정을 모두 포함한다.

‘일상을 넘어’라는 것은 물질과 소유, 자아의 한계를 넘는다는 말이다. 영성은 일상을 초월한다. 하지만 동시에 영성은 일상에서만 발견된다. 영성은 우리들 너머에 있지만, 우리의 모든 행동 속에 있기도 하다. 영성은 특별하지만 동시에 지극히 평범하다.

영성은 거창하지 않으면 단순하다. 너무 단순하기 때문에 오히려 정희하거나 묘사하기 어렵다. 깊은 단순함을 표현되지 못하는 까닭이다.

제3장 한계의 실재

불완전함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불확실성과 부족함, 무기력과 통제 불능, 실패에 뿌리를 두고 오직 그것을 통해서 드러나는 영성은 우리에게 그러한 불안전함을 참고 견디라고 권면한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라는 생각을 비료 삼아 땅을 일구면 영적 민감함이라는 꽃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영성의 탐구에서 가장 큰 위험은 기준을 바꾸려는 유혹이다. ‘완전’의 기준을 바꾸거나 낮추어, 혹은 우리의 실패와 결점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려 불완전함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말이다. 불완전함의 영성은 그러한 시도를 무용하다고 여긴다. 우리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초대 기독교는 참된 치유를 잘 보여준다. 누구든 스스로를 완전하다 생각하도록 기준을 낮추어버리는 대신 그들은 ‘불완전함과 더불어 사는 삶’을 보여주었다.

영성이란 도움을 청하는 외침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불완전함과 더불어 살며 그것을 참아내는 삶으로 이어진다. 성인과 현자들이 주장했듯이 불완전함은 불완전함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래야만 불완전함을 인내할 수 있고 또 불완전함을 창조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삶의 이상과 방법을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어려운 상황에서 ‘문제가 있으면 고치면 된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생각은 자연히 ‘고치지 못할 문제는 없다’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문제가 없다’면 영성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 완벽한 세상에는 영성이 있을 수 없다. ‘완벽’은 완전하다는 말이고 또한 완성 즉 끝을 보았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살아 있는 한 끝을 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겠는가. 불완전함은 한계와 관련이 있다. 인간인 우리가 한계를 가진 게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가 유한한 것이다. 무언가 잘못되었고, 그 문제를 고칠 수는 없다. 한계의 실재를 부정하고 거절할 때마다 영성은 고통을 겪는다.

무한함에 목마른 유한한 존재, 신이 되고자 애를 태우는 피조물, 또한 전부를 걸도 덤빈다 해도 파산을 면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주어진 한계와 그것을 부인하려는 긴장 사이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뭘까? 현자와 성인들이 그것에 대해 도움이 될 만한 생각들을 남겼다. 자신의 불완전함과 끊임없이 싸웠던 훌륭한 사막의 교부들은 ‘자신을 참고 견디는 법’을 발견했는데, 그 비밀은 바로 긍휼이었다. 긍휼은 다른 이들의 불완전함을 ‘참고 견디어주는’ 사랑에서 시작한다.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라!” 늘 끊임없이 자신을 인지하는 자기인식과 자신의 불완전함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이 필요하다. 정직은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한 것이고 참된 정직은 우리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도록 권면하기 때문이다. 당신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또 다른 이들도 그들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라. 사람들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스스로 처리할 수 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그들의 문제를 지적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우리의 결점을 인정할 때에 신은 긍휼을 베푸신다. 우리가 인정한 결점은 신을 밀어내는 대신 신을 우리에게로 끌어당긴다. 우리의 결점이 긍휼을 베푸시기 원하는 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 사랑받을 자격이 없ㅎ다고 느끼게 했던 그 결점이 바로 신의 관심을 끄는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명상을 통해 깨닫게 된다.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는 것이 초기 성인들이 가장 동경하던 긍휼을 계발하는 첫걸음이다.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을 보면서 이제 자신과 그 사람들이 다르지 않고 비슷한 존재라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제4장 균형 감각

인생에 기복이 있듯이 우리는 같은 시각으로 우리의 내면을 보아야 한다. 어두움 속에 빛이 있고 악 속에 선이 있다. 불완전함의 양성을 통해 우리는 천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라, 둘 모두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기쁨의 영성은 비극의 영성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행복한 영성을 찾아보라. 그러한 영성은 없다. 참된 감정은 참된 존재에 뿌리를 두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우리는 자신과 우리의 삶, 그리고 세계가 양쪽 중의 하나가 아니라 모두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영성은 우리의 양면성을 끌어안는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는 세계, 즉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끌어안고 또한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결국 신이 아닌 존재이다. 인간이 찢어진 자아를 받아들이고 또한 찢어진 감정을 느끼는 것도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에야, 무엇이든 자신에게 가능한 치유를 바라게 되고 따라서 최대한 온전해지게 된다. 어둠을 아는 사람이라야 빛에 감사하고, 어두움을 인정하는 사람이라야 빛을 볼 수 있다. 우리의 깨어짐이 우리를 온전하게 한다. 슬픔과 절망, 눈물 그리고 고통의 울부짖음은 영성의 위배나 부족이 아니라, 오히려 받아들임이라는 궁극적인 영성이다.

모든 영성, 그러나 특히 불완전함의 영성은 역설을 인지하고 인정하며 더불어 살라고 권면한다. 역설은 표면적인 모순이다. 역설은 서로 아무 관련이 없는 두 개의 가치를 두고 비교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깊은 관련이 있다. 네모난 원은 모순이고 거룩한 죄인은 역설이다.

제5장 영성 체험

무엇보다 영성은 삶의 방식이다. 우리는 영성을 생각하거나 느끼고 감지하는 것만이 아니라 영성을 사는 것이다. 영성은 우리가 인지하고 느끼고 그것을 바탕으로 내리는 선택에 영향을 미치면서 인간 존재의 중심을 통과한다. 영성을 체험하는 데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그것은 보는 것, 느끼는 것 그리고 선택하는 것이다.

체험이라 시각과 감각, 그리고 의지를 모두 포함하는 총체이다. 체험은 아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저 느끼는 것 그 이상이다. 또한 이 때 아는 것은 무엇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무엇의 지식이기 때문에 체험은 보는 것이라고만 말할 수 없다. 체험이란 삶을 관찰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대신, 우리가 창조적으로 끌어안고 또 우리를 안아주기도 하는 숨을 쉬는 실재가 삶이라고 이야기한다.

상처를 치유하고 깨어진 자아의 조각들을 모아 온전하게 만드는 영성은 머리와 가슴, 생각과 감정, 시각과 느낌 양쪽 모두를 필요로 한다. 각각의 역할을 다르지만 더 큰 전체에 어울려가는 방식으로 활동한다.

영성의 이상은 명제가 아니라 이해와 받아들임 그리고 참여한 한 행위로 어우러진 삶의 방식이다. 사람들은 공동체에 관여하면서 그러한 삶의 방식으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 이해와 받아들임 그리고 참여의 연합을 추구하는 공동체를 통해서만 그러한 삶의 방식은 그러한 삶의 방식은 보전되고 또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해, 받아들임, 참여. 어린아이가 먼저 기고, 두 발을 디디고 서기 시작한 다음에야 한 발을 떼고 드디어 걸음을 배우듯, 모든 사람은 읽고 생각하며 인생에 필요한 교훈들을 배우기보다 행동으로 그것을 배운다.

공동체를 통해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참여하면서 우리는 영성의 경험이 단순한 시각과 감각, 그리고 의지 그 이상이라는 사실을 배운다. 영성의 경험은 이 세 가지가 어울려 함께 작용할 때 가능하다.

제6장 공유된 이상과 공유된 희망

영성은 공동체 안에서 자란다. 이상과 목표, 기억과 희망을 나누는 사람들과의 연합 안에서 자라는 것이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가 초대 기독교인들에게 교훈했듯이, 영적인 삶의 길은 같은 길을 추구하는 사람들, 즉 ‘동료 기독교인들과의 동행’이다. 영성은 수도원의 독방에서 홀로 읽고 생각하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외로움을 통해서도 발견되지만, 그 완성은 오직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다.

상호성, 사랑, 지혜, 금주와 같은 삶의 가장 귀한 실재를 깨달으려면, 먼저 그 실재들을 나누려 해야 하고 또 그들을 받아들이고자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베푸는 것도 가능해진다.

우리에게 상호성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결점이 있고 불완전한 존재인 까닭이다. 우리 자신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못하다고 깨달을 때, 우리는 상호관계의 필요를 느끼게 된다. 우리는 자신을 돕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며,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도 그들이 필요하다. 우리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체 속에서 발견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공동체를 발견하고 그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깨달아가면서 우리는 어울림의 경험을 한다. 진정한 좋은 느낌은 선한 존재에서 나오는 법이며 우리가 고뇌에 찬 물음을 두고 정답을 찾아 헤매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때에야 가능한다.

공동체는 사람들이 동일한 영적 실재를 추구할 때 이루어진다. 공동체의 핵심은 우리 모두가 찾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찾아짐을 통해서만 우리가 찾는 그것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을 발견하는 데 있다.


제2부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 모임의 발견들

AA의 초기 멤버들이 첫 번째로 발견한 것은 영성은 필수적이지만 다르다는 사실이다. 인간다움을 회복하기 위해 영성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영성이라는 말을 들을 때 여느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과 이들의 영성은 다르다.

두 번째 발견은 마술과 기적, 마술과 신비 사이의 큰 차이점이다. 영성은 마술의 눈속임이 아니라, 신비와 기적에 담긴 경이로움이다.

초기 AA멤버들의 세 번째 발견은 영성은 근본적으로 무한하다는 사실이다. 영성은 잡히지도 한고 소유되지 않으며 해답보다는 질문에 익숙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참된 영성은 인간 존재의 모든 영역에 편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성은 삶의 모든 것에 영향을 주는 실재이며, 따라서 그렇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제7장 영성은 필수적이지만 다르다

우리는 모두 찾고 있지만 오직 우리가 추구하는 영적 실재에 의해서 발견될 뿐이다. AA의 초기 멤버들에게 가장 중요한 발견은 누군가 자신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발견은 단주의 성공과 충만한 인생을 위해 필수적이다. 자신을 뛰어넘는 실재 즉 ‘자신보다 더 위대한 힘’이 수천명의 알코올 중독자들에게 희망을 가져다 주었다.

“신은 상처를 통해 들어오신다.” 수렁에 빠진 사람은 도움이 없이는 살 길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불완전함의 영성은 연약하고 깨어진,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들을 위한 영성이다. 동시에 크고 강한 열정과 어두운 과거와 불확실한 미래를 가진 사람들과 평범하거나 파격적인 사람들 모두를 위한 영성이기도 하다.

인생의 시작과 더불어 우리들은 대부분 우리 삶의 지도를 대신 그려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부모님과 선생님을 비롯한 이런 사람들은 우리의 역할을 정해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어울리는 혹은 어울린다고 추측되는 지도를 대신 그려주려 한다. 어른이 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정의하고 자신의 지도를 찾고 그리며 또 자신의 주인이 되는 자신의 책임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때로는 어른이 된 후에도 우리에게 우리의 역할을 어떠해야 한다며 자신의 주장을 앞세우고 우리의 이야기를 자기 식대로 전하려 드는 사람을 피해 가는 것도 필요하다. 우리 영적 문제들의 일부는 적어도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이 마음대로 하도록 맡겼기 때문에 찾아온다.

영적 문제에 대해서 부모가 선생, 친구, 상사, 광고주들 등 다른 어떤 사람이라도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위대한 영적 스승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명령을 하거나, 자신의 방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지도라도 잘못된 지역에서는 도움은 커녕 방해물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그들 자신의 지도, 즉 이야기들을 내주었다. 내가 나의 이야기를 찾도록 돕는 최선의 길은 내게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제8장 마법이 아니라 기적

우리는 기적을 창조하는 것이 아닐 다만 증언할 뿐이다. 기적을 증언하려면 먼저 그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기적이 ‘왜’, ‘어떻게’ 존재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인간의 이성, 그 이상과 그 너머에 있는 신비와 같은 기적은 설명도 해답도 이해도 불가능하다.

모든 영성의 중심에는 경이로움과 놀라움, 그리고 경외삼이 있다. 장대한 풍경, 장엄한 교향곡, 지극히 아름다운 자기 희생의 사랑, 그 대상이 무엇이든 그것은 우리가 놀라고 기뻐하는 힘이기도 하다. 통제하고자 할 때 주어지는 벌칙은 경이로움과 경외감을 맛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기적을 ‘보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통제하고 주도하려는 불안한 결심은 다름 아닌 영성의 실패를 의미한다.

중독은 통제하려는 궁극적인 노력이자, 마법을 위한 최종적인 요구이며, 결국 영성의 실패를 상징한다. 약물의 마법으로 돌아서는 행위는 영적 공허를 물질적인 실재로 채우려는 무모하고 절망적인 시도이다. 그것은 기적의 자리를 마법으로 채우려고 하는 행위이다. 중독은 ‘내게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면 외부의 것으로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기도 하다. 약물로 충족될 수 없고 물질로도 채우지 못하는 임시변통적 추구는 영적인 실재 비슷한 것이나 속성 영성적 추구로 도약한다. 이러한 속성 영성은 재빠른 영적 임시변통의 일종이다.

알코올 중독자에게 알코올은 적어도 처음 잠깐 동안에 완벽한 마술이다. 많은 알코올 중독자들이 처음에는 술이 주는 즉각적이고 믿기 어려운 놀라운 느낌을 마술이라 이야기한다. 술은 그들이 노력이나 시간을 투자할 필요도 없이 신을 대면하도록 돕는다. 그러나 알코올 중독자들은 쓰라린 경험을 통해 그 지름길이 막다른 골목이라는 사실을 배운다. 중독을 치료하는 것은 스스로 신이 되고 경험을 주도하려는 ‘마법’ 같은 해결책을 찾겠다는 의지를 포기할 때 가능하다.

마법이 아닌 신비와 기적이라는 발견은 인간의 행위와 의지에 대한 한계와 책임성과도 관련이 있다. 마법과 기적의 차이는 고의성과 용의성의 차이를 반영한다. 고의성은 변화를 요구한다. 자신의 변화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자기 외의 실재들의 변화를 요구한다. 용의성은 자신에게 주도권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비록 내가 주도하지 않는 상황이더라도 존재의 변화 가능성에 마음을 여는 것이다.

마법과 기적의 차이에 대해 민감한 까닭은 영성이 ‘우상숭배’를 그토록 질색한다는 데 핵심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변화에 대한 마술적 통제권을 고집하는 고의성과 내가 변화되는 것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순종하는 용의성 사이의 차이 때문이다. 우상숭배는 통제를, 심지어 신비에 대한 통제를 억지로 얻어내어, 그것을 주술적인 부적 정도로 만들어버리는 행위이다.

‘의지로 되지 않을 일을 의지로 하려는 노력’은 우리의 영역이 아닌 곳으로 발을 내미는 행위이고 따라서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바로 우리 자신이 신이 되기를 주장하는 것이다. 통제되지 않는 일을 통제하려는 노력은 우리가 사는 ‘중독의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이다.

제9장 무한한 영성

영성은 추구하는 동안에만 우리의 소유가 되는 실재 중의 하나이다.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잃어버리는 실재가 영성이다. 우리는 영성을 사로잡지 못한다. 영성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우리는 그것을 잡아 가두고 놓치지 않으려 ‘묶어놓고자’ 하지만 영성은 우리의 손아귀를 늘 벗어나기 마련이다.

성장과 건축은 둘 다 영적 체험의 중요한 의미를 드러내지만, 불완전함의 영성은 영적인 삶의 다른 은유인 여행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순례의 은유는 자신만만한 확실성와 불확실성의 신비 사이의 차이점을 강조하면서 무한한 영성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순례는 확실한 목표를 두고 걷는 안정되고 목적지가 분명한 행군이 아니다. 그것은 꾸불꾸불 꼬여 엇갈리고 때로는 오히려 뒷걸음치게 하는 방랑의 여행일 뿐이다.

순례는 충동적으로 떠나는 방랑이나 완벽하고 꼼꼼한 사전준비가 필요한 관광이 아니라 변동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인생을 순례라고 간주할 때, 무한한 영성은 우리가 얼마를 왔는지가 아니라 앞으로 얼마가 남아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순례라는 은유는 인생이라는 여행의 목표가 우리의 완벽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불완전함 속에서 행복과 기쁨의 평안을 찾는 것에 있다고 제안한다.

연습의 목표는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초심은 무엇에든 준비된 마음이자 모든 것에 열린 마음이다. 초심자에게는 많은 가능성이 있지만, 전문가들에게는 가능성이 희박하다.

영적 스승들은 세 가지 일을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은 듣는다. 둘째 묻는다. 셋째, 이야기를 말한다. 각 과정은 모든 해답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과정이며, 따라서 무한한 영성의 본질적인 진리를 가르친다.

제10장 편만한 영성

영성은 우리 삶 전부에 영향을 끼치는 실재이다. 그게 아니라면 전혀 영향을 줄 수 없다는 말이다. 영성이 편만한 이유는 우리가 영성을 분석하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 영혼은 부분만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영혼은 우리의 부분만을 만지지 못한다. 영성의 편만성은 두 가지 차원을 포함한다. 영성은 전체의 표면을 아우를 뿐 아니라, 우리의 깊이까지도 꿰뚫는다. 우리는 영성을 살아야 하고 생각하고 느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삶 가운데서 영성을 행하고 실천함으로써 비로소 그것을 이해하게 된다. 따라서 영성은 우리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며 우리의 존재와 행위 모두에 흘러들어간다. 영성은 우리 존재의 핵심인 것이다. 영성은 한두 달 동안 이수하는 특별 프로그램이나 취미가 딜 수 없다.

아무것도 감추지 말라. 터무니 없는 명령이지만 사실 이것은 불완전함의 영성이 주는 최초의 위대한 선물이다. 불완전함을 받아들여야만 무엇도 감추지 않는 게 가능해 지기 때문이다.

옛날 먼 나라에 한 부주가 살았다. 그는 자신의 돈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는 사막으로 들어가 은둔자들과 함께 살며 신을 예배했다. 어느 날 그 남자와 다른 한 수도자는 이제 늙어 힘을 쓰지 못하는 두 마리의 나귀를 팔기 위해 시장으로 나왔다. 나귀가 필요한 사람들이 찾아와 괜찮은 상태인지를 물어왔다. “괜찮은 나귀면 우리가 왜 팔겠습니까?”라고 그는 대답했다.

어떤 사람이 물어왔다. “등과 꼬리가 왜 이렇게 거친 겁니까?”

그는 대답했다. “이 놈들이 늙고 고집에 세서 그렇지요. 꼬리를 당기고 채찍을 때려야 움직이니 말입니다.”

결국 나귀를 팔지 못한 채 둘은 사막으로 돌아왔고 함께 간 수도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 남자를 질책하며 왜 나귀를 사려는 사람들을 그렇게 쫓아버렸느냐고 했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설마 제가 고작 두 마리의 나귀 때문에 거짓말쟁이가 되려고, 제가 가진 모든 낙타와 소와 양 그리고 염소들을 버리고 이곳에 왔다고 생각하신 건 아니시겠지요?”

제3부 영성 체험하기

영성은 단순히 이야기를 나누거나, 읽거나, 고민하거나, 행위로 옮기는 데서 그치는 실재가 아니다. 영성은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영성은 우리가 특별한 경험을 하도록 돕고 수용할 능력을 준다.

제11장 해방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영성을 해방으로 경험한다. 이 해방은 참된 자유의 상태를 포함하긴 하지만, 자유와는 다른 의미이다. 자유는 주어진다기보다 쟁취해야 하는 것인 반면, 해방은 얻는 것이라기보다는 경험하는 것이고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해방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나눈다면 실패하기 마련이다.

해방의 경험은 ‘사슬이 풀리다, 빛이 들다, 나를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지다, 길이 보이다’ 등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러한 표현들은 해방의 경험이 ‘내가 해냈다’라는 승리의 일종이 나리,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라는 경이로움과 경외감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러한 경험은 얻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우리의 삶과 인생의 경험이 선물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해방은 자신을 위해서든 다른 사람을 위해서든 우리가 영성을 계획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내려놓을 때 시작된다. 해방의 경험은 대부분 고갈의 순간, 우리 자신의 노력을 포기하고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둘 때 찾아온다. 해방은 우리 자신의 운명을 통제하겠다는 모든 시도, 그리고 무엇이든 완벽하게 이루어내리라는 시도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미래를 통제하고 우리 삶의 모든 문제를 주도하겠다는 요구는 결국 우리의 삶을 마비시키는 근심으로 우리를 인도할 뿐이다.

제12장 감사

해방은 내가 얻거나 성취하는 물건이 아니라 선물이다. 따라서 해방의 경험은 자연히 감사의 경험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감사는 완전하고 아낌없이 값없이 주어진 선물에 대해 가능한 유일한 반응이다. 감사는 선물을 인지하는 시각, 즉 보는 방식이다. 감사는 선물을 보고 자신이 얼마나 축복받았는지를 인지하는 시각인데, 이것이야말로 영성의 주된 경험이다.

감사의 반대인 탐욕은 모든 것을 소유의 대상을 보는 시각이다. 탐욕과 불행은 함께 찾아온다고 영성의 시각은 우리에게 경고한다. 불행은 우리에게 주도권이 있고, 우리가 모든 것을 통제하며, 우리의 모든 소유는 당연하다는 생각에서 싹튼다. 불행은 소유하고, 소유하고 또 소유해야 한다는 방식이다. 그것에 더함에 대한 열망으로 더 얻고 승리하고 가지고 소유하겠다는 노력이다. 불행이 불행인 이유는 충분하다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삶의 기쁨인 행복은 사람의 인생을 다른 이유 없이 거저 주어진 실체나 선물로 보는 그런 비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감사의 경험에서 온다. 이러한 비전은 자기 자신을 중심에서 벗어나게 하고, 통제하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드러내면서 자기중심성을 치유한다.

영성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선물이다. 누구도 영성을 획득하거나 소유하지 못한다. 영성은 다른 이유 없이 거저 주어지는 실재이고 그러한 선물에 대한 유일한 반응은 감사한다. 거저 받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가 얼마나 축복받은 사람인지를 깨닫는 데에서 시작하는 감사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더 높고, 크고, 위대한 실재의 손길을 보게 된다.

제13장 겸손

영적 경험인 겸손에는 자신만의 역설이 있다. 겸손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이 겸손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역설이다. 그리고 겸손을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대부분 겸손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다. 겸손은 무엇보다 정직이다. 참된 겸손은 과대평가나 과소평가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겸손은 자기비하와 반대되며, 그만큼 자기열광의 반대이기도 하다. 겸손해진다는 의미는 비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실재에 튼튼히 선 자아는 우주의 다른 존재들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더 크거나 작지도 않다.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모든 것이도 하다.

제14장 관용

영성은 먼저 우리 모두가 불완전하다는 통찰에서 시작하며, 이러한 시각은 관용을 초청하고 또 요구한다. 우리 모두가 동일한 두려움과 슬픔을 나누고 있고, 동일한 악마를 상대로 각자 최선을 다해 싸우고 있으며, 우리가 지닌 것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이해와 함께, 이 땅의 인간 존재들의 풍요함과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인식하는 태도가 바로 관용이다.

영성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관용은 세계를 다르게 보는 시각, 즉 비전에서 시작된다. 관용은 특별히 무력함을 보는 것 이상을 요구한다. 우리가 자신의 무력함을 보아야 다른 사람의 무력함 또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제15장 용서

원한은 영적인 삶에는 독약과 같다. 원한은 문자적으로 ‘다시 느끼다’ 즉 ‘소급하여 느끼다’를 의미한다. 우리는 원한을 통해 과거에 매말리고 그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결국은 진창에 빠져버리고 만다. 원한은 아픔과 무력함, 분개, 두려움, 그리고 학대 등과 같은 오래된 상철흘 다시 들쑤신다. 원한은 상처에서 딱지를 떼어내며 그 아픔을 새롭게 하고 자신을 피해자로 보는 시각을 강화하는데 이는 영성과 반대되는 시각이다. 영성은 우리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과거의 잘못과 실패에 집중한다면 우리는 현재 우리 자신의 결함과 결점들을 보지 못하게 된다.

분노는 우리 영성의 집을 지어가는 발견하는 과정인 우리의 여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원한은 그 과정과 여정을 막아서고 방해한다. 원한으로 변한 분노는 우리를 고립시키며, 세상이 멈추어 서서 우리의 상처와 우리의 욕망 그리고 우리의 피해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원한에는 해방이 없고 오직 고통스러운 과거라는 감옥뿐이며 모든 평온함과 인간다움은 점점 사그러질 뿐이다. 분노의 위험은 분노 자체가 아니라 분노에 매달리고 또 오랫동안 집착하는 데, 즉 원한을 갖는 데에 있다.

원한의 반대는 용서이고 수세기에 걸쳐 영적 사상가들은 용서를 인간 삶의 종점이라고 생각했다. 신비주의 영성을 연구하는 D.M 둘링은 이렇게 표현했다. “용서는 신에게 속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용서는 하나님의 행위이며 우리가 아닌 타자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용서라는 말은 ‘입술이 빚어내는 소음’에 불과하다.” 우리는 용서를 주는 게 아니라 받아야 한다. 우리는 용서를 창조하지 못하고 용서는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 우리의 통제 저 밖에 놓여 있다. 우리는 용서를 명령할 수 없다.

용서는 망각이 아니다. 과거를 놓아준다는 말은 지워버린다는 뜻이 아니다. 또한 과거를 청산하고 깨끗이 잊으려는 시도도 아니다. 용서는 선물의 의미를 내포한다. 용서를 망각과 혼동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실재를 잃고 또 저버리는 셈이다. 용서와 망각이 서로 같다면 용서는 사람이 제어하는 실재이리라. 하지만 용서는 우리 자신이 아닌 자신을 넘어선 자신보다 큰 실재에 순종할 때만 가능하다. 우리는 용서를 우리의 힘으로 또는 우리 자신에게 베풀지 못한다.

제16장 안식

우리의 고통과 슬픔은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또 우리의 가족 안에서 시작된다. 가족에도 역설이 있다. 가족은 갓난아기의 연약함을 보호하는 반면, 첫 번째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부모는 갓난아기를 보호하고 돌보지만 자신의 자녀들에게 첫 번째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아이가 성숙하기까지 걸리는 시간과 현대 기술사회에 숨어 있는 위험들을 고려할 때,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가 그래하며 자녀를 지지하는 순간만큼 ‘안돼’ 하고 막아서야 할 순간이 많기 때문이다.

인생은 고통을 준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성장이 어디 있는가. 고통에는 목적이 있다. 고통은 우리에게 ‘무언가 잘못되었다’ 즉 무엇인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런 부조화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는 우리를 순례의 길로 인도하고 자신은 물론 다른 불완전한 존재들과의 공동체 속에서 어울릴 새로운 길을 찾도록 권면한다. 인생은 상처를 주지만 바로 그 상처 안에 치유의 가능성이 있다. 피해의식과 분노에서의 해방을 의미하는 치유의 사건은 감사로 가능해진다.

집을 찾으려면 먼저 자신에게 돌아오는, 즉 자신의 불완전한 인간다움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과정은 제일 먼저, 또 유일하게 자기용서로 시작된다. 영적 행위인 자기용서는 용서의 경험에 자신을 연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이 경험은 다른 사람이 우리를 용서하도록 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들의 용서가 나에게 중요한 정도만큼 다른 사람들을 내게 가까이 다다오도록 허용한다는 말이다. 용서받고 또 용서하는 용서의 전체적 경험은 우리 자신의 참된 자아를 되찾아준다.